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13화 (113/220)

113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5)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퍽 거칠게 울렸다. 그의 어깨가 숨소리에 맞추어 들썩였다.

“말했잖느냐, 너를 도와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납치하기로 해놓고 작전을 그르치려는 듯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그런데 지금 아멜리인 줄 아는 나를 왜 공격하는데? 아멜리가 알비누스에 필요하다면 힐베르크와의 협상 카드로 쓰려는 걸 텐데….’

이치에 맞지 않았다. 굳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지킬 필요가 없다지만, 반대로 굳이 다치게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이건 마치….’

그저 루시페우스를 괴롭히기 위한 것 같지 않은가.

그때, 도미닉의 말소리가 빈정거리듯 울렸다. 마치 내 추측이 맞음을 확인해 주듯이….

“뭐, 어디 한번 안 죽게 잘 지켜보렴. 네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그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

그 일? 그게 알비누스 부자와의 약속과 연관된 건가…?

한데 그 말소리는… 그래, 내가 루시페우스의 꿈속에 찾아들던 시절, 어린 루시페우스에게 던지던 악담과 같은 온도였다.

‘정말로, 그저 루시페우스를 괴롭히기 위해….’

아니, 근데 지금 뭐라고? 안 죽게 잘 지켜…?

새로운 정보가 너무 많아, 생각이 이리저리 튈 무렵이었다.

“너는 악마의 자식이니 뭐, 별거 아니겠지.”

꽈르르릉, 그때 지반 너머 저 깊은 곳부터 파열음이 났다. 아니, 그 소리는 한편으로 이 저택을 둘러싼 것도 같았다.

내가 딛고 선 대리석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전하!”

“아잇, 젠장…! 이 새끼들아, 좀 맞아봐!”

“경! 부디!”

마검사들에게 등을 보일 수 없어, 내 기사들은 그들과 싸우면서 이편을 향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투둑, 툭, 툭, 건물에 쩌저적 난 실금을 따라 건물이 부서지며 돌 조각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건물을 붕괴시키려고…?

“…경!”

나는 속절없이 루시페우스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그의 재킷을 쥐어뜯을 듯 거세게 그러쥐었다.

이런 때 신뢰할 수 있는 그니까.

그를 신뢰하지 않은 적, 사실은 없었으니까.

루시페우스가 크게 팔을 휘둘렀다. 반동이 내게까지 전해지는 게, 그치고 격한 움직임이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들이 뚝 멎었다.

“…전하, 라고?”

그때, 도미닉의 중얼거리는 듯한 말소리가 기묘하게도 선명히 귀에 날아와 꽂혔다.

아. 아까 기사들이 다급하여 나를 부른 것을 듣고서….

“거기, 전하…십니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는지, 그의 목소리가 훨씬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쿠르르…쿠르르…. 여전히 땅속이 울리는 가운데 잠시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인 걸 밝히는 게 나은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본다면? 나와 아멜리의 관계를 밝혀도 괜찮을까? 게이블스의 일도 그렇고, 이제 막 시작인데? 최대한 버티는 게 나을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따지느라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과부하에 내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어?’

깜빡. 별안간 시야가 점멸하더니… 눈앞에 도미닉이 보였다.

나는 여전히 루시페우스의 등 뒤에 숨어 있는데…?

내 기사들과 마검사들이 대치하고 있는 후원을 배경으로 한 모습이었다.

이내 사라진 그 상은, 마치 루시페우스의 시야… 같았다.

“동생아. 네가 요망한 짓을 저지른 거니?”

“…왜 이러십니까.”

루시페우스는 숫제 어깻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동요하는 건 어른이 된 뒤 처음 보는 거였다.

‘아, 또.’

다시금 시야가 몇 번 점멸하더니 도미닉이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내’ 시야.

이거 설마.

“네가 네 형수가 될 분과 감히 밀회한 것이 아니라면, 그저 한번. 비켜서면 될 일 아니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쩌적, 끼기긱…. 나직한 파열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루시페우스가 멎게 해두었던 것이 가속된 모양이었다.

“모르겠으면 알게 해주지.”

“꺄악!”

