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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15화 (115/220)

115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7)

“전하, 험한 것 보지 마세요.”

온기를 따라온 듯한 다른 평범한 인기척이 저에 대한 적의를 풍겼다.

아, 또인가….

조금 잦아들었던 울렁거림이 스멀스멀 부피를 키웠다.

“기사님들 시켜서 경비대에 신고하고, 우리는 이만 가요.”

“잠깐만.”

…정말 그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고막을 울린 적은 없었지만, 아이는 온기의 목소리를 알았다.

“아파하는 것 같은데….”

아이는 다급해졌다.

보고 싶은데. 그러고서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아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속의 혼란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아, 하아…. 끄으…. 허억, 헉.”

신음이나 간신히 흘렸지만, 아이는 열심히 싸웠다. 제발, 말 좀 들어, 진정 좀 해!

그러는 사이 온기가 가까워져 왔다.

아직 안 되는데. 지금 너무 꼴사나운데. 닿으면 안 되는데.

아플 텐데.

“저기, 얘. 괜찮니? 응?”

어?

이상했다. 온기가 손을 내뻗어 저를 슬슬 흔들었는데….

다른 이들과 달리 저를 만짐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고.

“얘, 괜찮아?”

이상하게, 도리어 제 몸 안의 괴로움이 잦아들었다.

마치 온기가 저를 진정시켜준 것처럼.

“얘, 괜찮아? 정신 차려봐.”

“으흐, 하아….”

아이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어찌 된 건지 몰랐지만, 온기가 저를 토닥여준 때부터 모든 게 괜찮아졌다.

아이는 토해내듯 밀린 숨을 내쉬었다.

“얘, 괜찮아?”

“아가씨, 잠시만요.”

아까부터 온기를 만류하던 여인이 갑작스레 아이에게 다가왔다. 아이의 어깨를 잡고는 몸을 돌려….

어깨를 잡았다고?

난생처음 겪은 일에 혼란스러워한 것도 잠시.

아이는 재빨리 눈을 손으로 덮었다.

안 돼, 이 눈을 보면 다들 싫어한단 말이야.

오늘도 몇 번이고 험한 소리를 들은 차였다.

하지만, 그렇지만,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으….”

아이는 손가락을 조금 벌려 보았다.

아주 조금, 작은 틈만 있으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따금 골방의 열쇠 구멍으로 바깥을 살피던 것처럼.

아이는 손가락 틈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그 소녀, 저를 위로해주던 온기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 조금 흐리게 보였지만….

아이가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눈에 힘을 줄 때였다.

“헉.”

절그럭.

온기와 동행한 어른들이 놀라는 소리가 났다.

아, 보이고 말았어….

그렇다면 온기도 실망할 텐데.

그리 생각하는데, 이상했다.

소녀의 낯이 흐리게 보여서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질색한다거나 겁먹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무감한 눈빛은 아이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를 알비누스에까지 데려다주었던 어머니의 옛 동료의 눈빛도 그랬던 것 같긴 하지만…. 그야 아기 때부터 오래간 봐왔으니 익숙해진 거였을 터.

저를 처음 보는 사람 중에는 처음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나? 내가 징그럽지 않나? 욕하지 않나?

오히려 한편으로, 소녀의 표정은… 조금 슬픈 듯도 했다.

슬프다고?

아이는 재빨리 제 눈을 가렸다. 이상했다. 그래, 그런 반응은 이상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얼른 가세요. 저를 그렇게 보시니까, 왠지…. 지난 9년간 겪은 취급이 대번에 다 서러워지고 말아서.

그때껏 괜찮다고 생각했던 게 실은 안 괜찮았다는 걸 새삼 깨달을 것 같아서.

울 것만 같아서.

아니, 제가 먼저 떠나는 게 나았다. 아이는 얼른 몸을 일으켜, 제가 쓰러지며 손에서 놓쳤던 안경을 찾아 쥐었다.

안경을 재빨리 끼고, 골목 밖으로 나가면 된다.

그렇게 다짐하고서 빙글 돌아선 순간.

아이의 야심 찬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너, 혹시….”

“아가씨!”

