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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27화 (127/220)

127화. 석연치 않은 설렘 (9)

‘어떻게 된 거지?’

창밖을 살펴보니 기사들은 태연한 기색으로 마구를 정비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조금도 놀랍지 않은 것처럼.

다시 출발하기 위해 채비하는지, 마부가 놀란 말들을 어르는 소리도 났다.

‘뭔지 몰라도, 잘된 건가…?’

딱히 보고가 없는 걸 보면 기사들이 어떻게 잘 처리했나? 신성력으로 됐을 것 같진 않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가에서 몸을 뗐을 때였다.

“장마철에 마차로 움직이시다니요.”

“꺅.”

갑작스레 곁에서 울린 말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한편으로는 그 목소리가… 이 모든 기이한 상황을 납득하게 했기에,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루시페우스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저와 움직이셨으면 안전하셨을 텐데요. 생각보다 제 쓸모가 꽤 많은데….”

그는 아쉽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전하께선 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

루시페우스와 마주한 것은 그가 온실을 떠난 이후, 거의 열흘 만이었다.

그간 내가 프리지어궁에서 두문불출한 데다, 기다리라 말한 것을 퍽 충실히 지키는지 그로부터 연락도 방문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러라고 했지만 진짜로 그러니까 역시….’

그의 마음이 거기까지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마치 원작의 억지력을 시험한답시고 케인과 엘런에게 충성을 확인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했고, 오랜만에 그를 만난 오늘은… 반갑다는 마음이 들고 말아, 또다시 나에게 실망했다.

나는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며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간 잘 지내셨지요.”

밖에서 마법을 쓰느라 비에 젖었는지, 그가 입은 로브엔 물기가 한가득했다.

그 끝자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아, 이건.”

마법을 썼는지, 순식간에 로브가 말랐다. 눅눅했던 내부의 공기도 산뜻해진 느낌이었다.

“마차를 더럽힐 뻔했네요.”

재빨리 덧붙는 말소리. 그러니까, 그는 숫제 변명하고 있었다.

태연하게 마차에 들어앉았으면서, 내 심기를 거슬렀을까 걱정하기라도 하는지….

별것도 아닌 것으로 그가 약하게 구는 게 언짢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들어놓고 대답을 미루고 있는 나 때문임이 자명했고.

적어도 올해에는, 그에게 내어줄 답에 대해 생각조차 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더는, 내가 계산한 것 이상의 불확실성을 만들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왜….

‘그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만 달라고, 신뢰해 달라고만 했지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에게 너무도 많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무른 마음으로는 그의 쓸모를 가늠하여 필요한 것만을 취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올해에는.

‘모든 게 다 무사히 마친 걸 확인할 때까지는.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그의 무표정 너머에 내 작은 말소리 하나에조차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기색이 비쳤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걸 확인할 때까지는….’

그리고 입가에 밴 미소는, 왜인지 모르게 어딘가 아픈 것 같아서….

“죄, 죄송합, 니다. 제가. 제가 잘못….”

“경?”

“다치시게, 제가. 제가, 잘못해서. 아프시죠.”

저 강한 이의 아픔을 생각하자면, 세르니타에서의 일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꽤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감정의 동요 때문에 그의 이상 증세가 나타났을 거라는 레베카의 진단까지….

‘그러니까, 나 때문에….’

그의 아픔을 보는 건, 어린 시절로도 충분했는데. 내가 별수 없이 못 본 체했던 그때의 일로 충분한데.

나는 무릎 위에 모아둔 주먹을 꼭 쥐었다.

내 작은 기척에도 민감한 그의 눈동자가 내 손을 스쳤다. 그것이 쑥스러운 한편으로 그가 미안해할 것을 알아 나는 손을 가리듯 양손을 맞잡았다.

‘피차 서로를 불안정하게 만들 뿐인 관계야.’

서로를 위해, 당분간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게 맞는 건데.

그렇게 미뤄둬도 되는 걸까…. 생각이 거기에 가닿고 나니 드는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이게 무슨 무례야, 경?”

그 미안함은, 엉뚱하게도 짜증이 되어 그를 향했다.

한데 루시페우스는 그쯤은 예상한 듯 곧바로 용서를 구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놀란 것도 놀란 건데.”

내가 얼굴을 굳히며, 방어적인 말들을 쏟아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이랴!

바깥에서 마부의 구령 소리가 울리더니 마차가 천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얘들이, 나한테 말도 없이 출발해? 내가 괜찮은지는 확인도 안 하고?

나는 당황한 마음에 애먼 기사들을 속으로 질책하며 창가에 달라붙었다.

“그게, 전하의 기사들이 인사도 드릴 겸, 전하 곁을 지켜달라 떠밀기에.”

“뭐어?”

좌 엘런 우 페터, 이것들을…. 나는 마차 뒤에서 말을 달리고 있을 기사들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세르니타에서부터 어느새 암조 기사들이 그를 퍽 신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다그닥다그닥, 한참 동안 말발굽 소리만 마차 안을 울렸다. 그의 결계가 계속하여 마차를 따라 움직이는지, 마차 근처에는 줄곧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마차가 출발하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진창에 빠진 마차를 빼내고 비가 떨어지지 않도록 결계를 치는 건, 아무래도 마법이 효율적이니까요.”

“아니, 경이 어째서 이런 데 있냐고.”

“저도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은 아니었지만, 거짓말임이 빤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씀드리기엔 제가 생각해도 제가 신실하지 못하군요.”

태연하게 거짓말을 입에 올린 것치고, 루시페우스는 곧바로 이실직고했다.

그게 조금 귀엽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올까 봐 입술을 꼭 다물었을 때였다.