갑자기 발밑이 출렁였다. 중심을 잃어버린 나는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엎어지고 만 내 다리에 크나큰 둔통이 일었다.

지반의 충격에 대리석 타일이 제멋대로 부서져, 뾰족한 모서리들이 바닥을 짚은 손이며 다리에 찍혀 들었다.

그리고 후드 속에 넣어두었던 머리칼이 사르르 흘러내리자.

“헉.”

도미닉이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그와 대치 중이던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내 쪽을 확인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다시 깜빡, 그가 내려다보는 듯한 내 모습이 뇌리에 스쳤으니까.

그 순간, 진한 열기가 풍겼다.

“윽.”

“으아악!”

“크억.”

무음의 파동이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무슨 연유인지 내 기사들과 맞붙고 있던 마검사들이 저마다 나자빠졌다. 거품을 물고 쓰러지거나 구토하는 이도 있었다.

‘…마법?’

그대로 루시페우스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카가가각, 반복적인 파열음이 나더니….

“맙소사.”

응접실의 윗부분이, 그러니까 3층짜리 별채의 한 귀퉁이가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더 이상 무너져내릴 것이 없게 된 순간.

쿵. 저 멀리 검은 숲 어디선가 둔중한 굉음이 울렸다. 거목이 부러지고 날짐승들이 푸드덕대는 소리가 났다.

한편으로 지면 아래 깊은 곳에서 울리던 소리도 천천히 멎어 들고 있었다.

밤하늘 별빛이 찬란했다.

“괜찮으십니까?”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뒤돌아 내 앞에 양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에게서 열기가 훅 끼쳤다.

나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얼굴에 절망을 한가득 담고서 나를 살폈다.

내 신변에 무슨 이상이 생긴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깊이 고통받는 것처럼….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아팠지만, 무릎이 깨진 것 같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경, 잠시.”

내가 손을 들어 루시페우스의 얼굴을 물렸다. 깨진 대리석 조각에 찍혀 피가 난 손바닥을 뒤집어 그에게 보이지 않게 한 채였다.

어제 내 손을 벨 때도 그렇고, 왠지 그가 나의 안전에 과민한 듯해서였다.

그가 순순히 상체를 물리자 도미닉의 신형이 드러났다.

도미닉의 낯은 희게 질려 있었다.

부마니 뭐니 뻔뻔하게 말하고 다닌 것치고, 나인지 확인하겠다며 나를 넘어뜨린 것치고 참 담도 작았다.

하, 나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후드를 걷어 내렸다.

“이렇게 다시 보네. 개인적으로 뵙자고 청하더니, 이런 방식을 말한 모양이지?”

“저, 전하, 그게….”

태양절 연회 때나 산책길에서 들러붙었을 때 태연자약하던 것과 현저히 다른 기색이었다.

“뭔진 몰라도, 이 무례.”

나는 최대한으로 위엄을 돋우고서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까지 루시페우스에게 매달려 덜덜 떤 사람은 누구였냐는 양, 고고하고도 차분하게.

“확실히 해명해야 할 거야.”

“…….”

정말로 나일 거라고 생각지 못한 건가?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황족의 몸에 위해를 가했다.

나는 윌로우 놈의 일이 생각나 비릿하게 웃었다.

똑같은 것들.

“저, 용서를….”

도미닉은 숫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렇게 당당하던 것치고는 퍽 초라한 반응이었다.

‘지금 머리 굴릴 여유가 없겠지.’

그저 루시페우스를 괴롭히고 싶었을 뿐인데 망신살이 뻗쳤다 생각하는 게 빤했다.

나는 부러 당당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릎이 아리고 쓰렸지만 아닌 척쯤은 쉬웠다.

“저, 전하….”

루시페우스가 놀란 낯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지만, 나는 팔짱을 끼며 손을 감출 뿐이었다.

‘윽.’

순간 눈앞이 명멸하며, 드레스 자락이 잔뜩 찢어진 내 무릎이 보였다. 찢어진 옷자락에 피가 송송 배어 있었다.

