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석연치 않은 설렘 (4)
‘오직 나를 위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되셨다는 건가.’
달의 신의 말은 모호함투성이였으나, 두 번째 생에만 세실리아가 존재한 것은 그를 위한 안배…라는 식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지금에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겠지.’
동대륙의 배꼽에서 이전 생의 기억을 되찾은 것이 재작년의 일.
정말 그것이 제 첫 생인가 싶어, 그는 우선 원래 계획대로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갔다.
그 기억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묘소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 흡수되어 있었다. 다른 수가 없어 황성으로 돌아가니 후작저의 상황 또한 제가 꿈속에서 엿본 것과 동일했다.
루시페우스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려면 후작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의 피는 쓸모가 없다는 건가….’
저를 반의반 쪽이라 능멸하면서 정작 자신들에게는 알비누스의 피가 없다니.
복수심에, 당장 후작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 스스로의 목숨 또한… 마음만 먹으면 저버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도 않을 거였다.
‘하지만 그런 건 완벽한 복수가 아니지….’
제가 마지막 희망을 쟁취하려던 순간, 어머니의 묘소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처럼, 후작도 깊은 절망을 겪어야만 했다.
하여 루시페우스는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후작과 거래를 했다.
“가주님의 숙원을 위해, 저의 힘을 쓰겠습니다.”
그의 야망을 도와 그가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에 추락하도록.
그리고 해가 바뀌어, 작은 빛을 다시 만난 것이 지난봄의 일.
오월제 연회에서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나타난 작은 빛을 보았을 때, 루시페우스는 순간적으로 온 세상에 제 고동 소리만이 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간 잊어두었던 온기가, 제 작은 빛이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으로 여문 그 모습에.
첫 번째 생보다 이번 생을 조금 더 살 만하게 해주신 그녀의 찬란함에.
‘요정… 같으시군. 여전히.’
여전히 빛났으며 여전히 따스했고… 한편으로 애달팠다.
여전히 가닿고 싶고, 말 걸고 싶고, 손잡고 싶었다.
그 정도면 족할 줄 알았는데.
막상 한번 말 걸고 나니 저를 기억하시길 바라게 되었고, 한번 가닿게 되니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정한 생의 목표가 있어, 제 마음을 묻어두려 했던 것이지만… 이제는 달의 신과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다.
이번 생의 어린 시절을 보듬어준 행운이, 실은 제가 행복을 바랐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무거운 진실.
그 고통스러운 감격 앞에서, 그는 평생을 바란 평온한 죽음을 더는 바랄 수 없었다.
‘죽고 말면 그만일 하찮은 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때문에 다치시고, 괴로워하시고, 와중에도 저를 안심시키고 위로해 주시는 그 다정함 앞에서.
모든 안락함을 다 가지신 분께서 저를 위해 불편하게 주무시는 모습 앞에서… 수십 년을 묵힌 회한이 눈시울을 타고 녹아내렸다.
그는 세실리아의 은빛 머리칼을 그러쥔 손에 얼굴을 묻고서 한참을 흐느꼈다.
제가 평생을 그리워한 이가 제 안녕을 바라고, 제가 평생을 가닿고 싶어 한 이가 실은 저를 위해 신이 안배한 존재라는 사실.
‘…그렇다면.’
어차피 내버리려던 생, 그녀를 위해 사는 것 또한 어려울 것 없지 않은가. 아니, 그걸 제외한 그 무엇도 그의 생에 의미가 되지 못할 거였다.
‘내 목표쯤이야….’
후작에게 완벽히 복수하기 위해 1년을 썼지만, 1년은 허투루 쓰고 말았다며 묻을 만큼 짧은 세월이기도 했다.
루시페우스는 난간에 걸터앉으며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내려놓은 대로 눕혀진 작고 가녀린 몸, 이쪽을 향해 모로 누운 고아한 얼굴, 무의식중에 꼭 쥐고 있는 미력한 주먹.
‘저 손에 이런저런 고삐를 쥐여드렸던 것은… 내가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걸까.’
후작의 계획이 망쳐져도, 그래서 그의 복수가 불완전하게 되더라도… 그녀의 손에 그리되는 거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나를 위해 오셨다는 것부터 함부로 입에 올릴 순 없는 거지만….’
