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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23화 (123/220)

123화. 석연치 않은 설렘 (5)

내가 그에게 진 빚.

그건 실상 그와 나의 관계를 이어붙이던 작은 속임수였다.

황실의 직계인 나와 황실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귀족파의 해결사인 그. 제국군에서 일종의 첩보부를 운영하는 나와 올해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인 그.

반목해야만 하는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모두 허울뿐인 거래 때문이었다.

그는 번번이 나를 도와주고, 그걸 빌미로 빚을 지웠다며 거래를 제안하고.

그러면서 그가 제안한 것은 가끔 나를 찾는 것, 찾아와서 나와 접촉하는 것.

‘처음부터 그랬지. 글렌치아의 발코니에서 뭘 확인해 본다느니 했던 그때부터.’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과 닿을 수 없는 그에게 꽤 중요한 일일 거였다.

내 손끝을 만져보는 그의 낯은 번번이 진중했고 또 절박했으니까.

빚의 탕감이란 그걸 다 그만두자는 거였다.

‘좀 야멸찼나…?’

거기에 내 심술이 들어 있음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원망 또한 담뿍 들어 있었다.

‘제가 발길을 끊어놓고 왜, 내가 누굴 방에 들이건 말건 제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동요하는 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제가 말실수를 했나 보군요.”

그때, 루시페우스의 손이 내게로 향했다. 커다란 손이 내 이마를 감싸더니, 내 눈썹과 눈썹 사이를 오가는 그의 손끝이 홧홧했다.

‘내가 또 인상 썼구나….’

그 크고 단단한 손 너머로 보이는 그의 낯에는, 어딘가 아픈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내 표정 하나하나에 연연하는 듯 구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 루시페우스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였다.

‘얼마 전이었다면 내가 원작의 억지력을 극복했다며 좋아했겠지만….’

원작의 내용을 안다는 이유로 나는 줄곧 자만해왔다.

레오폴트나 암조 기사들이 나를 동대륙의 현자라느니 예언자라느니 띄워주는 데 심취해서는.

그런데 내가 아는 원작은 이 세계를 완벽히 담고 있지 못했고, 심지어 내가 지금껏 바꿔나간 일들로 자꾸만 변해갔다.

그런 불확실성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감정은… 명백한 불안감이었다.

‘처음에야 흐뭇했지만….’

태양제 장터에서 날뛰던 말이 달려들 때의 공포감. 내가 사건에 개입함으로써 유스티안이 실종되었을 때의 절망감.

루시페우스에게 신성력이 있고 도미닉이 마법을 쓰는 것처럼, 내가 전혀 모르던 사실을 마주할 때의 당혹감.

‘더는, 변수를 만들면 안 돼.’

나는 손에 쥔 유리잔을 손에 꾸욱 쥐었다.

그러는 내내 루시페우스는 물끄러미 내 낯만 지켜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어떤 미세한 기미라도 떠오르기를 기꺼이 기다리는 것처럼.

그게 다정함으로 느껴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경의 형 말이야.”

루시페우스가 흠칫, 굳었다.

어딘가 찔린 사람처럼 구는 그 모양새에서, 나는 아까 도미닉이 내 체질을 운운하던 걸 떠올렸지만….

‘그가 흘린 건 아닐 거야.’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원망할 때조차 그를 신뢰하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까.

“그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경도 몰랐던 거지?”

“네. 저도 이번에야 처음 안 일입니다.”

그의 답이 순순히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눈빛이 진지하게 빛나는 것만은 알았다.

내게 손잡아 달라고 청하던 수많은 밤에 그랬듯이, 나를 도울 수 있게 해달라 청하던 세르니타의 밤에 그랬듯이.

“그럼 로즈버리 영애를 납치하려던 것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잠시 숨을 골라야만 했다.

그가 결국 아멜리를 납치하기로 했다는 사실에서부터, 나는 꽤 상처를 받았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니까, 경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었던 거지?”

그가 진실을 말해줄까, 어떨까.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루시페우스의 낯을 내려다보았다.

