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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26화 (126/220)

126화. 석연치 않은 설렘 (8)

리나는 재빨리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사냥 대회 때 알비누스의 둘째가 대놓고 마법을 쓰며 전하를 도왔다던데.’

아니면 오늘의 밤손님이 그때 달려들었다는 그 형 되시는 양반인가? 아니면 마검사?

리나의 머릿속이 상황에 대한 추론으로 와글와글 끓어 넘쳤다.

현관 바로 앞 계단에 착지하자, 정원 담당인 그녀의 세 동료가 어느새 현관 앞에 모여 있었다.

저마다 무기를 빼 든 그들이 향한 곳에는….

털썩.

검은색으로 온몸을 꼼꼼히 감싼 사내 둘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로브 차림의 남자.

후드를 푹 눌러써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리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오랜만입니다, 경?”

“또 보는군요.”

남자가 검은색 장갑을 낀 손으로 후드를 걷어 내렸다. 그의 안경이 어둑한 정원에서 유일하게 반짝였다.

그가 마법을 썼는지, 이내 그들의 머리 위로는 더 이상 비가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빗소리가 먼 곳에서 아스라이 울렸다.

“길을 잃으셨나요? 여기까진 어쩐 일이실까?”

말은 그리해도 리나는 사정을 대강 짐작했다. 입 안으로 웃음을 삼키며 리나는 너스레를 이어갔다.

“전하께서 이곳에 행차하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프랑 자작가의 저택에서 대적하던 그때의 미소와 비슷했다.

“제 형님께서 전하의 은사님께 무례를 저지르려는 것 같아 단속하러 왔습니다.”

“아, 그러면.”

“처분은 경들께서 알아서 하시면 되겠죠. 한 열흘 정도는 운신하지 못할 겁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루시페우스의 발치로 향했다. 거기 쓰러져 꼼짝도 못 한 채 신음만 흘리는 두 사내가 알비누스에서 보낸 살수라는 소리였다.

“제 형님께 신묘한 인연이 많은지라, 이런 궂은날에는 경들도 깜빡 놓치시지 않을까 싶어 제가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마검사라는 건가요?”

“은신 마법을 쓰더군요. 마법으로 발소리도 죽이고.”

기사들의 낯이 거무죽죽해졌다. 리나 말고는 그들의 침입을 감지한 이가 없었던 데다, 리나도 까딱했다간 그들이 렌틸 자작의 집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처단하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번번이 빚을 집니다요.”

“뭐, 피차 같은 분을 지키는 처지에요.”

그 말소리가 너무 태연하게 울렸다.

뭐야, 전하를 지킨다고? 어떻게 된 거래? 리나 뒤편의 기사들이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분이 마음 확인했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지.’

아, 역시. 사냥 대회에 따라갔어야 했는데.

리나는 히쭉 웃었다.

“그럼 이 빚, 딱히 갚을 필요도 없는 거죠?”

“경의 주군께 잘 말씀해 주시는 정도면 좋겠군요.”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가 난처한 듯 웃었다.

리나도 덩달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 아직은 아닌가?

힐베르크 후작이 섭외한 곳은 대신전의 작은 예배당이었다.

황실의 일원이 다녀가기에도, 전직 신관이 다녀가기에도 어색하지 않은 곳.

‘아멜리 찾자마자 복권하려고 노력하는 데서도 봤지만, 판을 잘 읽는 인물이란 말이지.’

원작에서 힐베르크 후작은 황실파와 귀족파 간의 갈등에서 일종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으니, 정말로 그다웠다.

아멜리를 위해 황실파에 합류함으로써, 원로원의 여론을 반전시킨 그.

‘원작에서 그가 전면에 등장하는 건 가을의 일이었지. 그러니 아멜리가 납치당하는 것도 힐베르크 후작 때문이 아니었고.’

원작에서 아멜리의 납치는 루시페우스가 그녀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그 이면에 귀족파의 음모가 있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몰랐던 사실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어.’

이렇게 자꾸만 원작에 없었던 일들이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내가 다른 데 신경을 쓰겠는가.

‘다른 데….’

자꾸만 마음이 가닿곤 하는, 그 ‘다른 데’를 떠올리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제 심장이 깨물린 듯한 낯을 짓는 그가 또 떠올랐다.

“…미치겠네.”

