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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11화 (111/220)

111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3)

나는 긴장감에 굳은 낯으로 엘런을 쳐다보았다. 엘런은 무언가를 감지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제가 느낄 정도면 꽤 다량의 마력이네요. 그러니까….”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전하께서 오신 걸 알았나 봐요.”

엘런의 말에는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둘 다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남자의 상에 일었던 반가움을 삼키며, 나는 애써 묵직한 불안함만을 기억하려 애썼다.

‘또 틀어지고 말았어. 이번에도 나 때문인가….’

루시페우스가 순간 이동 마법으로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어둑한 그늘 속에 여인 하나가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로브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탓에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루시페우스는 곧바로 알았다.

‘3황녀의 사랑이라 했나.’

따스하고, 아스라하고, 작은 빛.

그 온기가 대번에 느껴졌으니까.

아니, 그런 것은 다 무용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품에 안았던 누군가의 체구를 어찌 잊겠는가.

그의 눈동자가 방 안을 훑었다. 응접실에 어울리지 않는 모포와 밧줄 같은 것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다.

작전에 사용되려던 것….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루시페우스의 아래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제가 낸 잔꾀로 인해, 또 위험에 처할 뻔하셨다.

‘아직 안심하기엔 일러…. 방 안의 기척은 모두 성기사들인 모양이지만.’

아까 처리한 이들 외에 이곳에 접근하려는 이가 감지되지 않았다.

다행, 이라고 잠깐 생각한 순간. 루시페우스는 심장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걱정하고 있었다.

위험의 실마리를 제공한 제가 감히.

안도할 자격조차 없어서, 루시페우스는 제 마음에 배어난 가장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 차갑게 내뱉었다.

“또, 전하시군요.”

그것은 이 상황을 만든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또 나야. 경은 아쉽겠지만.”

세실리아의 목소리는 그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울렸다.

새침 떠는 목소리도, 능청스럽게 어떤 연기를 하는 투도 아니었다.

제가 감히 시간을 나눠 받던 때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루시페우스는 그 차이에 깊이 아쉬워하는 스스로를 발견하였다.

제가 뭐라고 그런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누구에게나 다정하신 작은 빛께서 제게만은 다정하지 않으심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목구멍에 무언가가 차오른 듯 답답해져, 루시페우스는 저도 모르게 제 목을 긁어내렸다. 늘 그를 옥죄는 넥타이가 느슨해졌다.

그럼에도 답답함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전하께서 이곳에 계신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왜 모르겠어? 경이 로즈버리 영애를 납치하려던 계획이 저지됐다는 거지. 미안하게 됐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얄밉게도 웃으셨다. 제게는 웬만해선 보여주지 않으시는 미소는, 이런 식으로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늘 옳은 그녀는 이번에도 답을 맞혔지만 그것이 온전한 정답은 아니었다.

‘…위험에 처할 뻔하셨다는 거죠.’

루시페우스는 말할 수 없는 정답을 속으로 삼켰다. 다시금 답답함이 깊어졌다.

그가 아무런 말도 빚어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거참. 실망스럽겠어?”

여전히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채로 흘러나오는, 비아냥대는 말소리.

여지없이 아팠다. 그러나 그 말을 뱉는 그녀 역시 어째선지 고통스러운 낯이었다.

루시페우스는 멀거니 세실리아를 들여다보았다. 삐딱한 미소가 걸린 그 입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가 보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세실리아는 그늘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도톰한 입술의 조붓한 능선이 달빛에 도드라졌다.

그, 달빛이.

“어쩌나, 그래도 날 원망하진 마. 경이 연정에 미쳐서 작전이 좀 허술했던가 보지. 이번에도 헛수고하게 되었어.”

“확실히 그건 아쉬운 일이군요.”

헛수고라 생각하심이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렇겠지, 말을 삼키며 세실리아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어제 핏기가 엉망으로 비치던 입술이었다.

유스티안의 일로 괴로워하던 세실리아의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명치께가 죄책감으로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런 죄책감조차 사치일 터.

루시페우스는 부러 무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하께 번번이 틀어 막히니 제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말입니다.”

“그러게 좀 더 건강한 사랑을 하지 그랬어? 짝이 있는 이가 아니라.”

“짝이 있는 이, 말씀이십니까.”

