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4)
여전히 고개를 반짝 치켜들고 있던 세실리아는, 당황한 낯을 짓고 있다가….
그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
황실의 보석에 비치던 제 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아, 루시페우스는 면죄부를 얻은 것 같았다.
워낙에 다정한 분이시니 이 정도는….
저를 끝내 저버리지 못하신 이 다정함을 조금이나마 더 허락하신다면.
다소곳이 다물린 눈꺼풀을 따라 빼곡한 은빛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그 떨림에, 루시페우스는 심장이 간지럽혀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개가 세실리아의 오똑한 코에 걸리지 않도록 조금 기울어졌을 무렵이었다.
쾅!
콰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응접실의 벽면과 창가가 무너져 내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폭음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루시페우스의 얼굴, 너무도 가까운 간격. 내가 뭘 하려던 건지 창피해할 틈도 없이….
“뭐, 뭐야?”
채채채챙그랑!
당황한 그의 얼굴 너머로 응접실의 유리창이 부서지고 있었다.
루시페우스는 말없이, 하지만 재빠르게 내 머리를 제 가슴팍에 묻어 보호하듯이 감쌌다. 그의 손이 불꽃놀이를 보러 갔을 때처럼 다급히 움직였다.
‘결계?’
이윽고 귀를 먹먹하게 울리던 굉음이 잦아들었다. 어슴푸레한 정적에 어디서 울리는 건지 모를 고동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게, 놀라서 그럴 상황이기야 했지만….
“로즈버리 아가씨가 빤히 자기 쪽으로 쓰러지시는데 직접 품으로 받으면 될 것을, 굳이 마법을 쓰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전하가 아니라 로즈버리 아가씨였으면 마법을 썼을걸요?”
이 난리통에 떠오르는 리나의 말소리.
아, 그러니까, 그게 다 그랬던 건데.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진 머리통을 더욱 깊이 묻었다. 내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심장도 거세게 두근대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하도 놀랄 만하니 심장이 뛸 법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눙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실은 그도 나를.
나를….
‘…그래도 되는 건가?’
그의 앞섶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어, 어?”
적막을 뚫고 날아든 목소리. 응접실 안팎에서 은신하고 있던 2소대의 기사들이었다.
‘얘들이 왜…!’
예상치 못한 상대의 정체에, 나는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을 순간적으로 밀쳐내고 말았다.
얼핏 본 그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어 있었다.
그렇겠지, 여길 공격한 게 내 기사들이라니….
“뭐야, 왜 그랬어…?”
“왜…라뇨?”
엘런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와 콤비를 맞춰 등장한 로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복면과 두건을 써서 눈만 빼꼼 보였지만, 광대며 입술이 실룩거리고 있음이 보지 않아도 선연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럴 때가 아니잖아!”
“아, 아파요, 대장!”
엘런이 이편을 향해 겨눈 검을 늦추지 않은 채 발길질하자 로니의 오금이 휘청였다.
그림자로서 나를 자주 수행하는 덕에, 나 놀리는 덴 얘가 일등이었다.
나는 변명하듯 재빨리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호출기…. 누르셨잖아요?”
“내가?”
나는 급히 내 손안을 살폈다.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손에 꼭 쥐고 있던 작은 스위치였다.
“전하께서 누르신 거 아니었어요?”
“나, 난, 딱히. 이게 울렸어?”
“하, 어쩐지.”
분위기 좋아 보였는데 왜 호출하시나 했다, 엘런이 그리 읊조리며 눈을 굴리는 게, 아, 얘네 다 봤지 참….
예전에 글렌치아 공작저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누른 모양인… 듯했다.
그 직전의 상황 하며, 잔뜩 긴장한 루시페우스의 낯 하며, 내 기사들의 황당해하는 눈빛까지….
‘악, 쥐구멍!’
후, 루시페우스가 짧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먹먹하던 귀가 트이는 느낌이 나는 게, 결계를 해제한 모양이었다.
나는 민망하여 눈만 데구르르 굴렸다.
“그럼, 저건 경 작품인가요?”