착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고 보면 그녀를 온기로 인식한 모든 인연이, 그녀가 제 밤을 위로해 주었다는 것부터가 음습한 망상 아니던가.
모든 게 제 과대망상이며 확대해석이어도, 루시페우스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어쩌면 작은 계기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 그녀를 위해….’
수십 년간 고수한 생의 목표를 바꾸는 거대한 전환이었다.
“그럼 좀 더 살아볼까요.”
“좀 더 살지 말고, 수명 다할 때까지 살아.”
그의 세상이, 이 삶을 조금 더 살 만하게 해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이 모든 건 그만의 비밀이었다. 제가 그런 결심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 노력하실 다정함이셨으니까.
마음을 삼키는 것. 그늘진 곳에서 도모하는 것. 은밀한 결심을 다잡는 것.
두 생에 걸쳐 내내 해온 일이었다.
그에게 어려울 리 없었다.
“잘… 쉬었어? 몸은 좀 어때?”
나는 선뜻 문가에서 들어서지 못한 채 물었다.
어딘가 낯설었다.
어째서인지 그에게서 온화한 기색이 풍겼달까? 평소처럼 꼼꼼히 차려입지 않아서일까….
그러고 보니.
“안경, 어떻게 된 거야…?”
그의 얼굴에는 늘 그가 쓰던 것과 같은 밋밋한 검은 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분명 그때 루시페우스가 쓰고 있던 안경은 그가 고꾸라지면서 부러지고 말았다. 그걸 수습할 정신이 없어서 챙기지 못했는데.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눈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라도 온실로 데려온 거였고….’
한데 어디서 난 것인지 루시페우스는 안경을 쓴 채였다. 당연히 그의 눈 색도 마법에 가려 다갈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집에 같은 것이 여러 개 있어서요.”
“후작저에 다녀왔어?”
내 말에 대꾸하는 대신, 루시페우스는 성큼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었다. 와중에 장갑은 새로 챙겨오지 않았는지 맨손이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 손을 올리려다가, 나는 순간 멈칫했다.
“너만이 이자에게 닿을 수 있겠어. 너는 특별하니까.”
바로 어제 새벽, 이 장소에서 엄숙하게 울리던 레베카의 목소리.
‘태양제 저잣거리에서 결벽증처럼 굴던 것도, 아멜리에게 손 한 번 대지 않던 것도 모두 다 그래서였던 건가.’
그리고 나만이 유일하게 이 세계에서 신성력을 타고나지 않아서, 나만이 그에게….
그 사실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와, 나는 새삼 숨을 골라야만 했다.
천천히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려놓는 그 시간이 길고도 숙연했다.
내 손끝이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은 순간.
“기다렸습니다.”
곧바로 그가 손을 말아 쥐어, 금세 손이 쑥 당겨지고 말았다. 그는 더없이 정중한 몸짓으로 나를 온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뭐야, 온실 내 건데.
그가 멀쩡히 깨어나 있다는 안도감, 내 얼굴도 안 보고 돌아간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마음, 어쨌든 그를 볼 수 있어 좋다는 쑥스러움….
수만 가지 마음을 내색할 수 없어 나는 새침한 말소리만 내었다.
“갔으면 간 거지, 왜 다시 왔어?”
“뵙고 싶었으니까요.”
이렇게 훅 들어온다고? 나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의 말소리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보았다.
그런데 올려다본 그의 낯에선 특별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별생각 없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때 그렇게, 키, 키….
‘윽.’
나만 설렜지.
나는 빨개진 낯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그래. 어쨌든 나한테 신세를 졌으니까, 얼굴 보고 인사하고 가려고 기다린 걸 거야. 예의 바르네, 발라.’
나는 잡다한 생각으로 사악한 두근거림을 잊으려 애쓰며 그의 안내에 따라 간이침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어떻게 가져온 건지, 침상 위 베드 트레이에는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것도 후작저에서 가져왔나….’
민트 잎을 가득 넣은 탄산수에 짭조름한 크래커.
“이건….”
“연회에서 뵐 때면 이런 것만 찾으시길래요.”
“…….”
