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석연치 않은 설렘 (2)
루시페우스는 다소 상태가 호전되어, 이따금 가쁜 숨을 내쉴 뿐 열도 많이 내린 상태였다.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지만….
하지만 내 언니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너는 또 어쩌다가….”
“피는 다 멎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레베카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채에서 곧바로 마차를 타고 이동한 탓에 상처를 제대로 처치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세르니타에서 황성까지 서너 시간은 걸린 덕에, 그사이 손이며 무릎이며 적당히 지혈된 채였다.
어째서인지 따로 치유하지 않았는데도 상처가 적당히 아문 느낌이기도 했다.
지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물기까지 하다니, 신성력 없는 내 몸으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상처 따윈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절박한 눈빛을 레베카에게 보냈다.
“저, 저를 구하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이 사람이 마법사…인데. 뭔가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신을 잃어버려서….”
내 입에서 부서져 나오는 말들은 논리 정연과 거리가 멀었다. 황망하게 이리저리 구르는 내 눈동자를 쳐다보던 레베카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내 곁에 앉았다.
“세실, 괜찮아. 여기는 안전해. 이 언니가 왔잖니.”
너를 해할 것도 없고, 너를 의심할 자들도 없단다. 레베카는 몇 번이고 내 어깨와 등을 쓸어주었다.
“언니는 우리 막둥이부터 치료하면 좋겠는데.”
그리 말하는 레베카의 미소가 푸근하게 빛났다.
평생 나를 보살펴온 레베카의 따스한 손길 덕에, 나는 얼마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의 어깨를 안은 손에 어찌나 힘을 줬던지, 손아귀가 욱신거렸다.
그를 만질 수 있는 게 나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의식을 잃자 비정상적인 고열은 한풀 꺾였지만, 어째서인지 암조의 기사들 누구도 그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하나같이 그에게 손을 대려고만 하면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자칫 신경이 마비될 것만 같은 자극이라나.
“전하께서는 괜찮으신 거예요…?”
“응? 나, 나는….”
그와 닿을 때 안 괜찮았던 적, 한 번도 없었는데.
물론 이따금 뜨겁거나, 따끔따끔하게 느껴진 적이야 있었지만.
하지만 그에 대해 찬찬히 곱씹을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의 그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기에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야만 했으니까.
안전한 곳.
나를 평생 지켜준 내 가족이 있는 곳으로.
“하지만 이 사람,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괜찮아. 그의 생명은 멀쩡하단다.”
레베카의 눈동자가 루시페우스를 스쳤다. 현세대에 가장 거대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는 레베카의 진단인 만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세실.”
“정말요? 근데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네.”
“아흑….”
레베카의 침착한 진단에 안도해서였을까. 내 입에서는 내내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그가 잘못될까 봐서, 어딘가 망가졌을까 봐서, 문제가 생겼을까 봐서.
나를 지키려다가, 혹은 나 때문에.
“흑, 그게, 제가, 제가 잘못해서…. 다들 잘못되는 줄 알고….”
둑이 터진 것처럼 나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유스티안이 실종됐을 때부터 이틀을 꾹꾹 눌러둔 거였다.
내가 모든 걸 망쳤다는 절망감.
내가 잘난 듯 나선 모든 일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불안감.
“걱정 마.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단다.”
나는 레베카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러는 사이 레베카는 신성력을 불어넣어 내 몸 이곳저곳을 치료해 주었다.
손바닥이, 무릎이, 정강이가 완전히 아물었다. 넘어지고 구르느라 근육에 일었던 둔통도 가라앉았다.
레베카의 치료가 끝날 때쯤, 꺽꺽대던 내 울음도 잦아들었다.
“그나저나, 마법사라. 낯이 익은데.”
내가 마법사를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레베카가 읊조렸다.
나는 보지 않아도 그녀가 썩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시페우스를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할까. 나는 루시페우스의 어깨를 꾸욱 쥐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게….”
“뭐, 누군지보다 더 중요한 건. 이상하네. 신성력이 이렇게 많다니.”
“신성력…요?”
“응. 이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건 교단에서도 드문 일이거든.”
레베카의 눈동자가 루시페우스의 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붙박여 있었다. 내가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신성력이… 많다고? 그냥 있는 정도도 아니고?’