여전히도 이어지는 오해. 즐거울 대로 생각하시길 바라며 굳이 정정하지 않았던 오해였다.

아니, 이전 생의 그라면 그리 표현될 법한 삶을 살았으니 당연한 것일까.

늘 그때의 일들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셨으니까.

“그게 가장 큰 문제잖아. 아, 물론 그 짝이 경의 정적인 레오폴트 경인 것도 문제지만 말이야.”

세실리아의 단언에 루시페우스는 속으로 엷게 웃었다. 와중에 ‘레오’가 아닌 ‘레오폴트 경’이란 울림이 달게 느껴졌다.

제 연심이 잘못된 것은 맞았다. 제가 감히 그녀를 마음에 담았으니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루시페우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전하께서는 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더군요.”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럴 자격이 없는데, 한번 가닿고 나니 속수무책이었다.

그녀가 제 발을 디뎠던 날, 이 정도의 간격은 허락했었으니까.

“황성 저잣거리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번 비밀 경매에 어떤 물품이 나오는지, 그것을 왜 귀족파에서 탐하는지.”

“그거야….”

“심지어는 게이블스 후작가의 후계 싸움이나 귀족파에서 힐베르크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말하다 보니 배어나는 감정은 서운함이었다.

오해하시게 두었다고 끝까지 오해하시는 무심함에 대해.

제게는 유일한 구원이신데도,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다정함마저 아끼시는 인색함에 대해.

“그렇게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면서….”

하지만 제 말소리가 무섭게 울렸던 걸까.

달빛 머금었던 입술을 더욱 앙다무신 게, 또 아프실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말아,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 알고 계시면서, 제 마음 정도야.

‘그래, 모르실 수도 있지….’

모르심이 더 나으리라. 저는 곧 사라질 존재고, 저의 추하고 음습한 감정은 눈치채시는 것만으로 누가 되리라.

루시페우스는 대신 제가 욕심낼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을 욕심내기로 했다.

어쨌든 이리 뵈었으니. 제게 시간을 내주신 셈 되었으니.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가, 그는 조금 더 욕심내 보기로 했다.

잇새로 물어 장갑을 벗자, 그녀만이 잡아주던 그의 손에도 달빛이 어렸다. 세실리아를 비추던 것과는 달리 한참 냉랭한 빛이었다.

세실리아의 시선이 그의 손끝에 와닿았다.

이 별것 아닌 손짓에, 제가 얼마나 저열하고 그늘진 바람을 담았는지 상상조차 못 하시겠지….

“…전하께서 친히 행차하실 것도 없으셨지 않습니까.”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그 손끝이 세실리아의 입술 아래를 깊이 눌렀다.

잇새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핏기가 도는 그 말캉한 입술의 풍경을, 루시페우스는 얼마간 멀거니 쳐다보았다.

이것도 주마등으로 스치지 않을까.

그의 망상을 힐난하듯, 세실리아는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섰다. 눈가가 발개지신 것이 무례에 분노하신 듯했다.

그녀와 닿았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손을 보며, 루시페우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글쎄,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친히 알려주고 싶었달까?”

그의 과욕을 힐난하듯, 세실리아의 입매가 비웃음을 띠었다.

“나라고 경을 만나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셨겠지.

그가 이전의 생에서 한 일을 낱낱이 아시는 분이시니, 이 자리에 제가 올 계획이 없었던 것도 알고 계셨을 거였다.

하지만 정말로 기대하지 않으셨다는 건.

아무래도, 역시.

“…그러셨다면 무의미한 일을 하셨군요.”

슬픈 일이었다.

작은 빛께서는 계속 아픈 말을 던지셨다.

“경에게나 무의미하겠지. 그리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까.”

그 레이디를 연모한다고 생각지만 않으셨더라면, 제 마음을 한번 제대로 봐주실 수 있으셨으려나.

“아, 그렇군요. 제가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하는군요.”

그 오해에 장단 맞춰드리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제 마음이 향한 곳은 제대로 봐 주셨으려나.

“그런다고 로즈버리 영애가 그대에게 마음 한 조각이라도 줄 것 같아?”

마음 한 조각을 바라는 대상이, 실은 당신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려나.

“그거 사랑 아냐. 그냥 비뚤어진 마음이야, 경. 정신 차려.”

