128화. 석연치 않은 설렘 (10)
어째서기는, 내가 아는 이야기에서 너는 그러하였으니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그의 낯에 깃든 씁쓸함에 또 가슴이 욱신거려, 나는 다른 화제로 도피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난 건 우연이네. 후작이 나를 만날 줄 몰랐다니까….”
“그러긴 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루시페우스의 입꼬리에 미소가 깃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래쪽을 향하자, 그 미소는 대번에 자조가 되었다.
“그저, 레이디 아멜리와 후작이 외출하기에 혹시나… 싶었을 뿐입니다. 한 10퍼센트 정도의 확률로요.”
“근데 왜….”
거기까지 말한 나는,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그 불확실함을 쥐고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답을 듣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짐작하는 답이어도 무서웠고, 그게 아니라면 슬퍼질 거라 더 무서웠다.
하지만 맺지 못한 질문이라도, 루시페우스는 이미 답을 뱉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뵙길 바랐으니까요.”
다시금 심장이 죄었다. 그 두근거림을 부인하듯, 나는 부러 냉랭하게 대꾸했다.
“고작 10퍼센트라고 생각했다며.”
“그래도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아직 저를 부르지 않으시니, 제 쓸모를 피력할 일이 생기기를 기다려야지요.”
“그건 경이 일부러 마차를 고장 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럴 리가요.”
루시페우스가 한껏 당황하였다.
당황하라고 한 말에 그가 정말로 당황하자, 나는 정말이지 울고 싶어졌다.
내 한마디 한마디에 휩쓸리는 그를 보면서, 내가 그에게 깊은 의미가 되었다는 사실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자꾸만 다 제쳐두고 그의 마음을 받아주고 싶어지는 걸 참아야만 했다.
내가 그에게 아무런 답도 내주지 않는데도, 그는 나를 위한 행동들을 착실히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분간은 정말….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렌틸 자작 쪽 일은 고마웠어.”
실은, 그에게 고마움조차 전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움처럼 긍정적인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냈다가는, 그에게 단단히 세워둔 벽이 무너지고 말 것 같아서….
하여 나는 그 이상 다른 말을 보태지 않기 위해 입을 꼭 다물었다.
고작 그 정도로도,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만족해하는 미소가 흘렀다.
그런 미소조차 내게는 해로웠다.
울고 싶었다.
며칠 뒤 새벽, 수선화궁으로 향하는 궁내 마차 안.
“알려진 대로, 신성력과 마력 둘 다 많은 사람의 경우 대부분 일찍 죽었습니다. 살았더라도 장기에 손상을 입어 장애를 입었고요.”
“장애라.”
“심장이나 뇌 쪽에 손상을 입는 게 가장 흔하고요.”
그렇군…. 막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그가 엄청 뜨거웠으니까. 열사병으로 뇌 손상이 오는 거랑 같은 원리일까….’
루시페우스가 신성력 또한 많이 타고난 것을 안 뒤, 관련 조사를 위해 그와 알렉스를 학자의 탑으로 파견 보냈던 일에 대한 보고였다.
“그 정도면 됐지, 다시 학자의 탑에 가보려고?”
“좀 더 자세히 연구해보고 싶어서요. 제가 무예를 익히진 못했으니 밥값 하려면 문헌이라도 들입다 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저를 잘 들였다 생각하시려면 말입니다.”
그리 너스레 떠는 말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뭔가 살펴볼 거리가 남아 있다는 거겠지.’
그가 오늘 오후 기차를 타고 떠날 거라기에 시간이 없어, 서면으로 보고하겠다는 그를 아침 댓바람부터 불러들였다.
그가 꼭 필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검사들이 입을 안 연다고요?”
“제국어를 못하는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아무튼 경이 심문해봐야 할 것 같아.”
“흐음, 여기에까지 온 자들이 한마디도 못 하는 건 좀 이상한데…. 죽국은 문화가 다른가. 아무튼 만나보지요. 제가 오늘을 위해 서대륙에 유학을 다녀왔나 봅니다.”
막심이 다시금 넉살 좋게 말했다.
누가 얘를 보고서 그 어릴 적에 윌로우 놈에게 찍소리 못 하고 당하기만 하던 애라고 상상이나 하겠어?
