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21화 (121/220)

121화. 석연치 않은 설렘 (3)

“뭐어? 병문안?”

하,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로?

그날 별채에서 그와 마검사들을 상대했던 케인과 엘런에게서도 황당하다는 듯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염치가 없다, 그치?”

내 말에 세 소대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냥 대회 때의 일에 대해 아직 제대로 들은 바가 없는 헨리에테의 고개만 모로 기울어졌다.

“회의 들어가시고서 얼마 뒤에 왔으니, 한 시간쯤 기다린 셈인데요…. 돌려보냈어야 할까요?”

“아니야.”

내가 차게 웃으며 말했다.

“참 깜찍한 짓을 하네. 도대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봐서 이러나….”

나도 모르게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뵈옵니다. 갑작스레 찾아와 놀라셨지요.”

도미닉이 기다린다는 응접실에 들어서자, 커다란 꽃 무더기가 나를 반겼다.

그러니까, 꽃다발이 아니라 꽃 무더기였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뵙고 싶어서, 감히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무례인 줄 알면 안 하면 되는데 말이야.”

나는 그가 내게로 내밀고 있는 거대한 꽃다발을 흘끗하며 말했다. 장미며 작약이며 라넌큘러스며, 예쁘다 싶은 꽃은 다 들어 있는 분홍 일색의 꽃다발이었다.

그래. 얘 같은 애가 보기에 여자는 핑크지.

나는 속으로 조소하며 꽃다발을 무시하고서 상석에 앉았다.

갈 곳을 잃은 꽃다발이 멋쩍은지, 도미닉이 민망한 낯으로 재빨리 응접탁자 앞에 와서 앉았다.

“모르나 본데, 내가 보통 이 시간엔 수선화궁에 있거든.”

“어제부터 출근하지 않으셨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꽃다발을 응접탁자 위에 올려놓은 도미닉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소름 끼쳐.’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다친 내가 출근까지 안 했다니 퍽 즐거운 상상을 한 모양인데….

“그래서 걱정이 되어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만…. 직접 뵈니,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내가 어딘가 불편하길 바라는 말로 들리네, 그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미닉이 빙긋 웃었다. 좌우 대칭 완벽한 미소였지만 웃음 짓는 이가 그여서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제가 공격한 대상이 나인 걸 알고는 당황해서 눈도 못 마주치고 벌벌 떨던 게….’

나는 동요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찻잔에 입을 묻었다.

정확한 상황은 몰라도 내가 열받은 것만은 확신한 헨리에테가 우려둔 히비스커스차였다. 고혈압에 좋다나….

“아니면, 은사를 진 자에게 위해를 가한 일로 알비누스에 징계라도 내릴까 봐서 상황 살피려고 왔나?”

나는 여전히 찻잔을 든 채 그의 낯은 쳐다보지도 않고 읊조렸다.

그가 해하려 한 게 나인 줄 알았건 몰랐건, 그로 인해 내가 다쳤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그저, 내가 즉결 처분 안 한 것만으로도 황송해해야 할 텐데.’

얼른 얘를 치우고, 루시페우스를 만나러 가봐야겠다. 그에게서 알비누스의 꿍꿍이에 대해 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

그리 다짐하며 나는 찻잔 너머로 그의 낯을 살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한데 그의 낯에서는 송구한 기색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하께서 말끔히 나으셨음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되어서 말이지요.”

“내가 은사를 졌는데, 그 걱정이 무엄하지 않아?”

“글쎄요.”

그리 대꾸하는 도미닉의 입매가, 조금… 비웃는 듯했다…?

“전하께서 남다르심을, 제가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뭐라고?

내가 다친 일을 두고서 남다르다고 한다면, 그건 단 한 가지밖에 말이 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신성력이 없는 걸, 알아…?’

그러고 보면 어째서인지 그는 계속 내가 허약하다는 식으로 말해오기야 했는데.

나는 당황한 낯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전하께서 연약하심에 대해, 신하로서 또 한 남성으로서 걱정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은사를 진 자들이 태양의 축복을 받았는데, 경이 걱정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황실 모독이군.”

“뭐, 공식적으로는 그리되어 있기야 하겠지만요.”

도미닉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꽤나 확신하는 기색이었다.

