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9)
노파의 집에서 꼬박 보름을 걸어, 마침내 루시페우스는 동대륙의 배꼽에 다다랐다.
세상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동대륙 중앙의 평원.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가보라고 한 거야?’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를 푹푹 빠지게 하는 들풀과 수천 년을 거기에 있었던 듯한 고목, 완만한 구릉 같은 것이 있었지만, 초저녁 하늘엔 벌써 은하수가 뒤덮여 있었지만….
아무튼, 아무것도 없었다.
가보라고 했으니 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왜 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할망구가 노망이 들었나, 루시페우스는 책에서만 읽어본 듯한 친근한 말소리를 뇌까리며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았다.
드넓은 평원, 높디높은 하늘, 적당한 기온, 땀을 식히는 미풍, 아직 붉은 기운이 덜 빠진 서편 하늘.
바람에 나뭇잎 부딪는 소리와 이따금 산새 우짖는 소리.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신성력을 내버릴 방법을 찾기 위해, 또는 신성력과 마력을 갖고도 타인과 맞닿을 수 있는 법을 알기 위해…. 그러니까, 평범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동대륙을 헤맨 게 벌써 두 해였다.
노파의 나침반이 마지막 희망이니, 본대륙에 돌아가면 어머니의 무덤을 찾으러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쪽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당분간 쉬지 못할 거였다.
‘어차피 곧 밤이고.’
하루쯤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가도 괜찮겠지.
루시페우스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사람도 없겠다, 안경을 벗자 본연의 색으로 빛나는 맨눈에 은하수 빼곡한 하늘이 쏟아졌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걸 떠올리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가 있었다.
그가 첫눈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던 그의 온기, 작은 빛, 막내 황녀.
이젠 다, 혼자만의 망상으로 묻어둔 지 오래였지만.
잘 지내고 계시겠지.
가장 안전하고 호화로운 곳에서 더 아름다워지셨겠지.
저를 동정하셨던 것도 잊고, 언제든 다른 누군가를 동정할 준비가 되어 넘치는 다정을 흩뿌리며 살고 계시겠지.
세상 모든 사람이 그분처럼 신성력이 없다면, 제가 이렇게 고생을 안 해도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루시페우스는 까무룩 잠들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몰랐다.
모든 게, 그가 품고 있는 계획대로 흘러갔으니까.
그는 우선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쪽으로 갔다.
‘바늘이 가리키는 곳은 분명….’
마기와 죽음과 유황불의 열기가 넘실대는 대륙의 균열 안쪽.
그러니까, 어머니의 유해가 수습된 곳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 내부에 흡수돼 있었다.
다 왔는데. 거의 다 왔는데.
‘어떻게든 저기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황성으로 돌아가는 그 절망의 귀로(歸路)에서 그에게는 맹목적인 목표가 하나 생겼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어,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루시페우스는 후작과 계약을 했다.
“가주님의 숙원을 위해, 저의 힘을 쓰겠습니다.”
알비누스를 귀족파의 수장으로 세우는 것, 황실파 눈엣가시들을 몰아내는 것.
구체적인 방법도 있었다.
황실파의 무력인 성기사단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 그것을 위해 루시페우스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제가 열겠다고 했다.
제 어머니를 삼킨 그 끔찍한 대륙의 균열에 무고한 기사들을 몰아넣겠다고 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무어냐.”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여는 술식에는 수정을 마기에 오염시켜 만든 흑수정이 다량으로 필요합니다.”
“돈쯤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지.”
“그리고….”
루시페우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매일같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침반이 손끝에 걸렸다.
“가주님의 피가 조금. 필요합니다.”
“내 피?”
노파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뿜어나오는 마기 때문에 나침반의 위력이 반감될 테니, 다른 피를 보태어 정확도를 올리는 걸 추천한다고 했다.
“어머니의 묘소를 찾기만 하면, 알비누스의 성을 버리고 평생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이는 신전에서 주신과 달의 신 앞에 맹세할 것입니다.”
그를 평생 짐짝처럼 여겼던 후작은 반색하며 좋아했다. 그렇게 그는 알비누스 후작의 사냥개가 되었다.
뭔가 이상한 걸 느꼈을 때는, 사람들이 황실에 황녀가 셋이라는 듯이 이야기할 때였다.
“넷 아닌가?”
“이 사람. 폐하의 따님만 치면 세 분 아니신가. 헤르미아나 전하야 손녀시니까.”
“그, 막내 황녀님 성함이….”
“아니, 동대륙에 너무 오래 있었어? 조만간 교황 성하가 되실 분 성함을 다 잊고.”
“교황 성하라면….”
교단에 귀의한 황녀의 이름은 분명.
“레베카 전하 말이야.”
그러니까, 세실리아란 이름의 4황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루시페우스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몇 가지 핵심을 읊으라면 그중 하나가 바로 4황녀 세실리아였는데.
‘그러고 보면, 율리안 그자가 나를 전혀 모르는 듯 굴기도 했었지. 늘 먼저 알은체해 왔건만.’
그를 모르는 체하는 이가 한둘이 아닌지라 그러려니 하던 것인데….
‘여긴 어디지?’
여기는, 그의 세계일 리가 없었다.
세실리아가 없는 세상.
그의 외로운 밤을 보듬어주던 온기가 없는 세상.
그와 유일하게 닿을 수 있고, 그를 사람처럼 무감히 대해주던 작은 빛이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을, 그는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더라….
‘그러니까 동대륙의 배꼽에서 잠들었었고….’
아.
이건 꿈이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루시페우스는 순식간에 그 루시페우스의 몸에서 훅 튕겨 나왔다.