안경 너머 그의 눈매가 퍽 따스하게 풀어졌다.

그러니까 그가, 웃었다.

“네. 저희 가주님의 지시에 따른 작전입니다.”

“가주님….”

“제가 딱히 아들 취급받지 못하는 것 정돈, 전하께서도 이미 아실 텐데요.”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씁쓸한 호선을 그렸다.

오늘 마주한 내내 그는 평온한 기색이었다. 같은 무표정이어도 어딘가 느슨해 보였다.

그것이 앓다가 깨어난 사람의 나른함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건… 어떤 결심을 내린 사람의 여유 같았다.

“일전에 낙찰받으신 성상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게 어떻게 쓰일지, 알고 계시지요.”

그의 말소리에는 조금의 의문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루시페우스는 내처 말을 이었다.

“힐베르크령은 그 영지 자체는 황성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부유하지도 않아 주목받을 이유가 별로 없지요. 그 가문의 사정이 퍽 비극적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지.”

힐베르크 후작이 제게 후계자가 없다며 힐베르크령을 포기하려 했던 이유에는 그 영지의 소출이 보잘것없다는 점도 있었다 하니까.

“하지만 원로원의 의결권은 어떨까요.”

“인구도 적고, 특산품도 딱히 없으니 납세액도 많지 않고…. 어차피 한 표 아니야?”

원로원 의회에서의 의결권은 단순히 한 가문당 한 표를 행사하는 식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일종의 비례 투표를 표방한 것인지, 영지의 인구수와 납세액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주어졌다.

그런 것 역시, 원작에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전하께서 에스메르 상단을 통해 로즈버리의 채권을 회수하시고 있는 가문들 역시 비슷한 사정이죠.”

지금껏 내 장단에 맞춰 나와 코코 에스메르를 다른 사람인 것처럼 언급하던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에스메르 상단의 이야기를 했다.

그와의 대화가 늘 속내를 감추고서 서로를 떠보기만 하던 것과는 퍽 달라진 양상이었다.

“가주님의 목표는 의결권을 확대하는 겁니다. 마르크 백작가나 프랑 자작가…. 모두 근래에는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의결권을 잃어버렸지만, 그 영지를 모두 힐베르크 후작가 밑으로 합병한다면 어떨까요.”

“아니, 잠깐. 그 가문들의 영지가 그러고 보면….”

“네, 힐베르크령과 경계를 맞대고 있죠.”

원작에서는 힐베르크의 성상은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협박하는 소재로만 쓰였다.

귀족파가 정확히 어떤 계산에 따라 힐베르크를 노렸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돼 있지 않았다.

성녀의 피가 흐르는 가문을 무너뜨림으로써 교단의 위세를 떨어뜨리고자 한다는 식으로 묘사되었을 뿐.

“힐베르크령 인구가 20만. 마르크령 7만, 리라령 8만, 프랑령 4만, 스털링령 3만.”

“그래 봤자 두 배밖에 안 되잖아.”

“그리고 알비누스에는 상단이 있죠. 어느 영지에든 가서 막대한 매출을 올렸다며 신고한대도 이상하지 않을.”

“그렇다면, 세금 신고액을 늘려서….”

“네. 모든 영지를 합치고 증액한 세금을 납부하면 내년에는 적어도 다섯 표를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다섯 표…. 의회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원로원의 총 투표 수가 100표 남짓인 걸 생각하면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에서는 퍽 중요해질 규모였다.

“그런데 알비누스는 이미 10표를 다 갖고 있잖아?”

영지민의 수와 세금 납부액만을 갖고 계산한다면 대귀족 몇 가문이 의결권을 독과점할 게 자명했다. 그래서 한 가문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최대 10표로 그 상한이 정해져 있었다.

“힐베르크령은 소가주에게 돌아갈 영지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네, 퍽 민감하게 굴었지요. 자신이 받을 것을 저의 실수로 놓쳤다고 생각하니까요.”