소녀의 작은 손이 더 작은 아이의 팔뚝을 덥석, 쥔 것이었다.

아이는 다시금 충격받았다. 저를 잡다니?

게다가… 이 눈이 징그럽지도 않나?

아이는 눈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소녀를 돌아보았다.

“너, 이름이 뭐니? 혹시….”

아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이야,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어줬다는 거창하게도 긴 이름이. 전혀 입에 익지 않은, 아무에게도 불려본 적 없는 이름이.

다른 사람이 아이를 부를 때 쓰는 말이란… 야, 이 새끼, 너, 이거, 이놈, 악마의 자식, 뭐 그런 건데.

아이는 아무 말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답할 수 없는 곤란함은 이상한 억하심정으로 튀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하지?

도와줬는데 그냥 가서 질책하려는 건가? 가주님께 따져 물으려고?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일단….

“사례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이는 재빨리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 버렸다.

고맙다는 말을 이번에도 하지 못한 건, 후작저로 하릴없이 돌아가 후작에게 잔뜩 혼난 뒤에야 알았다.

고맙다고 하지 않은 게 괘씸했을까.

온기는 한동안 아이를 찾지 않았다.

‘아닌 척했지만, 역시 징그러웠겠지….’

그리 쉽게 체념하고 넘어갈 정도로, 외로움이란 이제 아이에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온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은 3년이 지나 아이가 소년 비스름한 무언가가 되어가던 어느 날.

마탑에서 거절되어 돌아온 날이었다.

처음으로 가출한 날 겪은 이상 증세는 그때부터 이따금 아이를 덮쳤다.

아이는 그 이후로 몇 번 더 가출을 감행했고 번번이 다시 후작저에 돌아왔는데, 그것이 거듭될수록 이상 증세가 날로 심해져갔다.

아이가 악마 들린 것인지 판별하겠다며 후작은 평소 후작저를 자주 드나드는 신관에게 처음으로 아이를 공개했다.

“이건…. 혹시 아이가 세례를 안 받았습니까?”

“제 어미가 성기사니까 저들끼리 뭘 했겠지. 호적에 등록할 때 신전에서 별말 없었던 걸 보면. 왜?”

“…일단 신성력부터가 웬만한 신관급 이상입니다.”

“그럴 수 있지. 제 어미가 성기사였는데.”

“그런데 마력도 많아요.”

“마력?”

“제가 이렇게 거대한 마력은 처음 봤습니다. 마법사들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그게 사실이야?”

“제가 공께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는 아쉽게도 악마 들린 것이 아니라, 신성력과 마력 모두가 일반인 수준을 뛰어넘는 탓에 조금만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면 두 재질이 부딪힌다는 거였다.

후작은 거기서 냉큼 제게 편한 말만을 골라, 마력이 많다는 핑계로 아이를 마탑에 보내버렸다.

체면 때문에 조카를 버리지도 못하던 후작은 앓던 이 빠진 양 속 시원해했고, 후작의 아들은 놀잇감이 사라져서 아쉬워했다.

소년은, 후작저를 떠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다.

가슴속의 작은 간지러움을 그리 표현하는 게 맞는다면.

하지만….

“네 마력이 불순해서 너를 마탑에 받아들일 수 없겠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아이는 마탑에서 거절당했다. 아이가 가진 마력을 살피겠다며 이런저런 탐색을 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빨간 눈을 들킨 것도 아니었는데.

말 잘 들을게요, 그렇게 빌고 싶었지만 그런 건 아이의 몫인 적이 없었다. 아이는 빠르게 체념했다.

어쩔 수 없이, 갈 데가 없어,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후작저로 돌아왔다.

“도망치려 하더니, 꼴좋다.”

후계자의 한마디를 들은 사용인들은 소년이 쓰던 골방에 짐 가방을 대충 던져두는 것으로 소년의 귀환을 조롱했다.

마탑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소년은 희망이라는 것을 품게 되었다.

희망은 몇 주간 소년의 마음을 두둥실 떠오르게 만들었고, 마탑에서 거부당한 그 순간 소년의 마음은 거기서 곤두박질쳤다.

희망이란 걸 갖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슬프지도 않았을 텐데.

