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16화 (116/220)

116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8)

아카데미 생활은 괴로웠다.

그가 막내 황녀에게 홀린 듯 굴었다는 이유로, 이미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의 의형이 친분이 있는 재학생들을 시켜 소년의 아카데미 생활을 악몽으로 만들었다.

귀족 사회의 축소판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수준 이하의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모두가 저에 대해 사생아의 사생아라며 수군대는 것은… 빨간 눈을 보인 채 거리를 쏘다니던 때만큼 괴로웠다.

그가 그리 괴로워해도, 작은 빛이 그를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그의 외로움에 차츰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분노가 깃들었기 때문이었지만, 소년이 그런 걸 알 수는 없었다.

제 삶에 대한 염증만 깊어질 뿐.

소년은 아카데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카데미가 본대륙의 모든 책을 소장한 학자의 탑과 도서관을 공유하는 덕분에 마법 입문서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으로만 마법을 이해하는 건 어려웠다. 순수하고도 강대한 마력을 지닌 소년은 수백 년에 걸쳐 정리된 정교하고 치밀한 술식을 완벽히 이해하는 대신, 제멋대로 술식을 만들어 비슷한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술식은 투박하고 변칙적이었으나 그의 마력이 압도적이어서 마탑의 마법을 앞섰다.

마탑의 마법사와 교류할 기회가 없었으니, 그런 걸 알 수는 없었지만.

마법을 공부하기 시작하자 소년은 제 폭주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력을 봉인하고 마력만을 사용하면서였다.

누구에게나 있는 신성력보다 남에게 없는 마력이 더 중요함을, 소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신성력을 쓰지 않으면 체력이 쉬이 회복되지 않지만, 어차피 이제 그를 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 다들 집으로 돌아갔는데, 후작저에 돌아가기 싫었던 소년은 강의실에 혼자 남아 마법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어.’

마법을 익히며 기감이 발달한 덕에, 소년은 너무도 쉽게 작은 빛의 방문을 알아차렸다.

재빨리 창문 밖을 살피니, 작은 빛의 은사가 살랑대며 칙칙한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소년은 그녀에게 알은체를 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저 사람은 2학년의…. 아우렌바흐 소공자라던가.’

귀족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레오폴트 아우렌바흐만은 알았다.

아카데미의 모두가 사랑했고, 그에게도 늘 예의를 지키는 인물이었으니까.

그것이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손이 작은 빛의 손을 맞잡고 에스코트하고 있는 걸 보자.

‘거슬려.’

거기다 심지어, 귀엣말을 나누기까지 하는 것 아닌가.

소년은 아우렌바흐 소공자에 대한 적의를 삼키며 그들을 몰래 뒤따랐다.

작은 빛은 제가 마법서를 뒤적이는 도서관에도 머물렀다가, 제가 과학을 공부하는 실험실에도 머물렀다가, 제가 땅만 보고 지나다니는 복도와 정원을 오갔다.

“귀신한테 비웃음당하지 않게 제대로 설명이나 해봐.”

기숙사에서 실수로 웃음소리를 들켰을 땐 숫제 귀신 취급까지 당했지만, 불쾌할 것 없었다. 후작저에서 평생 겪은 일이기도 했고….

오히려 제 웃음소리를 들으셨으니 좋은 일이었다.

그녀를 뒤따르는 내내 소년은 그늘진 희열을 느꼈다.

아.

더 가까이 가고 싶다.

말 걸고 싶다.

나도 저렇게 손잡고 싶다.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기인한 감정인지 몰랐지만, 소년은 홀린 듯 계속해서 두 사람을 뒤따랐다.

그러다 보니 아우렌바흐가 작은 빛의 곁을 비우는 때도 생겼다.

기회였다.

지금이면 말 걸어도 될까?

모르는 애가 말 건다고 싫어하시면 어쩌지?

내 눈을 보여드리면 그때 골목에서 돌봐주셨던 걔가 나인 줄 아시려나? 그러면 그때처럼 동정해 주시겠지?

소년이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그녀가 앉아 있는 정원에 들어설 때였다.

