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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24화 (124/220)

124화. 석연치 않은 설렘 (6)

나는 그의 근사한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얘가 이젠 얼굴도 쓰네….

‘아, 아차.’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나는 내 낯이 풀어지지 않기 위해 다시금 다잡아야만 했다.

“쓸 만하냐고?”

“네.”

쓸 만, 너무도 했다.

현재 일어나는 일도 그 소문이 사람들 입을 타지 않으면 수집하기 어려운데, 수십 년 전 일이야 더더욱 그랬다.

‘그 가문들이 로즈버리에서 돈을 뜯어 간 게 40년 전의 일이고, 힐베르크의 보물이 도난당한 게 20년 전이니까…. 어쩌면 그토록 오래전부터 힐베르크를 노렸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런데 그 모든 내력에 대한 정리를 후작의 오른팔인 그의 입으로 듣는 건, 정말이지 일종의 치트키였다.

탐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에 대해서도 묻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

그가 어째서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않고서는 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순한 변덕이면 어떡하지?’

나는 이 세계를 바꾸고 싶은 동시에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는 황실. 나를 전폭적으로 따르는 암조 기사들. 나를 선망하는 귀족 사회.

전생에 받지 못했던 인정과 애정.

무언가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달라진다면, 나는 이 세계가 깨져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빠지고 말 거였다.

내게 다정한 세계가,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소중한 사람 중에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천히 물었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이런 정보를 줄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나는 느릿느릿, 꼭꼭 씹듯이 질문을 재차 뱉었다. 허공에서 나와 그의 시선이 맞닿았다.

진지해진 나의 기색에, 루시페우스 또한 조금 긴장한 듯했다.

“…제게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았다는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리 말하는 그의 낯이 너무도 부드러웠다. 그 눈동자 너머로, 그의 원래 눈 색이 비친다는 착시가 일 정도로 진한 열기가 빛났다.

그가 말하는 ‘중요’가 나를 향해 있음을, 바보가 아니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당황스러워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

나는 그렇기를 바라는 마음 반,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반의 심정으로 물었다.

“그 말은… 혹시 경이 새삼 나를 마음에 담기라도 했다는 거야?”

“네?”

“그래서, 내 곁을 원한다거나?”

루시페우스의 낯에 적잖은 당혹감이 비쳤다.

“그건….”

그래, 당혹감이었다. 내가 그의 마음에 관해 갑작스레 물어서 당황하기도 했겠지만, 그의 낯에 피어오른 건 그 이상의 황망함이었다.

‘뭐야, 이거….’

그리고 명치께에 뻐근하게 피어오른 것은 실망감.

설렘에 떠올랐던 마음이 대번에 진창으로 처박힌 감정의 동요에, 나는 스스로에게도 실망하고 말았다.

나는 내심, 그의 동기가 좀 더 구체적인 것에 있기를 바랐다. 특정한 연유로 후작을 배신하고 싶다거나….

여하간 내가 아닌,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유로.

쉽게 변해버리는 연애 감정 따위가 아니라.

‘그런데 이게 뭐야? 기대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다짐해놓고 기대해 버렸잖아….’

나는 짧게 웃었다. 나와 그, 양쪽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씁쓸함을 담고서.

그 모든 낭패감을 얼버무려, 나는 재빨리 이 화제를 마치는 편을 택했다.

“경의 쓸모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전하, 그게.”

그의 눈빛에 깃든 것이 서운함, 같았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 데 휘둘리면 안 된다.

다른 때도 아니고, 오래간 준비해온 일들이 많은 올해에는 더더욱….

“오늘 알려준 정보는 고마웠어. 이번에 경을 회복해준 값으로 칠게.”

“…….”

“서로의 목숨 한 번씩 구해준 셈 치면 되잖아. 그렇지?”

나는 부러 냉랭한 말소리를 쏟아냈다.

말하는 나 스스로도 할퀴고, 멀거니 듣고 있는 저 남자도 할퀴는 그런 말이었다.

와중에도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아스라한 아픔이 또 안타까웠다.

‘무르게 굴면 안 돼….’

올해가 얼마나 중요한데. 무엇에도 흔들리면 안 되는데.

