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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25화 (125/220)

125화. 석연치 않은 설렘 (7)

“게다가 밀리 말로는 알비누스 영식이 전하께 큰 도움을 드렸다면서요? 많이 걱정한 것 같았다던데요….”

그리 말하는 레오폴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아멜리 앞이라 종소리 타령을 못 한다뿐이지, 나를 놀릴 거리가 생겨 신난 모양이었다.

“아니, 그 도움이야….”

습관적으로 부정하려다가, 내 시선이 아멜리에게로 향했다.

해사하게 빛나는 그녀의 낯이, 머릿속에선 이미 나와 루시페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소설 한 편을 뚝딱 만든 듯했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내 마음은….

‘으, 창피해.’

루시페우스의 마음을 두고서 그녀를 질투한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연애 감정, 진짜 최악이야. 사람 바보 만드는 거 순식간이고….’

그가 아멜리를 좋아한다고 확신했던 것은 기실,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그러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스스로 그렇다고 말했으니까.

후자의 경우, 지금 생각해보면….

“아, 그렇군요. 제가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하는군요.”

알제니아 정원에서의 가든파티 날. 원작에서와 달리 미련 없이 아멜리를 떠난 그는 그때도 내게 먼저 다가왔었다.

하지만 내 오해에 맞춰준 거였을까. 루시페우스는 아멜리를 두고 제가 연모하는 여인이라 언급하고, 레오폴트를 질투하는 척했다.

그걸 떼놓고 보면 아멜리에 대한 그의 행동거지는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

‘아멜리 호위로 따라다녔던 리나도 계속 이상하다고 했고, 내가 보기에도….’

아멜리와 레오폴트가 빨리 이어진 탓에 그의 마음이 깊어지지 않았나 보다 생각하고 만 것이었는데.

며칠 전, 그는 결국.

‘단 한 번도 눈길이 간 적 없다고 했지….’

못 믿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확인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니까.

“평생을 통틀어 제가 연모해온 이는 레이디 작은 별, 당신뿐입니다.”

그의 고백을 처음 들었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래도 되나, 하는 것이었다.

그걸 듣는 마음은 기묘하리만치 차분했다. 세르니타에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속절없이 두근거렸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에서 그친 게 잘된 일이야.’

그의 말에 전생에서처럼 가슴 벅찼더라면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금 실망하고 말았을 거였다.

그를 마음에 담았다는 이유로 요 얼마간 어찌나 크게 동요했던가. 곧 흘려보낼 마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생각만큼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언제든 바뀔지 모를, 얄팍한 것.’

내가 이대로 흘려보내기를, 이러다 말기를 기대하던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일 거였다.

‘지금이야 내가 좋을 수 있지. 세실리아의 미모는 누구나 반할 만하니까.’

처음에야 다 그럴 수 있다. 전생에 나를 저버리고 말았던 이들도 처음에는 날 사랑했다.

사람의 마음은 그리도 쉽게 변하고, 연애 감정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 연약한 것에 눈멀어, 내 평생의 목표를 저버리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가 아멜리를 좋아하지 않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마음을 계속 키워 나갔을까?

아니.

그랬더라도, 나는 혼자 좋아하다가 마는 편을 택했을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펐던 거지, 그와 이어지지 못할 거라 슬펐던 건 아니야….’

게다가 거기엔 나만 아는 자책감도 있으니….

그리 생각하다 보니 침울해질세라, 나는 아멜리와 레오폴트를 향해 최선을 다해 방긋 웃었다.

“그날 별채에서 있었던 소동 있잖아? 그게 우리 작전 때문에 일어난 일이거든. 거기에 루시페우스 경도 휘말려서 말이야.”

“억, 그 별채가 반파된 거요?”

“어머, 음성 서신을 보낸 자들이….”

깜짝 놀란 아멜리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레오폴트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신에 별채로 오라는 말이 쓰여 있었지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해, 별채의 사건과 제가 받은 음성 서신을 연관 짓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얗게 질린 아멜리의 낯에 나는 작은 만족감을 느꼈다.

이 일로 놀랐으니, 오늘은 더 이상 루시페우스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지.

“그들이 실수로 숲에 있던 마수들을 건드린 모양이야. 마수들이 날뛰었는데, 루시페우스 경이 귀족파여서 어떤 마수들이 풀렸는지 아니 도움이 됐지.”