놀란 마음에 루시페우스를 내려다보니… 넘어지면서 안경이 부러진 탓에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은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데 마법사라. 저 기운이 마력인가, 그러면….”
“마력이 보통 마법사들 수준을 넘어섰다고 들었어요.”
내가 도움이 될까 냉큼 말을 보태자, 레베카의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로 떨어졌다. 청남색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빛났다.
“소중한 사람이니?”
“네?”
레베카가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퍽 낯설게 들려, 나는 얼마간 입만 뻐끔거렸다.
내게 그는… 좋아하는 사람, 언젠가는 그만 좋아하려던 사람, 어쩌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
그와 나의 관계를 정의할 만한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딱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나는 레베카의 올곧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레베카가 웃었는지, 짤막한 숨소리가 울렸다.
“우리 막둥이. 신성력 잘 쓰는 남자 만나기를 바랐는데, 어쩜 마침.”
“아, 언니, 그게 아니라요….”
내가 다치거나 아플 때마다 레베카가 주문처럼 외던 말.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위에 레베카의 따뜻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그래. 마력이 많은데, 신성력도 많아서 두 기운이 서로 부딪히고 있나 봐.”
레베카가 천천히 손을 루시페우스 쪽으로 뻗었다. 우웅, 그녀의 손에 커다란 빛무리가 어리자마자.
“아, 역시.”
레베카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을 떼었다. 레베카도 그에게 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누구나 신성력과 마력을 어느 정도씩은 갖고 있으니 보통은 무의식중에 통제하는 건데…. 이자는 두 가지가 다 너무 과하네. 본인도 속에서 부대끼니 늘 괴로울 테고. 다른 사람이랑 접촉하면 신성력끼리 간섭해서, 그 반발력 때문에 이렇게 피차 고통스러워지고.”
“아, 아까 기사들이 손을 못 댄 게….”
“그래. 세실, 너만이 이자에게 닿을 수 있겠어. 너는 특별하니까.”
레베카의 눈동자가 그를 여기까지 싣고 온 들것을 스쳤다. 그를 부축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어, 급조한 들것으로 그를 실어 옮긴 차였다.
‘그래서 그렇게 나와 손잡는 거에 집착했던 건가…?’
거래라고 거창하게 말한 것치고 손잡는 정도를 청하고, 그때마다 무척 진지하게 빛나던 그의 낯.
“경은 참 이상해. 사람 손 처음 잡는 것도 아닐 거면서.”
그러니까, 그게 정말로….
나는 고통으로 가득 찬 그의 이마를 천천히 쓸어보았다.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안정시켜서 살아남은 걸 텐데 이리된 걸 보면… 꽤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신성력이며 마력은 아무래도 감정에 영향을 받으니까.”
“괜찮은… 거예요?”
“응. 열심히 버티고 있어. 이 정도면 그래도 많이 잦아든 것 같은데.”
“네, 아까는 엄청 뜨거웠고,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서 죄송하다느니, 저 때문에 내가 다쳤다느니, 감히 넘보았다느니 그런 소리를 덜덜 떨며 중얼대던 그가 떠올라, 다시금 심장이 욱죄는 것 같았다.
“네가 그 덕을 좀 보았겠구나.”
“제가요?”
“상처, 처음에는 훨씬 심했을 거 아니야?”
“아…. 맞아요.”
“이자가 불안정해지는 바람에 신성력이 흘러넘쳐서, 덩달아 네가 치유됐나 봐.”
“어쩐지….”
그래서 상처가 빨리 아물었던 거구나. 레베카의 말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신성력 잘 쓰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야, 응?”
“언니, 그게 아니래도요….”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 버리려는 듯, 레베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니까 레베카 역시 루시페우스와 내 사이를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내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짓건 말건, 레베카는 양손을 루시페우스 쪽으로 내뻗었다.
레베카의 열 손가락 끝 하나하나마다 가느다란 빛줄기가 피어나더니,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으로 스며들었다.
나를 몇 번이고 치유해준 따뜻한 빛…. 레베카의 신성력이었다.
“도움이 되면 좋을 텐데….”
세상에서 신성력을 제일 잘 다루는 내 언니의 치유라니. 나는 조마조마함 반 기대감 반으로 레베카의 손끝에 집중했다.