엘런의 턱짓을 따라 루시페우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응접실의 한쪽 벽면이 파쇄되어 반쯤 무너져 있었다. 유리창이 있던 자리 아래 유리 파편들이 달빛에 번득였다.
루시페우스는 간략히 대꾸했다.
“아뇨.”
“경들이 그런 거 아니었어?”
“저흰 다 저택 내부에 있었는데요.”
“1소대는?”
“전하께서 호출기를 누르시면 저희가 먼저 진입하고 상황을 본 뒤 그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니까요. 저흰 돌입 요청 안 했어요.”
그러고 보니 응접실에 진입한 기사들은 2소대뿐이었다.
“그렇다면 저건….”
우리는 서로의 안색을 살피다가, 무너진 벽면 쪽으로 다 함께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우리가 그쪽을 쳐다보길 바라기라도 한 양 별채의 앞마당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쩍거렸다.
기사들의 무기에 반사된 달빛.
저택 밖에서 대기 중이던 1소대의 기사들이 누군가와 대치 중인 것이었다.
“누구지?”
로니의 말소리에, 기사들 몇의 시선이 루시페우스를 향했다.
“이곳에 올 만한 이는 저와 원래 함께 움직이려던 자들…뿐입니다.”
내 머리 위에서 울린 루시페우스의 대답은 나를 향해 있었다.
그를 밀쳐내기야 했지만, 여전히 그가 나를 보호하듯 반쯤 감싸 안은 채였다.
그 사실을 새삼 떠올리자니 귀까지 빨개질 뻔한 순간, 루시페우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올 수 없어? 주, 죽이기라도 했나…?
한데 그 말소리는 한편으로 조금 침통하게도 울렸다.
‘…왜지?’
나는 그의 낯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아, 아니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내 기사들이 정체불명의 인원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부서진 벽 너머를 쳐다보았다.
“저희가 가 보겠습니다.”
“전하께선 여기 잠깐 계십시오.”
엘런과 로니가 그리 말하며 루시페우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루시페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부탁한다는… 거지?
그러고서 기사들이 부서진 벽면에 다가섰을 때였다.
“윽.”
반대편에서 조명을 쪼였는지 갑작스레 엄청난 양의 빛이 각막에 내리쬐었다. 루시페우스의 손이 내 눈앞에 와 멎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하지만 빛을 가린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나를 제 그림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보살핌….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가슴이 대책 없이 떨렸다.
“…마검사?”
그때, 엘런의 목소리가 황당하다는 듯이 울렸다.
마검사라고?
마검사란 본대륙에는 없는 존재였다. 본대륙에서 마법을 쓰는 자들은 신성력이 많지 않아, 검사가 될 수 없었으니까.
본대륙의 검사들은 모두 신성력을 쓰는 성검사, 즉 성기사들뿐이었다. 그리고….
‘마검사는 마도 공학이 발달한 서대륙에나 있다는 건데.’
그리 생각하며 루시페우스의 어깨 너머로 빼꼼 바깥을 살피니, 그 날카로운 조명 덕에 그편의 풍경이 자세히 보였다.
복면을 쓴 1소대의 기사들이 한 무리의 마검사들과 대치 중이었다. 응접실에 남아 있던 2소대 기사들이 거기에 합류하는 소리가 났다.
‘서대륙의 마검사들이 여긴 왜…?’
그때였다.
“나는 내 미욱한 동생을 가르치러 온 것뿐인데. 기사님들은 누구실까….”
별채의 정원으로부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들어 왔다.
허세스러우리만치 끝을 길게 늘이는 독특한 말투.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자는.”
“…….”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루시페우스의 등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동생아. 거기, 너 맞지?”
그러니까, 도미닉 알비누스였다.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머리카락을 갈무리해 로브 안쪽으로 집어넣고 후드를 단단히 여몄다.
‘일단, 내가 여기에 개입해 있음을 숨기고 봐야지….’
루시페우스의 너른 등에 내 모습이 가려지도록, 나는 한껏 움츠리며 그에게 바싹 붙었다.
“네가 사고를 쳐서 이 형님께서 손수 네 뒷수습을 해주러 오고 말았지 않느냐.”
도미닉의 말은 그 내용만 뜯어보면 퍽 다정했지만, 그 말투는 완벽히 건조했다.