사악한 두근거림아, 훠이, 훠이!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를 침대에 앉게 하고서, 루시페우스는 내가 그를 들여다보며 앉았던 간이 스툴에 앉았다.
어제만 해도 그가 이 침대에 누워 있고, 나는 그를 걱정하며 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것도 온종일….’
그처럼 내가 그를 걱정했음이 수줍어, 나는 유리잔을 재빨리 손에 쥐고서 거기에 시선을 붙박았다.
‘무슨 얘기를 좀 하려는 것 같지. 나도 물어볼 게 있으니까. 도미닉의 일이랑….’
나는 유리잔에 맺힌 물기에 손가락을 이리저리 미끄러뜨리며 오늘 얻어야 할 정보들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막상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거였지만.
“걱정했어. 경이 너무 오래 안 깨서….”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그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그러고 보면 어제까지 그렇게 앓은 사람치고, 꽤 가뿐한 낯이었다.
“이제 괜찮아?”
“덕분에요. 그런데 혹시….”
거기까지 말한 그는, 꼬아둔 다리 위에 올려두었던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혹시, 3황녀 전하께서… 다녀가셨는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깜짝 놀라서 낸 말소리에, 루시페우스의 낯에 작은 낭패의 빛이 비쳤다.
“…역시 그랬군요.”
“그게.”
뭔가 문제가 되나? 나는 변명하듯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땐 달리 방도가 없어서…. 왜?”
“그분의 신성력이 느껴져서요.”
“…그런 걸 다 느끼는구나.”
“전하께 3황녀 전하의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아. 뭔가 같은 것이 작용한 걸 알았나 보구나. 나는 레베카의 초커를 슬며시 매만졌다.
레베카가 루시페우스의 신성력이 마력과 엉겨드는 걸 알아차린 것도 그렇고. 신성력이 발달한 이들의 감각은 내 상상 이상인 모양이었다.
“경의 신성력이 너무 오래 억눌려 있어서 더 힘들 거라고, 그 순환을 조금 돕는 정도라고 했어.”
그가 신성력을 억눌러 두었다면, 그 또한 제 신성력이 평범한 수준이 아님을 알아서였을 거였다.
그게 비밀이겠지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예민한 일인가?”
어디도 말 안 할게, 그리 덧붙이려던 나는 이미 암조 기사들에게 공유했음을 깨닫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루시페우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께서야 이미 제 다른 비밀도 엄수해 주시고 있지 않으신가요.”
“…그렇기야 하지.”
“덕분에 소문으로만 듣던 전하의 온실에도 와보게 되고요.”
“여기 와본 사람이 몇 없긴 하지. 내 기사들이나, 레오나….”
긴장을 떨치고픈 마음에, 부러 들뜬 목소리로 손가락을 꼽는데….
“발코니는요.”
“응?”
돌연 그의 말소리가 퍽 날카롭게 울렸다.
“전하의 발코니는, 그래도. 다른 이에게는….”
“응? 거긴….”
뭐, 뭐야, 이 재촉은?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 그 스스로도 뱉은 말에 놀랐는지, 그의 낯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대번에 피어올랐다.
“…제가 주제넘었군요.”
“아니, 그게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저처럼 무례한 자가 또 있으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무례하다니…?”
그게 단지 무례를 저지른 것 정도라고 눙칠 문제인가?
벌써 한참 지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늘 설렜었는데.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넘겨짚게 되고….
‘…저한테는 그럴 일이 아니었나.’
나는 조금 뾰로통한 마음이 되었다. 심술이 난 것도 같았다.
한번 들었던 원망의 마음은 언제고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뭐. 유일하게 닿을 수 있는 게 나뿐이라서, 그냥 다른 사람 체온이 궁금했나 보지.’
대번에 마음이 삐딱하게 흘러나가는 것이… 정말, 번거롭기만 한 감정 소모….
“그 무례도 잊어주고, 경이 그런 특이 체질인 것도 묵인해줄게. 레베카 언니야 어쩔 수 없지만…. 이 정도면, 그간 쌓은 빚 대충 다 탕감할 수 있지 않겠어?”
“아, 그게….”
내 말소리에 루시페우스는 퍽 당황한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