힐베르크 후작을 미행한 자들은 렌틸 자작저에 침입한 자들과 함께 가둬둔 상태였다.
한데 그들은 모두 묵비권을 행사하는지 진짜로 말이 안 통하는 건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서대륙 공통어쯤이야 내가 가봐도 되는 건데, 세르니타에서의 일 이후로 암조 애들의 과보호가 심해져서 말이지….’
마침 우리에겐 서대륙 유학생 하나가 있는바, 막심을 시켜 그들을 심문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을 체포한 일이 막심이 학자의 탑에 파견 가 있던 도중의 일이라, 이제야 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경이 서대륙에 유학 갔을 때…. 알비누스 소후작도 서대륙에 있었지? 시기가 겹치는 것 같은데.”
“소후작과 저는 유학한 나라가 달라서요.”
“하긴, 그가 있던 죽국과 월국이 꽤 떨어져 있던가?”
어느새 궁내 마차가 수선화궁 앞에 다다랐다. 대부분의 관료들이 출근하기 전인 수선화궁은 꽤 적막했다.
나는 막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경이 유학한 월국에도 마검사가 많았어?”
“알비누스 소후작이 유학한 죽국이 서대륙에서 마도 공학이 제일 크게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마력을 조금이라도 타고났다면 마도 기계를 활용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소후작이 그때 썼다는 무기도, 마도 기계를 활용한 걸 겁니다.”
“응, 그의 마력 수준이 평범하다고 들었으니까.”
내 기사들의 기척조차 감지하는 루시페우스가, 도미닉이 마법을 쓰는 게 의외라는 식으로 말했으니 맞겠지….
그때의 생각에 빠진 채, 여전히 막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수선화궁 현관의 계단을 오를 때였다.
막심은 내처 설명을 이었다.
“물론 서대륙에도 마력을 타고나서 마법을 쓰는 이들도 있지만요. 마도 기계 덕에 본대륙의 마법사보다 마력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고…. 헉.”
서대륙의 지식을 신나서 떠들던 막심이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뭔가 못 볼 걸 보고 놀란 듯이.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따라가 보니….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수선화궁의 현관을 등지고, 루시페우스가 서 있었다.
숙직인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왕래하는 이 없는 이른 시간에, 나를 기다린 기색이었다.
“아이쿠.”
막심은 짐짓 무서워하는 체하며 내 손을 슬쩍 떨어뜨리고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얘가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서.
한데 정말로, 내게 인사하고서 상체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동자가 슬며시 막심을 스쳤다.
그 눈빛은 내가 모르는 방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냉랭함… 같은?
“저는, 먼저 들어가 있을까요?”
막심은 불경하게도 나를 방패막이로 쓰는 양 내 뒤에서 어정거렸다.
마치 알렉스 같은 게, 적응 잘했는데…?
나는 그에게 핀잔주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루시페우스에게 말했다.
“으응, 좋은 아침이야. 경이 여긴 어쩐 일로?”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걸까? 요즘 그러했듯 훅 들어오는 그의 말에 전처럼 심장이 두근대지 않았다.
“용건은?”
“용건…이 있어야겠죠.”
그의 입매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그가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자니, 막심이 또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두 분 말씀 나누셔야 하니, 그럼 전 심문실에 먼저.”
“경께서도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루시페우스가 대번에 막심의 말을 잘랐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울린 목소리가 너무도 쌀쌀맞아 화가 난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저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막심의 고개가 기우뚱했다.
알제니아의 파티 때 루시페우스가 저를 질투한 줄로 알고 있는 막심은 꽤나 그를 어렵게 여겼다.
‘물론,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마음에 담은 적 없다고 했으니 그건….’
높은 확률로 막심이 옳게 본 거겠지만….
하지만 이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그 상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막심 경은 왜?”
“이 시간에 막심 블라우베르 경을 대동하여 수선화궁에 걸음 하신 걸 보면, 서대륙에서 수학한 그에게 마검사 심문을 지시하시려는 모양이죠.”
바로 옆에 있는 막심을 언급하는 그의 말소리는 퍽 딱딱하였다.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하듯….
한편으로 그의 단언에 나는 티는 못 내도 퍽 놀랐다.
막심이 서대륙에 다녀온 것도 알고, 그를 지금 왜 수선화궁에 데려가고 있는지도 알고….