어제 루시페우스를 두고 사고뭉치 막내라고 지칭할 때처럼.
그런데, 뒷수습이라니?
‘루시페우스가 이 일을 독단으로 행한 게 아니었어? 도미닉이 얽혀 있고? 그렇다면….’
이 작전이 알비누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결론이 자못 당황스러웠다.
“뒷배 없는 여인 하나 확보하는 게 뭐 그리 어려워서 쩔쩔매고 있는 건지.”
한편, 루시페우스는 미동도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의 숨소리가 자못 거칠어져 나는 그가 화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 숨긴 게, 그 힐베르크의 반쪽이겠지.”
윽, 나는 움츠린 몸을 더욱더 움츠렸다.
걸음을 조금 더 옮겨 루시페우스의 뒤에 바싹 붙자 이마가 콩, 그의 등에 닿았다.
옷자락 너머로 그의 근육 하나하나가 긴장해 있음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펑!
꺅, 나는 비명을 삼키며 루시페우스 쪽으로 더욱 가까이 붙었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내 뒤편의 벽에 걸려 있던 램프 하나가 터졌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내 동생이 아둔하여 쉬운 길을 돌아가는 듯하니, 방법을 친히 가르쳐줄까 싶구나.”
도미닉의 느릿한 말소리가 끝마쳤을 때였다.
채챙강, 챙그랑!
다시금 파열음이 난 쪽은 내게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장식장이었다. 문과 칸막이에 쓰인 유리들과 그 안에 장식돼 있던 접시들이 터지듯이 깨졌다.
그 유리 파편이 내 종아리께에 후두둑 쏟아졌다.
“어차피 협상이 목적이니 목숨만 붙여 놓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그의 말인즉슨.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서라도 납치하면 그만이라는 거…?’
으흑, 나는 목에 치받는 두려움을 삼키며 루시페우스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옷자락 너머 그의 체온이 훅 오른 느낌이었다.
“…움직이지 마시고, 제게 붙어 계십시오.”
“이거… 마법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마법을 써?”
“저도 몰랐습니다.”
“마도구는 아니고?”
내게 테오도르가 선물해준 수많은 일회용 마도구처럼 말이다.
“뭔가 매개가 있는 것 같은데, 마탑에서 제작한 마도구와는 다른 듯합니다.”
잠자코 그편을 살피던 루시페우스가 도미닉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형님께서 어떻게.”
“말 안 듣는 사냥개가 주인을 물기 전에 주인이 먼저 혼쭐을 내야 길들일 수 있지 않겠니? 그 수준에 맞춰서 말이야.”
마치 그 말은, 루시페우스를 제어하기 위해 마법을 배웠다는 것처럼 울렸다.
‘도미닉에게 마력이 있었나?’
원작에선 어땠더라…. 결말에서야 유일하게 남은 알비누스 정도로만 언급될 뿐, 존재감이 미미했는데.
내가 그의 존재에 대해 곱씹는 사이, 루시페우스의 손이 몇 가지 움직임을 이뤘다.
도미닉이 조소했다.
“반의반 쪽답게 배움도 늦된 건지. 네가 지킬 것은 그 인질의 털끝이 아니라 우리와의 약속일 텐데.”
우리? 알비누스? 루시페우스와 알비누스 간의… 약속?
“그게 임무를 무결하게 완수하려는 네 의지일까, 아니면, 혹시 내 예비 피앙세의 말대로 네가.”
“꺄악!”
도미닉이 말을 멈춤과 동시에, 내 머리에서 가까운 쪽에 있던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촤르르, 챙강!
샹들리에의 유리 장식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가 나며 내 바로 옆에 떨어졌다. 루시페우스가 서둘러 친 결계에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결계가 없었다면 분명….’
머리를 정통으로 맞진 않았어도 어떻게든 다쳤을 거였다. 그의 옷자락을 그러쥔 손이 아프게도 곱아들어 갔다.
“반쪽끼리 끌린다고, 그 여인을 마음에 담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느낄 수 없었다. 옷자락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체열이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섰다는 것을.
마치 후미진 골목에서 쓰러져 있던 아이를 발견했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