나는 숫제 한숨을 쉬며 주르륵 몸을 미끄러뜨렸다.

대신전으로 향하는 마차 안. 공식 행차로 꾸민 덕에 호위들이 마차를 같이 타지 않아, 나는 마음껏 몸을 놀렸다.

반쯤 누우니 턱 바로 아래서 심장이 뛰었다.

‘이게 정말, 나 하나만 좋자고 하는 일은 아니란 말이야….’

나는 기실 원작을 바꾸기 위해 많은 일을 해왔지만, 그건 모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들이었다.

반면 루시페우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알비누스를 배신하는 것은… 이 세계를 둘러싼 근본 설정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었다.

그 근본적인 변화가 불러일으킬 나비 효과가 나는 두려웠다.

그리고 그로 인해 틀어지고 말 미래에 대해… 언제부턴가 나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죽고 마는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멜리를 좋아한 적 없다고 말하는 그가, 죽음만은 그의 운명대로 맞이하게 될까 봐.

신성력과 마력이 폭주하여 고통스러운 와중에 내게 무언가를 사죄하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내 상념을 가르고 마차가 대신전에 들어섰다.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 하나가 마차에서 내린 나를 안내했다. 차림새로 보아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 고위 신관인 게, 힐베르크 후작이 신관이던 시절의 인맥인 듯했다.

‘보안에 신경을 썼다는 증거겠지.’

나는 후작의 철저함에 큰 점수를 주었다.

신관이 안내한 곳은 주거 구역의 작은 예배당이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힐베르크의 가주, 에이든입니다.”

“오랜만이야, 공. 저번 연회 때 이후로 처음이네.”

“전하께서 아멜리를 아껴 주신다는 말을 듣고 감사하던 차인데, 직접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전하.”

“응, 영애도 고생 많았어.”

간단히 인사치레를 마치고서, 우리는 예배당 가운데에 있는 작은 상 앞에 둘러앉았다. 사제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해서인지 실내는 좌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공이 환속한 게 벌써 10년도 더 됐는데, 여전히 대신전에 인맥이 있나 봐?”

“어머니께서 특별한 분이신 덕에 제가 교단의 총애를 받긴 했지요.”

후작의 말소리가 농담조로 울렸다. 첫 대화에 농담 섞고, 사람이 꽤 누긋했다.

‘이렇게 융통성 있는 인물이니까 판세도 잘 읽는 거겠고.’

나는 웃는 낯 너머로 그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가 여주인공의 아버지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를 신뢰하고 있었지만.

“영애에게서 들었겠지만, 좀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어떤 선물이길래 밖에서 보자고 하셨는지, 궁금하던 차입니다.”

아멜리에게 물려준 것과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기민하게 빛났다.

힐베르크 후작은 나를 잘 몰랐다. 실상 귀족들 중에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그가 아는 거라곤 내가 황제의 늦둥이 막내딸이라는 것,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황태자의 정권에서 일할 사람이라는 것, 레오폴트의 친우로서 아멜리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 딱 그 정도….

윌로우 놈의 일로 게이블스 후작을 골탕 먹일 때 만들어둔 어리숙한 이미지가 워낙에 유명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오늘은 신뢰감 넘치는 모습만 보여야지.

나는 빙긋 웃으며 문가를 향해 손짓했다. 엘런이 내내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것…입니까?”

후작이 당황한 낯을 띠었다. 그도 그럴 게, 이르겐트의 경매장에서 받아온 것 그대로인 상자가 황녀의 하사품을 담았다기엔 꽤 투박했던 것이다.

“열어 봐도 좋아.”

후작은 상자를 제 쪽으로 가져와 조심스레 그 걸쇠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눈에 담자….

“아니, 이건….”

그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걸 어떻게….”

그가 떨리는 손으로 그 안에 있던 것, 성상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이건. 이, 이건….”

후작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시울이 숫제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마음껏 감격에 젖도록 내버려 두었다.

후작은 그 성상을 쓰다듬고, 이리저리 돌려 보며 바스러지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시울은 건조했으나 그가 울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재빨리 성상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거기에 빛무리가 어리는 게, 신성력을 쓰는 듯했다.

“…어머님의 신성력이 맞는군요.”

성상에 얽힌 사연을 모르는 아멜리는 눈동자만 굴려 나와 후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쩌다 생겼는데, 나보단 공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전하.”