그가 매번 나를 좇고, 내게 다가오고, 나를 지키고, 내 아픔에 절망하고, 그때마다 번번이 내가 두근거렸던 것쯤은….

‘게다가 올해는, 그의 죽음도 예정돼 있으니까….’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외로움을 알고도 내버려두는 대신에 다짐한 거였으니까….

그때였다.

루시페우스가 양손을 뻗어 유리컵을 그러쥔 내 손을 감싸듯이 쥐었다.

그치고 상당히 거친 손짓이었다.

‘…뜨거워.’

세르니타에서 그가 기절하기 직전에 비하면야 미지근한 수준이었지만.

“제가 감히 드릴 수 있는 말은 없지만…. 한 가지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답잖게, 내 무릎에 매달릴 듯 상체를 기울인 채였다.

양손을 모아 쥐었다는 점에서 그건 마치 간절한 기도와도 같았다.

“지금의 저는. 그 레이디에게 눈길이 간 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레이디? 아멜리?

지금의… 그?

“제가 어찌 감히 곁을 내어주시길 바라겠습니까. 다만, 제 마음의 모양을 표현해야 한다면….”

내 손을 쥔 루시페우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부러 무감한 표정을 띠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루시페우스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턱 끝까지 치민 감정을 눌러 참는 듯….

“평생을 통틀어 제가 연모해온 이는 레이디 작은 별, 당신뿐입니다.”

심장이 뚝 떨어졌다.

“…부디 그걸 알아만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시간을 줘. 경을 신뢰할 수 있는 시간.”

계획에도 없었던 고백에 세실리아가 주문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기다림이라. 그건 제가 잘하는 거였다.

막연한 바람을 안고서 시간을 집어삼키는 거라면, 그가 평생을 해온 일이었다.

세실리아가 제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다면 제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서 다 바치리라.

“혹시 경이 새삼 나를 마음에 담기라도 했어? 내 곁을 원한다거나?”

세실리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루시페우스는 답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세실리아를 ‘새삼’ 마음에 담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에 담거나 담지 않을 수 있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이전의 생을 마음이란 것을 알 기회 없이 마친 그에게 마음의 모양을 그리라 한다면, 세실리아의 상 말고는 다른 걸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세실리아는 그에게 이번 생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위로해준 온기, 그를 특별할 것 없이 대한 작은 별, 그를 한눈에 홀리고 만 막내 황녀는… 그래, 그때까지야 이번 생에 주어진 작은 행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달의 신과의 일을 모두 기억해낸 이상, 그는 세실리아를 빼고는 이번 생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안락한 곳에서, 늘 아름다운 것만 보시도록. 험한 일은 내가, 더러운 일은 내가. 늘 뒤에서….’

그녀가 허락해 준다면, 그녀의 기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곁은… 감히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입술을 훔치려 했던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지고하신 황실의 귀애하는 딸.

저는 후작 부자의 피가 어찌 되었건, 반의반 쪽.

반사회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귀족파의 검은 손.

먼 곳에서, 혹은 뒤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하간 세실리아가 허락하는 곳에서 그녀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거였다.

‘대꾸를 제대로 못 해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리고 말았지만….’

이런 어두침침한 속내를 어찌 들려드릴 수 있을까.

세실리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음을 자책했지만, 거기에 달리 답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내 행복을 위해 달의 신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소리를,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순 없는 일이지.’

루시페우스는 쓰게 웃었다.

말하기 곤란하고, 누가 들어도 과대망상적인 것이 그의 삶이었다.

이런 기괴한 생, 그녀를 위해 쓴다면 좋을 거였다.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는데, 심장이 욱죄고 손끝이 저릿저릿했지만….

루시페우스는 그걸 신성력이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바란 적 없는 세실리아의 옆자리를 포기한 자리에 깃든 아픔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세실리아가 내준 황실의 마차가 알비누스의 후작저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둘째 도련님이라기보다 가신에 가까운 그를 실은 마차가 도착할 때면, 딱히 나와보는 이가 없었지만….

“왔니, 동생아?”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현관에 나와 있는 도미닉의 모습에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좋은 오후입니다.”