내 체질에 관한 일은, 분명히 황실 기밀로 되어 있는데.

‘은퇴한 유모야 뼛속까지 황실파니 알비누스에 흘릴 리가 없고. 세례식 때 있던 사람이라면, 분명 일종의 서약을 받아 두었다고….’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한편으로 불쾌한 낯을 유지하는 걸 잊지 않은 채 도미닉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아니, 단순히 정보가 샌 거라면 진즉에 공세에 시달렸을 거다. 이건 도미닉, 내지는 알비누스만이 알고 있다는 소리인데….

알비누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 알비누스라면….

‘설마…. 아냐.’

내 체질에 대해 알고 있는 또 다른 알비누스가 떠올랐지만, 나는 재빨리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일 리는 없다. 아닐 거야.

“누가 그걸 알려 주었을까요?”

도미닉의 입매에 비릿한 미소가 묻었다. 나직하게 말하는 그의 말소리는 간계를 속살거리듯 울렸다.

“그걸 분명 직접 확인했다고 하던데….”

그 입매와 달리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그의 눈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루시페우스와 같이 있는 걸 봐서일까, 도미닉은 내가 그를 의심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굴었다.

“뭐, 황실의 비밀이겠지요. 저도 황실의 일원이 되면 그걸 엄수해드릴 수 있을 텐데….”

그리 말하며 도미닉은 벨벳으로 된 상자를 하나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목걸이가 들었을 것만 같은 크기였다.

오늘의 방문을 구애의 일환으로 포장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부마가 되겠다는 게, 그걸 약점으로 잡겠다는 거였나.’

나는 질린 듯한 낯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 상자만 노려보았다.

다만 이것이 도미닉 본인에게도 일종의 도박인지, 그의 손끝이며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아수라마수라의 황권은 절대 약하지 않고, 알비누스는 귀족파 내에서도 이제야 기를 펼락 말락 하는 가문이니까.

‘지금은 무슨 결심을 하고 와서 이러는 거지만, 그의 본능은 제가 공격한 게 나란 걸 알았을 때 벌벌 떨던 그 모습에 가까울 거야.’

부마 자리도 부마 자리지만, 세르니타에서의 일을 묵인해주길 바라는 것일 터였다.

어차피 그에게 내 체질에 대한 정보는 중요한 패.

내가 인정하든 않든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터였다.

넘어가는 척해주면 내 어리숙한 이미지에도 도움이 되겠지…. 쉽사리 물러나면 안 되겠지만.

그 모든 계산을 담아, 나는 냉엄하게 말했다.

“글쎄, 나는 경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체질에 대해 어디서 소문이 샜는지 확인도 해 봐야겠지만, 한편으로 눈앞의 치를 겁박해두는 것도 중요했다.

“유언비어를 유포해서 황실을 욕보이면 황실 모독죄로 참회의 탑 종신형에 처하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나는 소파 옆 협탁에 있는 호출용 종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지금 내가 불쾌하다는 이유로 경의 목을 딴대도 황실 모독죄라면 경의 아비도 할 말 없을 텐데 말이야.”

“유언비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요….”

도미닉이 상자를 쭈욱 밀어 내 찻잔 바로 옆에 두었다.

그는 퍽 질린 낯이면서도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무탈하시니 다행입니다. 여러모로요.”

“다행이어야지, 경에게는. 그날 내가 잘못되기라도 했었다면 알비누스가 멸문을 면치 못했을 텐데.”

나는 내 목소리가 최대한 한랭하게 울리길 바라며 말했다.

“물론 은사를 진 자가 그 정도로 잘못될 리도 없지만.”

나는 눈에 힘을 가득 준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맞받는 도미닉의 눈동자는 한없이 떨렸지만, 어떤 확신이 있는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내 허세를 꿰뚫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 진짜.

도미닉이 등장한 이후로 수많은 것이 뒤엉키고 있었다.

‘원작에선 분명 존재감 없는 인간이었는데.’

나한테 대놓고 접근해서 가십거리 만드는 건 애교 수준이었다.

마법을 쓰지를 않나, 마검사를 거느리질 않나. 심지어는 내가 신성력 없다는 거를 어찌 알고서 협박까지.

‘그가 알고 있다면, 후작도 당연히 알고 있겠고.’