꿈속의 루시페우스, 그 세계의 루시페우스와 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 루시페우스는 온기와 작은 빛을 모른 채 자라났으니까.
그래서인지 어딘지 더 무도했고, 인간성이 더 결여돼 보였다. 제가 보기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는, 눈길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분홍 머리 여인에게 집착했다. 심지어 그녀가 아우렌바흐 소공작과 마음에 통해 있는데도 그걸 자꾸만 방해하면서.
마침 후작의 일을 돕는 게 그녀를 속박하는 일도 되었다. 그녀의 양부 가문의 재정을 쥐고 흔들고, 친부 가문의 권리를 빌미로 관심을 강요했다.
‘내가 연심이 뭔지는 모르지만, 저런 걸 연심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그’ 루시페우스의 생을 지켜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는 적어도, 작은 빛의 손을 잡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서는 알았으니까.
기묘한 관찰은 그 불쌍한 루시페우스의 말로까지 계속되었다.
한데 이상했다. 그 분홍 머리 여인에게 집착하는 것 말고는, 그 루시페우스와 제 판단은 대부분 일치했다.
세실리아를 모르는 그는 제가 아닌데, 마치 한사람인 것처럼.
‘나도 어머니의 묘소를 찾지 못한다면, 후작에게 거래를 청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내 마력으로 열지 않을까? 나침반의 정확도를 올리려면 후작의 피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그’ 루시페우스의 삶을, 어째서인지 아주 남의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세계의 루시페우스는 수백 개의 흑수정으로 거대한 마법진을 완성하고, 마력을 쏟아부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었다.
귀족파의 사병들이 성기사단을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마수들에게 밀어 넣는 참혹한 전장을 배경으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후작의 손가락을 따 그의 피를 나침반에 흘려 넣는데… 이상했다.
나침반의 바늘은 잠시도 루시페우스 쪽을 가리키지 않았다.
피가 8분의 1만 일치해도 작동한다고 했는데.
후작과 어머니는 친부가 같았다. 그러니까 선대 알비누스 후작인 외조부의 피가 후작과 루시페우스에게 공통으로 흐르니, 둘 사이는 나침반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저, 가주님께서는 제 외삼촌…이시지요.”
“큭.”
루시페우스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자,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으하하, 크게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둘 중 하나지. 에리나가 아버지의 딸이 아니거나.”
그와 조금도 닮지 않은 후작의 검은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내게 아버지가 따로 있거나.”
그 말을 들은 루시페우스는 얼어붙었다.
그 세계의 루시페우스도, 그를 지켜보는 루시페우스 본인도.
너무나도 순순한 후작의 말소리는, 그러니까….
‘알고 있었구나.’
어머니와 후작은 이복 남매조차 못 되었던 것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후작이 선대 후작의 씨도 아닌 어머니를 인정할 린 없으니….
‘후작이, 알비누스가 아니야?’
온기를 알지 못하여 훨씬 무감정한 그 루시페우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 낯이 변하는 것을 껄껄대며 바라보던 후작은 지팡이로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을 밀었다. 그 루시페우스는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서 있던 곳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로 떨어지는 깎아지른 절벽.
‘아, 그러니까.’
그렇게 그 루시페우스는 죽었다.
‘이건 나의….’
그의 첫 생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입구에는 영원히 식지 않는 용암이 흘렀다.
그 용암을 피해 마수들의 길을 따를 계획이었는데,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아 하릴없이 용암에 녹게 생겼다.
‘이렇게 죽다니….’
가쁜 숨이 들락날락, 숨이 막혀왔다. 눈시울이 뜨거웠고 가슴이 으스러질 듯 빠듯했다.
배신당한 것을 깨달은 순간 그의 가슴에 분노와 슬픔이 요동쳐, 봉인해 두었던 신성력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마력과 신성력이 함께 폭주하며 그의 몸을 살라 먹었지만, 뭐….
다 끝난 일이었다.
‘…하.’
우스웠다.
남들처럼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지 못하느니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죽을 생각도 했다.
결국 계획이 실패했으니 죽음을 맞이하는 게 맞는데.
어째서인지….
‘억울해.’
하, 하하. 용암으로 떨어지는 내내 그의 입가에 웃음이 자꾸만 배어났다.
눈가에는 오래간 잊었던 눈물이 고이다가 말라붙었다.
처음에는 추락하며 스치는 바람결에, 종래에는 용암이 가까워져 극심한 열기에.
죽고 싶었다.
그러니까,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렇게 죽으려던 건 아니었어.’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여러 방법을 다 써보고 나서야 죽고 싶었는데.
그의 가슴속에 믿으면 안 되었던 이를 믿은 데 대한 후회와 그에 대한 증오심, 제 존재에 대한 깊은 절망과 슬픔이 불타올랐다.
한 번도 받지 못했던 온정에 대한 아쉬움, 그가 유일하게 집착했으나 경멸만 받고 말았던 분홍 머리의 여인에 대한 후회도 심장을 죄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글쎄.
그는 배운 게 없었다. 올바름에 대해서도, 인간성에 대해서도, 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행복에 대해서도.
‘…한 번이라도.’
그런 건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거였는데.
그걸 알았다면 좀 달랐을까?
‘단 한 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때, 새하얀 빛이 그를 감쌌다.
루시페우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실 그것은 찰나이기도 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디지?’
밤하늘이 달로 가득 차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크레이터와 분화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달이 있었다. 하늘 어느 쪽을 보아도 시야의 절반 이상이 달이었다.
그런 걸 루시페우스는 처음 봤지만, 밤하늘의 하얀 것이니 달이라고 쳤다.
“깼니?”
대기 한가득 어떠한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