“…이러면 전하를 뵐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이렇게 훅?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그 두근거림을 모른 체하며, 부러 냉랭하게 말했다.

“내 뒤를 밟기라도 한 거야?”

“그건….”

루시페우스는 말하기가 곤란한 듯, 무릎 위에 깍지 껴둔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시작은, 힐베르크 후작이었습니다.”

“후작?”

절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번에 그가 제 쓸모를 주장하며 힐베르크와 관련된 귀족파의 꿍꿍이를 순순히 다 읊어주어서, 더 이상 그 일에 가담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런 건가. 기다리다 못해 다시 그쪽으로 마음을 돌렸나.’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뭐, 마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거니까….

익숙한 체념에, 입 안이 쌉싸래해졌다.

‘고민할 필요 없었네.’

내 낯이 조금 가라앉은 걸 눈치챘는지, 루시페우스가 다급히 덧붙였다.

“오해하실 법하게 말씀드렸군요. 힐베르크 후작을 추적한 건 제가 아닙니다.”

그가 다급한 듯, 내 쪽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짐작하시겠지만 힐베르크 쪽에 감시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그중에는 제 형님…의 지인들도 속해 있고요.”

“소후작의 지인이라면 그때 그.”

“…네. 마검사들이 은신한 채 후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중입니다.”

“그럼 오늘도?”

“따라붙기는 했지만, 산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후작이 전하를 만난 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고요.”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조금 비틀려 올라갔다. 길을 잃었다는 게, 정말로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그가 무슨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또 그의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마검사라면…. 며칠 전에도 렌틸 자작저에 침입한 마검사들을 그가 제압해 줬다고 했는데.’

리나가 렌틸 자작저에서 체포해온 이인조는 수선화궁의 특별 유치장에 구금해 두었다. 관절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게, 말로만 듣던 윌로우 게이블스의 증상과 똑같았다.

“이야아, 역시 실력자라니까요. 그러게, 제가 그랬잖습니까? 그…분께서 저희 편이 돼주시면 정말 든든할 거라고요.”

“일거리 줄어서 좋을 거라면서? 일 덜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며?”

“일거리가 준다는 건 그만큼 일이 효율적으로 잘 굴러간단 소리 아니겠습니까.”

그 일을 보고하며 밉살스레 장난치던 리나의 목소리….

언제부턴가 암조 애들도, 그를 두고서 ‘그분’이라며 존칭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내 속도 모르고.’

나는 불만스레 낯을 굳혔다.

내 표정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루시페우스는 재차 말을 이었다.

“전하를 따라다녔다거나, 위치를 마법으로 추적했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알아.”

“역시,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게 없으시죠.”

그 말이 너무도 다정스레 울려, 나는 하마터면 입술을 빼죽 내밀 뻔했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 마검사들이 은신 마법을 쓴다고?”

“네. 본대륙의 마법과 마나의 흐름이 달라서 전하의 기사들이 추적하기는 다소 어려울 겁니다.”

루시페우스의 마법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그런 그만이, 누구보다 방대한 마력을 지닌 그만이 서대륙의 마법을 읽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산길은 사연을 지어내기 좋은 공간이니, 따라잡기만 했다면 분명 암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물론 거꾸로 그들이 당했지만….”

“당했다는 건.”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마검사들을 묶어둔 곳에 포니테일의 기사가 휘하의 기사 둘을 보냈습니다.”

…엘런, 얘가? 보고도 없이?

물론 그 정도는 엘런의 권한이었지만, 그녀가 루시페우스와 신뢰를 쌓았다는 사실이 다시금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그들 대신, 제가 전하를 지키러 온 거고요.”

“…경도 알잖아. 나는 늘 과하리만치 많은 호위를 몰고 다니는걸.”

“물론 그러시겠지만….”

제 무릎 위에 깍지껴 두었던 루시페우스의 손이 작게 오므라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여러모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처음 내게 손을 잡아보길 청하던 그때처럼….

나는 씁쓸한 마음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 뻔한 것을, 그의 다정한 손길이 다가올세라 재빨리 말아 넣은 거였다.

“전하의 기사들과 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예를 익혔으니 말입니다.”

어떻게든 제 쓸모를 피력하는 루시페우스가, 나는 너무도 어색했다.

세계관 최강자인 그라면 암조 모두가 달려든대도 이길 것이 뻔한데.

그 남자가, 제 실력을 한껏 겸손하게 표현하며 내게 저를 써먹으라 간청하고 있다.

그것이 심장 끝을 간지럽혔고, 한편으로는 무거운 죄책감이 되어 명치에 꾸욱 눌러앉았다.

하여, 나는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힐베르크 후작이 오늘 나를 만날 줄 알았어?”

“아뇨.”

“그럼 그냥 마검사들을 쫓은 거야?”

“어쨌든, 전하께서는 힐베르크 후작을 중요하게 쓰시려는 것 아닙니까.”

그건, 마치 내 장기 말을 보호해 주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아니, 정말 그렇겠지….’

그 생각이 너무도 심란하여,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가 경이 연모하던 레이디의 부친이라 그런 건 아니고?”

“제가 너무 오래 오해하시도록 두었으니, 믿지 못하신대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일순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을까. 그가 무릎에 팔꿈치를 괴어 상체를 기울이자, 그는 여느 때처럼 나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전하께서는 뭐든 다 아시면서.”

기실 오늘 그의 낯에서는 미소가 한시도 가시지 않았다. 그것이 씁쓸함을 띠었든, 그저 온화하게만 빛나든.

나는 눈동자만 내리깔아 그의 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했던 것뿐임은 어째서 몰라주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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