원작에서는 그날 루시페우스의 납치가 성공했기에 도미닉이 등장하지 않았던 걸까?

그때의 납치는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의 친딸인 게 밝혀지기 전의 일이니, 아마 다른 이유로 실행된 걸 텐데….

톡톡톡, 새로운 정보들을 곱씹으면서 내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유리잔을 건드렸다.

유스티안을 찾기 위해 그가 피를 냈다가, 곧바로 치유해줬던 바로 그 손가락이었다.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멀거니 내 손가락에 붙박였다.

“알비누스 후작은, 게이블스를 제치고 귀족파의 수장이 되는 게 목표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못 속입니다, 그리 읊조리며 루시페우스가 다시금 미소 지었다.

‘게이블스는 이런 편법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충성하는 가문이 많으니, 10표만 갖고 말았지….’

생각지도 못한 정보였다.

케인이 몇 년간 알비누스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공들였지만, 극비는 역시 극비였던 모양이다.

정보란 것은 유통되지 않는 이상 샐 곳이 없었고, 내 눈앞의 남자는 소리조차 통제할 수 있는 마법사였으니까.

‘사용인들에게까지 비밀이었던 거야….’

그의 정보가 너무도 유용하다고 생각한 순간, 내 마음속에 치민 것은… 의구심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것들을 알려주는 거지?’

물론 그가 내게 무르게 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로즈버리령에 보낼 인부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흘리기도 했고, 에스메르 상단의 정체를 알면서도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한데, 이건 너무도 본격적이었다.

그가 알비누스를 배신하기로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만치….

이제 와서, 왜?

나는 그걸 물을 수 없어 혼란한 낯만 짓고 있었다.

‘그에게 뭘 물어보려고 하긴 했지만….’

본인이 이리도 술술 읊어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 위화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다가….

“또 그러십니다.”

그의 손이 언제나처럼 내 잇새에서 입술을 빼내기 위해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아챘다. 하고 나니 그의 손을 먼저 잡은 거라, 얼굴이 화륵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건…. 너무 다정한 일이란 말이야.’

다정한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계산하지 않은 변화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이런 걸 내게 알려주는 거야?”

“사고뭉치 막내의 반항 정도면 어떨까요.”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 말이야.”

내 낯이 너무도 진지한 걸 확인한 루시페우스는, 슬며시 시선을 떨구었다.

“그냥, 많은 걸 깨달아서요.”

“깨달아?”

“전하께서 뭐든지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다는 것 정도…?”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장난처럼 울렸다.

내가 세르니타의 별채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마치 나를 놀리는 듯해, 나는 새치름하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

모종의 이유로 후작을 따르던 그는 다시금 모종의 이유로 후작을 배신하는 쪽을 택한 모양이었다.

‘그건 요 며칠 있었던 일들 때문이겠지. 후작을 따르던 이유야, 도미닉이 언급한 약속 때문이겠고….’

그가 후작을 따르게 된 이유를 알고자 동대륙에서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는데.

나는 낯을 굳히고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경이 약속한 건 뭔데?”

“약속요?”

“소후작이 그랬잖아. 그들과 경이 약속을 했다고.”

“…아.”

내 질문에, 루시페우스의 낯에 은은한 당혹감이 깃들었다.

“신뢰 관계였는데 소후작이 경을 공격했으니, 배신감에 이러는 거고?”

내 질문에, 루시페우스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의 끝에 깃든 것이 희미한 서글픔이었다.

‘하긴, 도미닉이 루시페우스를 괴롭힌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지….’

말을 잘못 꺼냈다 싶어졌을 때.

“…이미 없는 일입니다. 말씀드리기 창피한 일이고요.”

먼 곳을 떠올리는 듯 내리깐 눈동자가… 울음을 삼킨 듯 빛났다.

뭐지?

그의 낯선 표정에 내가 놀란 순간. 이내 그의 입매가 만곡한 호선을 그리더니, 그 시선이 나를 올바로 향했다.

“아무튼, 어떠신가요. 제가 꽤 쓸 만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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