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2)
세르니타령의 검은 숲에서, 아니 그의 생을 통틀어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루시페우스는 급히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 레이디는 별채로 간 모양인데.’
아멜리가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은 걸 확인한 뒤, 오늘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 이들이 별채로 떠난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아우렌바흐 소공작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게 아닌가.’
게다가… 세실리아를 지키는 그녀의 호위 기사 그 누구도 연회장에 남아 있지 않았다.
타인에게 관심 없는 그지만, 세실리아 곁의 기사들은 모두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데.
세실리아도, 그녀를 지키는 기사도 모두 없다는 것은….
‘설마.’
루시페우스는 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떤 생각이 피어나지 못할 만큼 순식간의 결정이었다.
‘거기에 직접…?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외엔 다른 경우가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는 작은 빛이었다.
늘 예기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시고, 늘 예상외의 행동을 취하시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안 걸려들 걸 알면서도 친 함정이었다. 지난번과 제 상황이 전혀 달랐으니까.
이 일과 연관된 이들 중 그 레이디와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이가 없는 탓에, 다른 이들은 깊게 생각지 않고 수긍한 계획이었다.
도미닉이 사냥 대회에 참가해 있으니, 그에게 보일 용으로 만들어낸 상황일 뿐.
‘지금껏 모든 걸 알고 계셨던 것처럼… 이 또한 아실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본인께서 직접?
한껏 피어오른 당혹감에 머릿속에 든 생각 전부가 잔뜩 엉클어졌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컨트리 하우스의 후원에 다다랐다.
풀벌레 찌르르 우는 정원, 습기를 진하게 머금은 여름 특유의 풀 내음이 비강을 가득 채웠다. 얼마 드러낸 곳 없는 맨살에 습기가 배었다.
그리운 감각이었다.
그리움이 쌓이기에는 얼마 안 된 일이었지만, 그리운 건 그리운 거였다.
그녀를 방문할 때면 다른 곳에 눈 둘 일조차 없어 있는 줄도 몰랐던 황궁의 아름다운 정원수들. 거기서 나던 내음과 소리.
제 방에서 바라다보이는 어둑한 숲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생명의 향취.
며칠간 호사를 누리는 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감각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그녀의 은사를 해밝게 빛내던 달빛, 그가 조심스레 손 위에 올려놓은 세실리아의 손끝을 비추던 그 달빛까지.
컨트리 하우스의 후원은 그가 숨어들던 세실리아의 발코니 풍경과 같은 것 하나 없었지만, 루시페우스는 속절없이 그 시간들을 겹쳐 보고 말았다.
며칠간 그리워하는 줄도 모르고 그리워한 그 풍경 앞에서, 그는 세실리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 건 본디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급해진 루시페우스는 숫제 마법을 써서 이동했다. 걸어 봤자 1분도 되지 않을 짧은 거리였다.
“나리께서 무슨 일로?”
루시페우스의 신형이 별채의 현관에 불쑥 나타났을 때였다.
불 한 점 켜지지 않은 현관 바로 안쪽의 홀에서는 검정 일색의 활동복 차림에 복면까지 한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그가 마법을 쓰는 줄은 모르지만 워낙에 신출귀몰하신 분으로 알아서, 그의 등장을 이상하게 느끼는 이는 없었다.
“목표물은.”
“도착해 있는 것 같습니다요.”
루시페우스는 사내들을 대표하여 제게 답하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게이블스의 마부. 게이블스 후작이 알비누스 후작의 계획을 방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손까지 빌려주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루시페우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마부의 낯만 내려다보았다. 이미 몇 번 손발을 맞춰본 적 있는 마부의 낯이 의아함으로 빛났다.
시선을 그에게 고정해둔 것과 달리, 루시페우스의 신경은 전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수준급의 신성력이 하나, 둘, 셋…. 외부에서 둘러싸고 있는 것만 열인가. 그리고 저 방 안에….’
저택 안팎에 배치된 십수 명의 기사들. 이 정도의 호위를, 과하리만치 많은 호위를 몰고 다니는 이라면….
“저, 나리…?”