후작은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만 쓸어내렸다. 거기 닦이는 것은 지난 20년의 회한일 거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화목했던 가족, 갑작스레 그의 곁을 떠난 부모님, 형, 친척….

행복한 유년 시절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홀로 남아 무너져가는 가문을 그저 관망해야 했을 그의 세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 내 아버지의 신하를 위한 일을 한 것뿐인데.”

내가 그리 말했지만, 후작은 분명 이유가 따로 있으리라 확신할 거였다.

그가 아는 몇 가지 정보를 머릿속에서 열심히 짜 맞추면서.

내가 아우렌바흐 소공작과 오랜 친분을 맺고 있다거나, 돌아온 게이블스의 옛 영애에게 사사했다는 것, 게이블스 소후작과의 악연이 있다는 것….

애초에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나는 흔쾌히 정답의 실마리를 주었다.

“레이디 아멜리가 내게 좋은 벗이 되어주었어. 그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도록, 얼른 다시 일어나줘. 원로원 하반기 의회도 곧 열릴 거니까.”

힐베르크의 모든 권리를 되찾고, 원로원에서 황실에 이로운 방향으로 움직여주는 것.

내 여주인공에게 현실 감각을 물려준 아버지답게, 후작은 내 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대신전에서의 체류는 길지 않았다.

방문 목적으로 꾸며두었던 기부금을 내고 기도실에 잠시 머무른 뒤, 나는 곧바로 신전을 나섰다.

요 며칠 이어지는 장마에, 빗줄기가 굵어질세라 지체할 수 없었다.

대신전이 황성의 동북부를 감싸고 있는 생장크트산 높은 곳에 위치한 덕에 꽤 오랜 시간 산길을 따라 내려가야 했다.

덜컹덜컹, 험한 산지의 요철을 따라 내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힐베르크 후작도 넘어왔고. 원로원 하반기 의회 때부터 렌틸 자작이 활약하면 게이블스 후계 싸움도 본격화할 테고. 이제 남은 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

루시페우스가 제 쓸모를 과시한 걸 생각하면, 올해 귀족파의 가장 거대한 계획인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마저 그만둘 수도 있는 거였다.

‘그게 나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만둘 수도 있는 거라면, 그 마음이 사그라들면 다시 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닐까…?’

실제로 귀족파에서 수정을 사들이는 추이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여는 술식을 준비한다고도 볼 수 있었다.

‘온실에서 그 일도 확인해 뒀어야 했는데. 갑자기 그런 얘기로 흘러가서 그만.’

이렇게 연애 감정이 해로운 거였다. 제국을 비탄에 빠뜨릴 사건을 잊게 하다니.

어쨌든, 그러니까 한 번은 더 만나야 하는데.

만나면…. 뭐, 어떻게 해야 하지?

‘시간을 달라고 말하기야 했지만.’

그건 사실, 완곡한 회피였다.

그의 마음에 대해서도, 내 마음에 대해서도 나는 직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게 일단락될 때까지,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의 운명도 여기에 걸려 있으니까….’

하아, 거친 산길에 멀미가 날 것 같아, 나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꽤 커진다 싶었을 때.

덜컹!

큰 소리가 나더니 마차가 크게 휘청였다.

뭐지?

“마차 바퀴가 빠졌습니다!”

엘런이 창문 너머에서 소리쳤다. 빗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그녀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올 땐 괜찮았는데. 그새 비가 와서 길이 엉망이 됐구나.’

어쩐지, 몸이 한쪽으로 기운 느낌이더라니.

‘빗속에서 마차 바퀴 빼자면 꽤 고생이겠는데.’

땅이 질어 발이며 바퀴가 푹푹 빠질 테고, 시야도 확보되지 않아 곤란할 거였다. 게다가 말들도 놀랐을 테니 달래야 하고.

‘그런 건 신성력의 영역이 아니니까.’

꽤 오래 갇혀 있어야겠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두둥실, 갑자기 마차가 떠오르는 느낌이 나더니, 기울었던 몸이 중심을 찾았다.

마차가 진창에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바깥을 살피는데, 억수로 쏟아붓던 빗줄기도 어느새 뚝 멎어 있었다.

아니, 빗줄기가 멎은 게 아니라, 여기만 누가 비를 막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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