그날 밤 소년은 하염없이 울었다.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참아온 울음이었다.

울어봤자 아무도 오지 않아 기왕이면 터뜨리지 않던 울음이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온기에게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참기 시작한 울음이었다.

그렇게, 소년이 몇 년을 참은 울음을 펼쳐내자 거짓말처럼… 온기, 그 소녀가 찾아왔다.

이렇게 바보같이 울고 있을 때. 멍청하게 울고 있을 때.

온기는 더 이상 예전처럼 아이를 위로해 주지도 보듬어 주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아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얼굴을 한번 봐서일까? 흐릿한 기억이지만 아이는 보닛 쓴 소녀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왜 울어?’

그렇게 물어봐 주었던 것도 같았다.

이런 비참한 때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고 벅찼지만…. 소년은 온기가 제 곁에 머무르는 내내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애써 끕끕대며 참아봤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도, 소년은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다.

마탑에 가지 못한 소년은 후작의 체면을 위해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었다.

법적으로는 어쨌든 양자였으니까.

그 체면 덕분에, 소년은 아카데미에 가기 직전이나마 황궁 연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제 의형은 어릴 때부터 따라다닌 곳이었다.

거기서 소년은 온기를 다시 만났다.

‘…요정인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온기가 더는 찾아주지 않는 밤을 굽어살피던 달빛이 사람이라면, 꼭 저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소년은 멀리서 바라본 막내 황녀의 모습에 홀린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메랄드에 황금을 섞었다는 황실의 보석은 멀리서 봐도 찬란했고, 다른 황족들 모두 진 은사래도 그녀의 것만큼은 정말 달빛처럼 빛났다.

그러다 딱 한 번, 막내 황녀가 이쪽에 시선을 던졌다. 훔쳐보다 들킨 꼴이라, 소년은 절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녀가 저 같은 것에 시선을 둘 리가 없는데.

그저, 만인에게 사랑받는 자로서 만인에게 공평한 시선을 던진 것뿐인데.

다시 흘끗 쳐다본 막내 황녀는 어느새 시선을 다른 곳으로 거둔 채였다.

후회스러웠다.

그 어느 한편으로 조금도 치우치지 않은 얼굴을 올바로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저 여자애가 나를 부마로 만들어줄 거야. 더러운 눈 떼.”

그걸 알아차린 의형이 비아냥거렸으나, 소년은 막내 황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가까이 왔을 때. 소년은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따뜻해.’

그 온기였다. 얼굴은 달랐지만, 제 빨간 눈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던 소녀가 맞았다.

‘그때도 저렇게 반짝였는데.’

막내 황녀의 목에 달린 초커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보통 사람들이 전신이 은은하게 빛난다면, 막내 황녀는 그곳만이 작고도 쨍하게 빛났다.

그것마저 특별하여, 막내 황녀는 소년에게 작은 빛이 되었다.

그처럼 마력이나 신성력을 풍족하게 타고나야만 타인의 재질을 눈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는 일이었지만.

폭주했던 그를 진정시켜준 온기 역시, 그런 작은 빛을 지니고 있었다.

‘막내 황녀님이 온기였던 거야…!’

후작이 체면 차리는 외삼촌이어서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머리도 깔끔히 깎고 단정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니까. 후작저에서처럼 하고 있었다면 창피했을 텐데.

반가운 마음에 시선을 뗄 수 없었지만 온기는, 작은 빛은, 막내 황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자신이 온기의 얼굴을 몰랐듯 그녀도 저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 모든 게 저만의 공상이었던 걸까?

그런 그를 어찌 알아차리고 의형이 비아냥댔을 땐, 소년은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너무 들뜨진 말면 좋겠다. 너는 반쪽도 아니고 반의반 쪽 아니니?”

그 소리를 듣고 소녀가 저를 돌아봤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온전히 저를 향한 그 순간. 소년은 심장을 물들이는 황홀함을 느꼈다.

제 온기. 제 작은 빛.

제 삶의 위로, 희망, 구원.

소년은 정말로, 진실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날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 밤의 위로들이 모조리 저만의 추억이라도, 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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