“엿들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심은 것도 아닙니다.”
…놀란 티가 난 모양이네.
루시페우스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저도 전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한껏 냉랭했던 낯에 깃드는 온화하고도 희미한 미소.
…윽, 뭔데, 이거?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엔 면역이 되었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가깝게, 얼굴 쓰면서….
붉어진 낯은 아닌 척도 못 하는데….
“아, 암조 보안 좀 확인해야겠네.”
듣고 있니, 그림자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고개만 홱 돌릴 따름이었다.
“전하의 기사들이 제게 말을 흘린 건 아닙니다. 그저 막심 블라우베르 경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한 것뿐이지요.”
“그, 영광일세. 나에 대해 다 생각해주고.”
넉살도 좋은 막심의 말소리에,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막심을 흘끗 스쳤다. 여전히 서느런 눈빛에는 호의 비슷한 것도 없었다.
살벌해라…. 내게 무르게 굴어서 잊고 있었지만 괜히 원작 흑막이 아니었다.
“그럼 막심 경이 바쁜 것도 알겠네.”
“그렇죠….”
내가 빨리 말하고 가라는 듯이 말하자, 루시페우스가 시선을 떨구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어젯밤 힐베르크 후작저에 침입자가 들었습니다.”
“…그걸 경이 어떻게 알았고?”
“전하께서 돌보시는 가문들의 저택에 제가 작은 마법을 걸어 놓았습니다. 렌틸 자작저나, 힐베르크 후작저 같은.”
“…저번에 렌틸 자작저에 경비 결계를 치고 갔다는 건 들었어. 힐베르크 후작저에도 그랬던 줄은 몰랐네.”
“그쪽을 아우렌바흐 소공작이 추천한 기사 몇이 지키고 있기야 하던데. 소공작보다야 제가 더 쓸모 있어 보이고 싶어서 말이지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즐거운 듯 울렸다.
레오폴트가 아우렌바흐 기사단 한 소대를 힐베르크에 임대해 주었지만, 그들이 저처럼 침입자를 감지하지 못했음을 언급하는 거였다.
‘그런데 번번이 연적이라고 한 것도 그렇고, 지금도….’
레오폴트를 계속 견제하는 것 같은데.
게다가 그가 힐베르크에 호의를 베푼다면, 나는 생각이 한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가 아니라고 해도, 관성 같은 거랄까…?’
내 눈매가 가늘어지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 레이디는 결코 여기에 아무런 지분이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부인에 나는 조금 멋쩍어졌다.
“…그런 생각 안 했어.”
“아니시라면 다행이고요.”
그가 빙긋 웃었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온 건 아닐 테고.”
“그 침입자는 전하의 기사에게 인계했습니다.”
“내 기사?”
“회색 포니테일의 기사 말입니다.”
또 엘런?
‘지난번에도 그렇고…. 세르니타 때도 그렇고.’
그의 도움을 자주 받다 보니 엘런과 퍽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결국 그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 변할지 모를 그의 마음에 기대어, 자꾸만 호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건 내 손으로, 내 계획에 따라 이뤄져야 안심할 수 있는데.
‘자꾸 고마운 일이 생기면, 더 미안해지는데….’
내가 입을 열지 않자, 루시페우스가 알아서 설명을 이었다.
“제 형님의 지인…이 성상을 훔치려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을, 결계를 통해 알게 된 거고?”
“아무리 제가 천둥벌거숭이 막내아들이라지만, 정보가 샌 티를 계속 내면 안 되는 것쯤은 아니까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조금, 소년처럼 빛났다.
늘 단정한 무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서 그런 생동감이 느껴지는 건 번번이 간지럽달까….
“자세한 건 그 기사에게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이걸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서 기다린 거고요.”
“기다렸다고?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한 번은 출근하실 테니까요.”
그가 슬며시 웃으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의 낯이 멀어짐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내심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쉽다니, 대체 왜?
“그럼, 바쁘신데 이만.”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묵례해 보인 그는, 싸늘한 눈동자로 막심을 일별하고는.
“잠시라도 뵈어서 좋았습니다.”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그 단호한 뒷모습이 서운하게 느껴져, 마음속에 깃들었던 당황스러움은 자괴감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나만 하자, 세실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