‘마수’의 자리에 도미닉과 마검사들을 대입하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왜 하필 제게 편지를 보냈을까요…?”

“그러게. 안 그래도 영애한테 물어보고 싶었어. 혹시 어디 원한 살 만한 일이 있었어?”

귀족파가 아멜리를 노린 이유는 루시페우스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 나는 능청스레 물었다.

“안 그래도 요즘 후작님께서 기사단 인원을 확충해야겠다고 하셨어요.”

“후작이?”

친부인 힐베르크 후작을 아버지라 칭하기엔 아직 어색한 모양이었다.

“네…. 저도 들어왔으니 사용인을 늘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시기야 하시는데.”

아멜리의 낯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귀족파에서 그렇게 무너뜨리길 바랐다면, 후작이 복권하기 전에 그를 처리하고 싶겠지.’

후작저에도 꽤 날파리가 많이 꼬이는 모양이었다. 렌틸 자작의 타운하우스가 그러하듯이.

“후작저 생활은 어때?”

“좋아요. 후작님께서도 잘해주시고, 사용인들도 정중하고요.”

“아무래도 후작 혼자 오래 살던 집이라, 좀 불편하지?”

“그래도 황성의 타운하우스인데, 노르타 산맥 자락에서 올라온 제게는 과분하죠.”

아멜리가 해사하게 웃었다. 예의 바르고, 낙천적이고.

‘정말 성격 미인이야, 내 여주.’

…그럴수록 요 얼마간 그녀에게 가졌던 못난 감정에,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이었지만.

그 미안함을 담아, 나는 그녀에 대한 호감을 한가득 채운 낯을 지었다.

“영애. 내가 이사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데.”

“선물요?”

아멜리의 푸른 눈동자가 땡그래졌다. 내가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려는 기색에, 곁에 있던 레오폴트가 헤실헤실 웃었다.

너 때문 아니거든…?

‘네가 원작에서였으면, 어? 지금 한창 혼자 피폐물 찍고 있을 땐데.’

제가 사냥터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아멜리가 마수에 당할 뻔한 데다 납치까지 당하자, 원작 레오폴트는 태양제 직후 눈이 뒤집혀서 황성을 헤집고 다녔다.

지금은 여전히 저렇게 해맑으니, 그래, 내가 잘한 거겠지….

“이사 선물은 저도 아직인데. 저도 얼른 고민해 봐야겠어요.”

“경은 뭐, 아우렌바흐의 기사를 몇 임대해주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사랑을 가문으로 하는 거냐던 그답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말을 했던 것치고, 가문을 사랑에 이용하는 조언을 냉큼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영애를 불러내려던 자들은 다 마수에 당해서,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내지 못했어.”

물론 루시페우스가 원래 작전에 참가하려던 이들의 신상을 알려준 차였다.

‘게이블스, 세르니타, 앙블렌, 오겐, 프렘린의 사용인들이라고 했지. 모두 귀족파에서 힘깨나 쓴다는 가문들….’

그들이 원래 작전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아멜리 대신 나타난 걸 안 루시페우스가 그들을 검은 숲으로 보냈다고 했다.

괜히 어깃장을 놓아 내게 피해를 입힐까 봐서.

다행히 그들은 모두 멀쩡히 살아서 제 주인들에게로 복귀했다. 그들이 작전에서 빠진 이유를 두고 마수가 날뛰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대게끔 루시페우스가 세뇌해둔 덕에, 별채가 부서진 일에 대한 변명이 잘 먹혀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목적도 아직 모르니까….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맞아요. 밀리, 내가 바로 가서 기사단장하고 이야기를 해볼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대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걸요.”

얼씨구, 또, 또.

레오폴트는 오늘도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아멜리 쪽을 향하여 완전히 돌아앉고서 그렇게 말했다.

‘…얘 또, 저번에 공작 부인한테서 의상실 예약 새치기한 것처럼 경솔하게 굴라.’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의 친딸인 게 벌써 밝혀졌으니 그녀에 대한 아우렌바흐의 여론은 퍽 온건할 것이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레오폴트 경.”

“네?”

“힐베르크 공이 지난 대 성녀의 아들인 건 기억하지?”

“…당연하죠?”

“그 가문이 황실파에 갖는 의미가 뭘까?”

“황실파에 편입된다면 교단의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아.”