늘 무감하던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단단하게 일그러졌다.
루시페우스는 미간이 욱신거리는 느낌에 놀랐다. 저도 모르게 낯을 굳힌 것이었다.
그는 안경 아래로 손을 넣어 눈시울을 꾸욱 눌렀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대들은 들어가 보게.”
“예?”
“이 일은 내가 처리하겠네.”
“아니, 그래도….”
가주님껜 보고가…. 사내가 우물대며 제 근처의 동료들을 흘끗거렸다.
루시페우스의 다른 한 손이 작게 까닥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결계가 생성되었다. 말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는 거였다.
“우리 가주님께는 그대들이 잘 처신했다 보고하겠네.”
“아니, 그것이 제 마음대로….”
“일이 잘못돼도 내가 책임질 것이고.”
“저어, 그게에….”
게이블스의 마부는 쉬이 수긍의 말을 뱉지 못했다. 그의 눈초리는 연신 다른 사내들을 향했다.
세르니타의 풋맨, 앙블렌의 마부, 오겐의 짐수레꾼, 프렘린의 주방 잡일꾼….
서로 다른 가문의 하수인들로 이뤄진 일행인지라 서로가 서로의 감시역이었다.
아무리 알비누스 도련님이라도 그러시라 했다가는, 분명 상황을 전해 들은 주인 나리께 경을 칠 일이었다.
‘이 나리는 왜 나한테 물어보셔서….’
게이블스가 귀족파의 우두머리라고 으스댄 게 화근이었다. 마부는 땀만 뻘뻘 흘리며 대꾸하지 못했다.
“금화 한 개씩, 어떤가.”
“그게….”
“두 개.”
“아무리 그래도….”
“다섯 개.”
“나리, 그게, 저희 입장도….”
마부는 숫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금화 다섯 개면 석 달 치 봉급도 더 되었다. 그게 탐나지 않을 리가 없지만….
크윽, 며칠 전 가주님으로부터 맞은 등짝의 상처가 화끈대는 것 같았다.
그가 쩔쩔매는 내내 눈가만 꾹꾹 누르고 있던 루시페우스가 눈을 떴다.
반쯤 들린 안경 아래, 길게 찢어진 눈꺼풀 사이로 비친 색은 분명.
“빠, 빨간, 눈…!”
그를 마주하고 있던 사내들이 모두 소스라쳤다.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서는 숨 들이켜는 양에 루시페우스는 조소했다.
그래, 모두가 이러고 마는데.
작은 빛께서는 왜 그에조차 무감하셔서.
아니, 이런 내게마저 다정하셔서 왜.
‘이 생에, 자꾸만 다른 답이 있을 것처럼….’
그의 안경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붉게 일렁였다.
그의 시뻘건 시선이 저들을 훑자 사내들이 손에 쥔 것들을 더욱 꾸욱 쥐었다. 밧줄, 재갈, 몽둥이, 자루 등 사람을 납치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 마구잡이로 챙겨 온 것들이었다.
저 방 안에 와 있는 이를 해하기 위한 도구들.
그러니까, 감히.
루시페우스의 손이 지체 없이 그들을 향해 내뻗어졌다. 안경이 그의 콧잔등으로 미끄러져 그의 눈 색깔이 알던 것으로 돌아갔으나, 한번 돋워진 공포는 가실 줄 몰랐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사내들의 낯이 시허예졌다.
알비누스의 작은 나리께서 빨간 눈, 그러니까 악마의 후예였다니! 그렇다면 그의 입에서 떨어질 것이 악마의 언령(言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무기를 다 버리고 뒷문으로 나간다.”
사내들의 눈에 초점이 풀리더니 손에 쥐었던 것들을 덜걱, 덜그렁, 바닥에 떨구었다. 그들이 빙글 돌아 뒷문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 루시페우스는 내뻗은 손에 조금 더 큰 마력을 실었다.
“내가 온 순간부터의 일은 모두 잊고 숲으로 들어가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며, 그에 대한 변명은.”
잠잠히 그의 주문을 듣고 있던 이들의 헤벌어진 입가에서 침이 흘렀다.