뒤이어 정강이로, 피가 흐르는 발목으로, 또 다친 손을 감춰둔 내 팔짱 쪽으로. 몇 컷의 스냅사진처럼 다양한 상이 시야를 스쳤다.

또, 그의 시선….

나는 그에 괘념치 않고서 도미닉을 노려보며 말했다.

“용서를 바란다면 지금 물러나주면 좋겠는데.”

“예?”

도미닉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눈을 희번덕였다.

“당장 꺼지라고.”

세실리아의 얼굴과 냉엄한 분노는 어울리지 않지만, 황실 직계로서 몸에 밴 위엄이 한몫할 거였다.

“아, 그게, 저.”

도미닉이 몸 둘 바 몰라 하는 게 선연했다.

변명을 하고도 싶을 것이고,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도 싶을 것이다.

“동생과 우애가 퍽 돈독해서 발이 안 떨어지나 보지?”

“…….”

“그 우애, 내가 폐하께 고하면 참 재미있을 텐데.”

“과, 관용을….”

“베풀기를 바라면 일단 내가 말한 대로 해야지.”

도미닉의 아래턱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이를 빠드득 가는 모양새였다.

“자, 얼른.”

나는 간략하게 턱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그대로 뒤돌아 마검사들 쪽으로 갔다. 바닥에서 꿈틀대던 그들이 서로를 수습하고는, 마법을 썼는지 차례대로 다 사라졌다.

그들이 모조리 떠난 것을 확인한 나는.

“…하아.”

한숨과 함께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아 버렸다. 있는 위엄, 없는 위엄 다 끌어낸 것이 퍽 심력을 소모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다치셨어요?”

마검사들과 대적하던 케인과 엘런이 재빨리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아, 아파, 아파. 죽겠어어.”

나는 부러 엄살 부리는 척했다. 진짜로 아픈 건 맞지만….

“나 이제 못 움직이니까 경들이 업어야 돼.”

“아잇, 진짜. 그래서 이런 작전 하지 말자고 그랬잖아요.”

“다음부턴 항명할 겁니다.”

은신한다고 응급 키트도 못 가져왔는데, 두 소대장이 투덜대었다. 내가 과장하여 앓는 소리를 내자 차라리 분위기가 풀어졌다.

“결과적으로 별일 없었잖아?”

“그거야….”

그리 대답하며 엘런의 눈동자가 스르르, 루시페우스 쪽으로 향했다.

그 덕분이라는 뜻일 터인데.

한데, 그는 어째서인지 처음 내가 넘어졌을 때 주저앉은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방금도 어떻게든 나를 부축했을 건데.

“경, 괜찮아?”

“아프시다고요.”

“으응? 아니, 그게….”

루시페우스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본디 그의 얼굴은 하얀 편에 속했지만, 지금은 핏기가 아예 날아간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로 손을 뻗다가….

‘아차.’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놀란 듯 내 손바닥에 붙박였다. 아까 상처가 크게 났는데….

“아, 그게.”

다 괜찮아, 그리 말하려고 했는데.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재빨리 손을 물렸지만, 그 잔상에 사로잡힌 듯 거기에 고정된 시선은 움직이지 못했다.

‘읏, 또.’

시야가 자꾸만 뒤바뀌었다. 초점을 잃은 듯 흐릿하게 보이는 내 쪽의 풍경이 뇌리에 몇 번이고 깜빡였다.

“경, 괜찮아?”

“네, 저, 그게.”

아무리 그래도 안색이 너무 창백했다.

바닥을 짚고서 몸을 기울여,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을 때.

쿠르르릉….

“꺅.”

멎은 줄 알았던 땅속 깊은 곳의 울림에, 갑작스레 내가 짚었던 바닥이 출렁였다. 바닥을 헛짚을 뻔했으나 다행히 꼴사납게 엎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루시페우스의 상태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저, 죄송합니, 아, 그게, 제가… 잠시 방심을.”

“괜찮아, 경?”

그는 내 쪽에 시선을 고정하지도 못한 채 무언가에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낯에 스친 감정이 정확히 무엇일지, 그에게로 바싹 다가가 보았는데….

‘뜨거워!’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열기가 훅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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