“혼자시라면 저와 오붓하게 정원 산책이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익숙한 말소리. 제 의형이 굽신대는 게이블스 영식이었다.

저보다 머리 하나 크고 어깨도 한참 넓은 성인의 체격을 가지고서, 머저리들을 졸개로 거느리는 머저리보다 더한 머저리.

선수를 뺏긴 소년은 억울한 마음을 다스리며 관목 사이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저 자식만 비키면 말 걸어야지. 그때까지 아우렌바흐가 안 와야 할 텐데.’

그때였다. 게이블스의 손이 갑자기 작은 빛의 가녀린 어깨를 덥석 쥐더니, 억지로 일으키는 게 아닌가!

저러면 안 되는데. 작은 빛께서는, 작은 빛께서는…. 신성력이.

소년은 초조해졌다.

그런데 심지어, 게이블스가 무도하게도 제 손에 신성력을 불어넣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작은 빛께서는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셨지만 그렇지 못할 게 빤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마법을 썼다.

“…으악!”

사람을 상대로 처음, 마법을 쓴 거였다.

그렇게 게이블스를 움직이지 못하게 속박해 두고서야, 소년은 간신히 작은 빛의 앞에 나설 마음을 먹었다.

안경을 벗어 손에 쥐고서, 떨리는 마음으로.

작은 빛은 몇 년 전 그날과 마찬가지로 놀라지 않았다. 그저 무감하게, 파란 눈이나 갈색 눈이나 회색 눈을 대하듯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의 명치께가 간질거렸다.

“너, 혹시….”

“전하…시죠?”

며칠 만에 내는 목소린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 목 졸린 염소처럼 울렸지만, 소년은 창피하단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순서를 뺏기고 말았네요.”

제가 더 먼저 말 걸고 싶었는데요.

이 순간을, 저는 10년도 더 넘게 기다렸는데요.

하지만 소년은 뒤따르는 말을 삼켰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그런 말까지는 하면 안 되는 것 정도는 알았던 것이다.

이제 뭐라고 하지…. 소년이 다음 말을 고를 때였다.

“전하! 어디 계세요?”

…그 거슬리는 아우렌바흐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쳇.’

낭패감 비슷한 게 일었지만, 괜찮았다. 여전히 제 저주받은 체질에 대해 관대하심을 알았으니, 다음에는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그땐 고마웠다고 꼭 말해야지.

소년은 순순히 윌로우 게이블스를 데리고 사라져 주었다. 기다림은 익숙했고 아쉬움은 잘 모르는 감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작은 빛을 볼 수 없었다.

“하하, 저희 둘째 말입니까? 아카데미 진도를 영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아, 보충 수업을 받을 겸 기숙사에 남아 있으라고 한 참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외삼촌은 그를 더 이상 황궁 연회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게 그가 아카데미를 빨리 벗어나기 위해 매번 수석을 차지했기 때문임을, 너무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소년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내 불행했다.

그러는 사이 작은 빛과의 모든 일이 다 아스라해졌다. 온기가 보듬어주던 밤도, 제 빨간 눈을 보고도 의연했던 작은 빛의 얼굴도 다 제 망상이며 꿈속의 일이 아닌가 싶어진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차곡차곡 삶에 절망하고 있었다.

신성력을 봉인해 두었지만 여전히 타인과 닿는 건 힘들었다.

의형은 서대륙으로 유학 가고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둔 여론이 바뀌는 법이 없어 소년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내 외톨이였다.

윌로우 게이블스를 처분하는 일로 말을 섞게 된 율리안 겔프와 이따금 어울리기야 했지만….

이미 절망한 소년의 마음을 되돌리기에 그 위로는 너무 작았다.

소원대로 아카데미를 5년 만에 조기 졸업한 소년은, 청년의 기미가 떠오르기 시작한 소년 루시페우스는 제 체질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 현자의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죽을 셈이었다.

“엄마의 신성력을 물려받았다고?”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노파가 말했다. 본대륙에서는 볼 일 없는 까무잡잡한 살갗 한가운데 새까만 눈동자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구 같았다.

루시페우스는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마주 앉은 채 양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기한 일이었어. 처음 듣는 일이었고. 네 어미가 너를 목숨같이 아꼈나 봐.”