“으음, 신성력을 오래간 봉인해뒀던 모양이네….”
한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꽤나 집중한 듯한 레베카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배어났다.
“언니, 너무 무리하지는….”
“우리 막둥이를 지켜준 자에게 이쯤이야.”
레베카가 여유로움을 가장하여 내게 윙크해 보이고는 다시금 루시페우스에게 집중했다.
그 손끝에서 나온 얄따란 빛줄기가 이리저리 일렁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휴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레베카가 신성력을 거두었다. 그사이 루시페우스의 숨소리는 퍽 고르게 변해 있었다.
“신성력이 너무 오래간 억눌려 있었어서 더 심하게 날뛰었나 봐. 대충 잘 달래 두었으니, 나머지는 이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
레베카가 제 이마를 옷자락으로 찍어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루시페우스에게 붙박여 있었다.
“아무래도 낯익은데….”
“네?”
루시페우스가 낯이 익다는 소리인가? 레베카는 교단에 들어간 뒤로 황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니 정말로 그를 처음 보는 걸 텐데.
두 사람의 접점이 있었을지, 내가 이리저리 생각해볼 때였다.
“신성력이 이렇게 많은데, 그만큼 마력도 많다면… 고달픈 운명이구나, 이자도.”
고달픈 운명이라.
나는 레베카의 진단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대꾸를 기다리던 세 소대장의 낯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래, 루시페우스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원작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웠는데, 직접 곁에서 지켜보니 더욱 그랬다.
‘그의 신성력 역시, 원작에는 언급돼 있지 않았지….’
그러고 보면 나침반 마도구를 작동시키기 위해 베었던 손가락이 바로 아문 것도, 그가 신성력을 써서 그리된 모양이었다.
내가 세르니타의 별채에서 다쳤을 때도 제가 치료해줘야 한다고 중얼댔고….
‘…아픈 건 자기였으면서.’
나는 쓰게 웃으며, 어제의 일 중 내 기사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만 골라냈다.
“어제 레베카 언니가 그를 살폈어.”
“3황녀 전하께서요?”
“응. 그런데, 신성력이 좀… 이례적으로 많다더라고.”
“네?”
내 말에 세 소대장은 깜짝 놀란 낯이 되었다. 특히 대신전의 서류를 직접 확인한 알렉스가 당황한 눈치였다.
‘마력과 신성력의 간섭 때문에 기사들이 그를 못 건드렸다는 건 일단 묻어둬야지. 그러면 내가 신성력하고 마력이 없는 걸 확인해주는 게 되니까….’
내 기사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비밀은 최대한 입을 덜 탈수록 좋았다.
“신성력과 마력을 둘 다 구사하는 사람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으니, 조금 더 찾아봐 주면 좋겠어.”
“네. 막심 경과 학자의 탑에 한 번 더 다녀와야겠네요.”
세 소대장의 짤막한 보고가 끝난 뒤, 프리지어궁 주방이 실력 발휘한 간단한 식사와 함께 오늘의 회의를 마쳤다.
“다음에 이렇게 셋이 모이는 건, 케인이 로즈버리령에 다녀오고 나서겠네?”
“네, 내일 바로 출발하려 합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케인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로즈버리령 폐광을 살피기 위해 태양제가 끝나고 케인이 출장 갈 예정이었는데, 그사이 귀족파가 폐광을 폭파하기 위한 인력을 모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지라 마음이 급했다.
“태양제 기간에는 다들 쉬는 거라지만,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벌써 인부를 보냈을 수도 있어.”
“도착하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나는 케인에게 눈빛으로 신뢰를 보냈다.
‘그 일도 루시페우스가 실마리를 준 거였지. 그러면 이번에도 그에게 도움받을 수 있을까…?’
다시금, 얼른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오를 무렵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헨리에테가 들어왔다. 그녀의 낯이 굉장히 송구스러운 빛을 띠었다.
“전하, 식사 다 마치셨지요? 손님이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어서요.”
“손님?”
오늘 알현 신청한 사람 없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헨리에테가 민망한 듯 말을 이었다.
“알비누스 소후작, 그러니까 도미닉 알비누스 경입니다. 병문안을 드리겠다고 부득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