그리고 거기에는 자연스레 따라붙는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루시페우스는.

어떻게든 나를 지키려 하고, 내가 저 때문에 다쳤다고 자책하던 그는….

‘아닐 거야.’

나는 입술을 꾸욱 깨물며 고개를 작게 털어냈다.

‘아직 있겠지…?’

나를 침실에 데려다준 걸 보면 분명 밤에 깼을 텐데, 암조 회의다, 도미닉 놈이다 해서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기다려 달라고 손거울로 말이라도 보내놓을걸.’

그 생각에 다다라, 나는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조금 시큰거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끝내 오지 않은 답장.

‘…맞다. 그가 그동안 나를 피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면 도미닉은 어쨌건 제 가족이 이틀째 행방불명인데도, 마지막 목격자인 내게 언급 한 번 없었다.

‘안 물어본 걸 보면…. 벌써 후작저에 돌아간 걸까.’

그날의 일은 다 충동이었고, 그의 결심은 여전히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쪽으로 정해졌는지도….

그리 생각하며 다시금 입술을 꾹 깨물다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입술을 깨물 때면, 번번이 입술을 잇새에서 빼내던 그의 손짓이 떠올라서.

그렇게 퍽 가까워졌던 것을 생각하면, 여지없이 떠오르고 마는 세르니타에서의 일들….

‘아냐. 그런 감정은 다 나중의 일이야.’

호감이나 연애 감정처럼 변하기 쉬운 건… 우선 제쳐둬야만 했다.

그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 다짐이 마음만큼 쉽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뛰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프리지어궁 후원 안쪽에 자리한 내 온실.

내 성인식을 기념하여 아버지께서 꾸려주신, 황실이 나를 이토록 귀애한다는 증명과도 같은 공간.

양손으로 온실의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나는 거기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오셨어요.”

그의 침상을 둔 곳은 훨씬 더 안쪽이었는데, 온실의 입구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그가 서 있었다.

내가 오는 걸 알고 기다린 듯이….

‘마,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키 큰 야자수 그늘에 서 있어서일까, 그는 어딘가 개운한 기색이었다.

깨어나고서 얼마 뒤. 세실리아를 침실로 데려다 놓은 루시페우스는 그 머리맡에 얼마간 앉아 있었다.

어떤 악몽을 지나고 있는지, 그 단아한 미간에 자잘한 실금이 갔다.

이따금 그리했듯이 그 미간을 꾸욱 눌러 펴주다가, 잠시. 감격에 벅차올랐다.

아무것도 끼지 않은 제 손끝이, 달빛에 투명히 비치는 듯한 세실리아의 살갗에 닿아 있었다.

그러니까, 그 달빛 아래….

루시페우스의 손끝이 세실리아의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와 귓바퀴를 따라 훑었다. 모로 뉜 세실리아의 볼을 이리저리 가르던 은사가 말끔히 걷혔다.

저를 보며 인상 찌푸리실 때면 이따금 덩달아 실룩대던 볼을 지나, 작게 벌어진 입술에 닿았다.

저에게 나눠 주신 달콤한 음식을 오물대시던 그 입술, 저를 상처 입힐 말을 잔뜩 빈정대시던 그 입술, 절망적인 순간에 한껏 물어뜯으시던 그 입술.

그리고….

‘…무슨 불경한 생각을.’

루시페우스는 짧게 웃고는, 세실리아의 머리 위에 제 손을 펼쳤다. 얇은 시폰 커튼처럼 은은한 신성력이 세실리아를 감쌌다.

‘푹 주무시길.’

지난 며칠 고단하셨으니, 그것도 저로 인해 고달프셨을 테니 단잠 속에서 푹 쉬시길.

저만의 술식에 신성력을 보태어 작은 마법을 걸어두고서,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발코니로 나왔다.

은은한 습기가 밴 여름의 밤공기가 싱그러웠다.

어느새 여름의 한중간에 들어선 밤의 정원. 매일같이 그리워한 그 공간.

제가 멋대로 발길을 끊어놓고서, 가지 못해 아쉬워한 바로 그곳.

그때만 해도 세실리아는 그저, 이 생에만 존재하는 행운 같은 존재였지만….

“대신 변수를 하나 줄게.”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이전 생과 이번 생의 접점에서 달의 신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자,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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