“이틀씩이나 외박을 다 하고.”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 도미닉은, 마치 검문이라도 하듯이 루시페우스를 한 바퀴 돌며 그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깔끔한 셔츠, 갓 다린 듯한 바지, 말끔한 머리칼.

그런 건 마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 4황녀와 같이 있던 제 의동생이 너무나도 말끔한 모습임에….

“아버지를 홀린 것처럼 그녀도 홀린 것인지….”

도미닉의 지팡이가 쿡,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을 찔렀다.

“꼴에 사내새끼라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참신한 고백이었다. 그의 저급한 망상에, 루시페우스의 아래턱이 꿈틀거렸다.

도미닉이 힘을 꽤 실었음에도 밀려나지는 않았으나, 루시페우스는 순간적으로 제 마지막 생이 생각나 아뜩하였다.

‘부자가 똑같군….’

저를 기만했음을 인정하던 후작의 비웃음, 그의 앙상한 팔뚝이 휘두른 지팡이에 떠밀려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던 그 순간.

‘…복수는 그녀의 편에서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세실리아의 생각을 해서였을까. 루시페우스의 낯에 작은 생동감이 일었고, 도미닉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건방진 새끼, 재미 좋았나.’

그는 지질한 망상으로 스스로에게 불쾌를 돋웠다.

뭐, 아무려면 어떠한가. 부마에서 가까운 것은 지금의 저였다.

도미닉은 제가 세실리아에게 떠민 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떠올리며 히쭉 웃었다.

세실리아가 헨리에테를 시켜 상자째 불태우게 했음을 몰랐으니까.

“내 피앙세께서 뭐, 묻는 것 없으시던?”

“…네?”

“그분의 놀라운 비밀에 관해 이야기 나눈 차였는데.”

놀라운 비밀?

그녀가 코코 에스메르라는 사실? 아니면….

‘설마.’

루시페우스는 재빨리 도미닉을 꼼꼼히 살폈다.

평범한 귀족들 수준의 신성력.

마력이랄 것도… 일반인보다야 많지만, 마법사라기엔 적었다.

이런 마력이며 신성력으로는, 저처럼 타인의 신성력을 확인할 수 없을 거였다.

‘…그런데 이상하군. 그때 썼던 마법은 분명 꽤 큰 마력이 들 텐데….’

그날의 일을 곱씹으려는 것처럼, 루시페우스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도미닉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가 루시페우스를 만족할 만큼 괴롭히고 나면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이 악마 놈도 아직 모르나 보네. 혹시 알고 있을까 싶어서 이간질하려고 떠봤던 건데.’

도미닉은 흡족한 낯으로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을 한 번 더 쿡, 찍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팡이에 찍힌 가슴이 아릿했다. 실은 그것이 온종일 그를 괴롭힌 서글픔에서 비롯된 거였지만, 루시페우스는 손쉽게 도미닉의 탓을 했다.

‘뭘 두고서 비밀이라고 이야기했는지…. 아무튼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군.’

거기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다.

세실리아가 제게 다시 연락하고, 도미닉과의 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는 것.

그 정도의 신뢰를 얻지 못해도 좋았다.

나름대로 지켜드릴 방법이야 얼마든지 많았으니까.

“전하! 이제 괜찮으세요?”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제가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아냐, 별일 아니었어. 어서 와.”

사냥 대회가 끝나고 며칠 뒤.

비로소 태양제가 끝나고 황성 전역이 안식을 취하게 되었을 때,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나를 찾아왔다.

“갑자기 올라가셨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많이 편찮으셨어요? 멀리 오셔서 정말 고생만 하시다 가셨어요, 전하….”

내 친우 커플은 다정하게도 내 걱정을 해주었다.

그날 아멜리가 함정에 빠진 척해야 하니 연회장에 있지 말라며 내 응접실을 내줘놓고, 갑작스레 황성으로 돌아가 버렸으니 놀랐을 거였다.

‘아팠던 건 내가 아니라 루시페우스지만….’

오늘도 아멜리의 취향으로 차린 다과상 앞에서, 다쿠아즈 몇 개를 집는 둥 마는 둥 하던 레오폴트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알비누스 영식도 시상식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던데.”

“그러게요. 혹시 그분이 전하를 보필하였나요…?”

두 사람이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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