문재(文才) 또한 뛰어난 설정의 남주인공답게, 레오폴트는 내 의도를 곧바로 파악한 듯했다.

혼자서도 여기까지 짐작하면 참 좋을 텐데. 손도 많이 가지, 우리 남주.

“공작에게 꼭 그렇게 얘기해야 해? 영애 지켜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굴지 말고?”

“제, 제가 앤가요…!”

그리 바락거리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공작 집무실에 찾아가 제 연인을 위해 기사들을 쓰게 해달라고 간원한 모양이었다.

나는 내 남동생 같은 친우에 대한 비웃음을 대놓고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우리가 대화하는 양을 지켜보던 아멜리가 말했다.

“감사해요, 전하.”

“별말을 다. 이런 애를 거둬준 영애에게 내가 고맙지.”

“이, 이런 애라뇨…!”

“우리 레오폴트 경께서는 로즈버리 영애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물불 못 가리잖아, 그렇지?”

“헤헤.”

“…칭찬 아닌데.”

“…….”

내가 레오폴트를 톡톡히 놀려먹는 모습에, 아멜리가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영애, 선물 말인데.”

“아, 네, 전하.”

“언제 한번 후작이랑 자리 마련해줘. 황궁은 보는 눈이 좀 많아서 좀 그렇고.”

힐베르크의 지위를 되찾아줄 성상.

원로원 의결권을 늘리겠다는 귀족파의 야망을 부숴줄 성상이 슬슬 힐베르크의 손에 돌아가야 할 때였다.

“어휴, 웬 비가 이렇게.”

번쩍번쩍, 뇌우가 쳤다.

리나는 저택의 덧창을 하나씩 흔들며 꼼꼼히 확인했다.

열흘가량의 짧은 장마가 지나고 나면, 여름도 한풀 꺾일 것이다.

‘그러면 원로원 여름 휴회 기간도 끝나고. 하반기 의회가 시작되면….’

리나는 덧창을 꾹 짚은 채 방 안쪽에 시선을 던졌다. 돋보기안경을 쓴 여인이 육중한 책상 앞에 앉아 서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온종일 책만 읽으시고, 사치품이라곤 전하가 선물해주신 것밖에 없고. 그 화려 번쩍한 게이블스 아가씨의 고모라고 누가 믿겠어?’

리나가 렌틸 자작의 호위를 맡은 지도 벌써 열흘이 다 되었다.

영명하신 주군께서 에스메르 상단을 활용해 매입하신 타운하우스에는, 그간 손님이 많이도 드나들었다.

낮에는 허락받은 손님이, 밤에는 허락을 구하지 않은 손님이.

‘게다가 하필 장마 기간이 돼서.’

고수는 무기며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지만, 밤마다 이토록 거세게 빗줄기가 퍼부으면 곤란했다. 빗줄기며 천둥 번개에 기감이 흐트러져 침입자를 감지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오늘은 퍽 잠잠하오.”

“하핫, 밤손님들도 비는 맞기 싫은가 보지요.”

“경도 앉아서 쉬지, 왜.”

“자작님께서 밤에 인기가 너무 좋으시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네요.”

리나의 너스레에 렌틸 자작이 짧게 웃었다.

리나는 보통 타인을 대함에 스스럼없는 편이었지만, 말도 미소도 박한 제 주군의 스승님은 대하기가 퍽 어려웠다.

‘이렇게 껄끄러우신 건 게이블스 아가씨랑 닮았네….’

리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에 기대설 때였다.

‘뭐지?’

앞마당에 미세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희미한 신성력 반응, 빗소리에 묻혀 어렴풋이 울리는 발소리.

‘이 자식들은 뭘 하는 거야?’

날이 궂은 탓에 2조의 그림자들도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그러시게.”

살수가 왔다는 신호인데도 렌틸 자작의 시선은 읽던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담도 참 세시다고 생각하며, 리나는 재빨리 저택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2층짜리 저택의 지붕에서는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뒷문부터 저택 앞의 소담스러운 정원까지, 저택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리나는 장대비를 맞으며 눈을 감았다.

‘후원에 로니랑 데이브. 정원에 기척이… 여섯? 오늘 정원에 있는 게….’

해나, 재키, 릭…. 오늘 밤 정원 당번인 동료들을 헤아리던 리나가 번뜩, 눈을 떴다.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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