그가 지금껏 후작을 위해 일하며 수십, 수백 번도 더 쓴 정신계 마법이었지만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검은 숲에 남겨둔 마수들이 날뛰어서, 라고 한다.”
너희들이 주인에게 말을 전할 수 있다면…. 말을 맺음과 동시에 그가 손을 말아쥐었다. 그들을 묶어두고 있던 연결고리가 끊어진 듯 사내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코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루시페우스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안하네.”
그로서도 정신계 마법에 이토록 과다한 마력을 쏟아부은 일은 처음이었다.
그의 마력이 정순한 만큼 덜 유해하기야 하겠으나, 숲의 마수들은 모두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냈으니 위험할 일 없겠으나, 그러나….
허공에서 멎었던 주먹이 작게 떨었다.
‘이런 것쯤이야.’
제 손이 더러워지는 것쯤이야 별일이겠는가. 태생으로 인하여서부터 짓고 만 죄를 하나 더 짓는 것뿐이었다.
이미 기울어진 저울은 작은 추 하나에 미동도 없을 것이다.
루시페우스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엘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컨트리 하우스 후원에 자리한 별채.
사냥 대회 동안 머무르는 귀족들의 사용인들을 위해 개방한 곳이었지만, 그들이 모두 제 고용주들의 처소에 가 있어 적막했다.
성인 장정 여럿이 젊은 여자애 하나 기절시켜 납치한대도, 아무도 알 수 없을 만큼.
“그냥 그림자만 보이는 건데, 뭐. 녀석들이 진입하면 그때 호출기 누를게.”
“자율 출동권 좀 주시라니까요.”
“경들은 너무 내 안전에 집착하잖아. 될 것도 안 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리 말하는 엘런의 낯에는 진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전하께서는 황실의 금지옥엽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치고 참….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 들 땐 말하는 거 아니래.”
나는 그녀의 낯에 깃든 진한 걱정이 미안해, 부러 장난스레 그리 말했다.
장난스레 말했지만, 엘런이 더는 별말 하지 않길 바라는 단호함도 실어둔 채였다.
‘내 억지에 기사들이 휘말려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내 기사들은 강하고, 믿음직스러우니까.
다 괜찮을 거였다.
내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런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전하께서 어떤 복안을 갖고 계신지는 제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요.”
엘런이 한숨을 지으며 내 로브의 깃을 여몄다.
후드가 바투 조여 신의 축복이 어렸다는 황실 특유의 눈동자가 그늘에 가릴 거였다.
내 머리칼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꼼꼼히 확인하는 듯 엘런의 눈빛이 진중했다.
“전하께서야 유스티안 전하나 다른 은사를 지신 분들을 우선시하실지 몰라도, 저희는 아닙니다.”
느릿하게 그리 말하며 엘런은 응접실 안팎을 살폈다.
응접실에서 연결되는 작은 방들과 기둥 뒤편의 그림자 진 곳, 문가 등등…. 사냥 대회 내내 그림자로 활약 중인 2소대의 기사들이 곳곳에 은신한 채였다.
불한당들이 진입할 동선을 예측하는 듯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거기에 깃든 기색은, 주군인 나를 지킴에 한 치의 소홀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는 엄정함이었다.
그걸 보자니 미안함이 물씬거려서.
“…말하는 거 아니랬지.”
나는 하나 마나 한 말만 읊조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면, 내 기사들이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더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
내게 변하지 않는 건 나를 사랑해주는 황실.
황실의 사랑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건, 내 손으로 키운 내 수하들.
그 정도면 되었다.
나는 흡족한 낯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는 엘런에게 웃듯이 말했다.
“경이 정말 많이 컸어.”
“진짜 말씀드리려던 건 그게 아니었다고요.”
엘런이 타박하듯 말하더니, 재빨리 문가로 이동했다.
“왜 그래?”
“저, 마력이 발동했습니다.”
“마력?”
분명 아멜리를 납치하러 오려는 이들은 귀족파 가문들의 사용인들이니 신성력조차 대단찮은 자들이었다.
게다가, 마력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