“그런가요.”

목숨같이 아낀다라. 루시페우스는 살면서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라곤,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죽어가던 어머니의 모습뿐이었으니까.

아끼셨다면 함께 데려가시지, 왜 죽지도 못하게 이렇게 많은 신성력을 주셨나.

신성력을 봉인해 두었대도 어머니의 신성력은 끈질기게 그를 지켰다.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덜 다쳤고, 다치더라도 훨씬 빨리 회복했다.

그의 바람과 무관하게.

그가 죽을 시도를 해본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죽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 게 뻔했다.

“뭐, 간단해.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거지.”

“돌려준다고요? 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니까요.”

노파는 클클 웃었다.

현자의 대륙, 동대륙에서 루시페우스는 수많은 현자를 만났다.

학식으로 현자가 된 이, 영적으로 경지에 다다른 이, 신성력이 거대해 현자가 된 이, 본대륙에서는 마녀라 불렸을 이.

노파는 스스로를 샤먼이라고 했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이라고.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영에 깃든 거야. 죽은 이의 영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 사람이 있는 곳이고 말이야.”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가장 생각하기 쉬운 건 무덤이지. 게다가 네 엄마는 너를 낳은 데서 죽었고 또 거기에 묻혔다며?”

“…그런데 그게 어딘지 정확히 모릅니다.”

루시페우스가 침통한 낯을 지었다.

동대륙에서 헤맨 지 벌써 두 해, 소년은 어느새 완연한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있어 봐.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줄게.”

노파는 껄껄 웃더니 방에 들어가 작은 주머니를 하나 가져왔다.

그 주머니를 뒤집어 털자 툭, 낡은 나침반이 나왔다.

바늘이 고정된 위로 유리판 한가운데에 홈이 패어 있었다.

“혈연의 위치를 찾는 거야.”

“마도구인가요?”

“뭐, 너희들 말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

하긴, 샤먼이 만든 것이니 마도구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여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넣으면, 가장 가까이 있는 혈연의 위치를 찾아줘.”

노파가 주니 받아들긴 했지만, 루시페우스는 영 미심쩍은 낯을 했다.

“어휴, 그래. 네가 그때도 안 믿었는데 지금이라고. 얘, 리타야!”

왜 아까부터 저를 한번 만났던 것처럼 말하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노파의 외침에 노파의 딸이 들어왔다. 아버지의 유전자는 힘을 못 썼는지 얼굴이 노파의 판박이였다.

“왜 부르셨어요?”

“있어 봐라.”

노파는 다짜고짜 제 딸을 문가에 세워두고서, 제 손가락을 깍 깨물어 나침반의 홈에 제 피를 흘려 넣었다. 이내 나침반에서 빛이 은은하게 나더니.

“봤지?”

루시페우스는 얼떨떨한 낯으로 나침반을 받아 들었다. 그 나침반의 바늘이 리타, 노파의 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침반을 움직여봐도 바늘은 리타에게 붙박인 채 미동도 없었다.

그의 낯에 어린 것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라, 노파는 낄낄 웃으며 같은 일을 제 딸의 피로도 해주었다.

리타의 피가 깃들자 나침반이 노파를 가리켰다.

“배꼽에 한번 가 봐.”

루시페우스가 행장을 꾸려 노파의 집을 나서려던 때였다.

어쩌다 보니 열흘이나 머물러 여정이 퍽 지체된 참이었다.

노파가 지금껏 그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그를 편하게, 그러니까 특별할 것 없이 대해준 덕분이었다.

그게 아쉬워 떠나지 않기에는, 루시페우스는 이미 타인의 온정에 가치를 두지 않은 지 오래였지만.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타인의 온정은 꿈결처럼 잊히고 말았으니까.

“배꼽요?”

“여기 중부에 있는 평원인데, 우리는 거기를 세상의 중심이라 해서 배꼽이라 불러. 너는 거기에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다.”

“제가요? 왜….”

“가보면 알아. 내가 너를 처음 봤으면 이런 것도 안 알려줘.”

처음 본 것 맞는데요. 루시페우스는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노파의 기색이 너무도 단호하여 더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