루시페우스는 자꾸만 목구멍이 울컥하였다. 원망할 주제가 아닌데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설령 그게 사랑이어도, 경의 표현 방식도 틀려먹었어.”

비뚤어진 마음. 틀려먹은 방식.

태생부터 잘못된 존재.

‘그래. 내까짓 게 감히, 무슨 욕심을 내서….’

루시페우스는 그제야 세실리아에게 가닿았던 손을 물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세실리아의 날카로운 말들이 그의 마지막 용기마저 할퀴었다. 그는 맥없이 손을 말아쥐었다.

그때였다.

퍽, 작은 울림과 함께 가슴이 울렸다. 세실리아의 자그마한 주먹이 그의 가슴팍에 날아든 거였다.

주먹을 쥔 양도, 거기에 실린 힘도 그 무엇 하나 위력적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팠다.

그녀가 아프게 하고자 한 거였으니까.

가라앉던 마음에 파동이 일었다.

“왜 안 피해?”

그 무해한 주먹이 다시금 달려들었다.

“애먼 데 매달리지 말고…!”

“뭘 모르는 건.”

루시페우스의 손안 가득 세실리아의 가녀린 손목이 들어찼다. 닿아 있음에도 더 닿고 싶어 꾹 쥘 뻔한 걸 간신히 절제하였다.

저를 치심이야 백번이고 상관없으나, 그 손이 더 아프시리라.

“이거 놔!”

이내 세실리아가 반대편 손도 휘둘렀다. 주로 쓰지 않는 손이라 더욱 맥없이 잡히고야 말았다.

“놓으라고!”

세실리아가 손을 빼내려 양 손목을 비틀었지만… 그 말을 들어드릴 수 없었다.

저를 보길 기대하신 게 아니어도 저를 만나시고야 말았으니.

어차피 저를 미워하고 오해하신다면, 그렇다면 그러신 김에….

“뭘 모르는 건 제가 아니라.”

루시페우스가 세실리아의 손목을 쥔 손을 그대로 당겼다. 세실리아가 휘청하더니 한 걸음, 멀어졌던 만큼 다시 가까워지고 말았다.

그의 앞섶에서 세실리아의 식식대는 숨소리가 났다.

“…전하 아니십니까.”

“내가 뭘?”

세실리아가 반짝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코앞에 자리하고 만 녹금빛 눈동자에는 그만이 가득 차 있었다.

“경보다는 뭐든 잘 알아. 지금 경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도….”

“그런 걸!”

숫제 단말마였다.

“안 될 것 같은 일에 마음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생각해.”

무용한 게 맞았다.

어리석은 짓도 맞았다.

후작의 뜻대로 움직이는 일은, 결국 제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였다.

달라야만 했다.

그래야 하는데…. 세실리아를 보면, 이번 생의 비루함을 버티게 해준 작은 빛의 존재 앞에서 그는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아서.

“그런 걸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당신만 마주하면 일생의 목표가 너무도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다 털어내 버리고서 그녀만 따라다니는 천치가 되고 싶어지는데.

그러면 안 됨을 알아 제 마음에서 고이 보내 드리려 하건만, 그 존재 자체로 자꾸만 제 망상을 부추기셔서….

차라리 울고 싶었다.

작은 빛께야 그저 당황스러우실 일이라 조금도 내색할 수 없었지만.

세실리아는 당황스러운 낯으로 되물었다.

“아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표정이 허락된 적이 없어 그는 제가 어떤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몰랐다.

루시페우스가 대꾸할 수 있는 말은 적당히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하께서… 위험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실이되, 세실리아의 질문에는 맞지 않는 말.

어쨌거나 그 또한 그의 진심.

세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혹여 이렇게라도 뵐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정말로 오실 줄은….”

한번 털어놓고 난 진심에는 둑이랄 것이 없었다.

기어코 내뱉고야 말았다는 안도감, 한편으로 피어오르는 죄책감, 제가 결론지은 제 생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비참함 등 수많은 감정이 배 속에서 우글거렸다.

신성력과 마력, 그를 평생 괴롭힌 두 재질이 서로를 할퀼 듯 출렁였지만, 세실리아와 닿아 있어 그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는 느릿한 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감히 욕심을 조금 더 내본다면.

그의 고개가 작게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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