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루시페우스 알비누스 (1)
“그럼 세르니타의 마지막 밤, 아름다운 추억들로 장식하길 바라네.”
“아수라마수라에 무궁한 축복을!”
“한낮의 태양에 광영을!”
사냥 대회 폐막식.
올해의 그랑프리인 라타도르를 잡은 이가 없어, 우승은 고급 사냥감을 가장 많이 잡아들인 레오폴트가 차지했다.
내가 트로피를 시상해 줄 때 레오폴트의 얼굴이 어찌나 실룩대던지.
이 영광을 나의 밀리에게,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다 티 났다.
“괜히 주최 측 심기 거스르지 말고. 인사만 하고 바로 내려가, 응?”
너희 연애는 개인적으로 하라고. 나는 그에게 트로피를 건네며,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 재빨리 속삭였다.
레오폴트는 자못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납득한 눈치였다. 어쨌건 이곳은 귀족파의 안방, 그런 행동이 아멜리에게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임을 이제는 아는 거였다.
‘물론 그런 것보다도….’
두 사람이 평소처럼 행동함으로써, 아멜리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아멜리가 진짜 별채로 향한 것처럼 눈속임하려면 연회장에 있으면 안 되는데….’
레오폴트는 연회를 기대 중이라는데, 어떻게 두 사람에게 덜 미안할 수 있을까. 데이트하라고 내 응접실 빌려줄까, 거기 달빛 예쁜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단상에서 내려올 때였다.
“전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내내 정찬회도 안 오시고.”
“영애.”
오늘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착장을 선보이며 스칼렛이 내게로 다가왔다.
시녀처럼 달고 다니는 제 추종자들은 물린 채, 은밀한 이야기를 하자는 듯 부채로 입을 가리고서.
“시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기도 하고요.”
“역시 영애가 감이 좋아.”
“덕분에 제 체면이 조금 상했지만요.”
그리 말하며 스칼렛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이렇게도 자주 웃네. 능청스러운 소리도 바깥에서 다 하고.’
태양절 연회에서 렌틸 자작이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로, 스칼렛에게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그 행동에 더욱 자신감이 깃들었달까? 늘 꾸며낸 표정만 짓고 다니던 것과 달리,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내게 훨씬 더 마음을 연 듯했다.
“그래도 레오가 아까 수상하면서 그녀에게 바치네 어쩌네 하려는 거, 내가 말린 거야.”
“제가 전하 아니면 누굴 믿겠어요?”
그래, 바로 이렇게.
“지금도 내 시녀가 군소리 들을까 봐서 떼어놓고 왔고 말이야.”
“차라리 당당히 데리고 다니시는 게 그 영애에게 더 나을 텐데요.”
“어쨌든 좋은 소리 안 나올 텐데, 듣는 입장에선 힘들 수도 있으니까.”
아멜리를 납치하려는 이들을 안심시킬 겸, 귀족파 영애들의 눈총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겸. 나는 아멜리에게 양해를 구해, 아멜리를 연회장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러니까, 암조 기사로 위장시켜서 이 자리에 참석케 한 것이었다.
‘체구가 영 안 맞지만…. 레오폴트가 상 타는 모습은 봐야 하니까.’
나는 눈동자만 슬며시 돌려 기사들의 변장 모자를 쓴 채 구석에 서 있는 아멜리를 살폈다. 내 호위로 얼굴이 잘 알려진 기사들 대신, 어제 응접실에서 안면을 익힌 막내 린지와 함께라 덜 주목받을 거였다.
“영애, 음성을 변조하는 마법이 실은 아주 악질적인 세력들이 개발한 음지의 마법이라는 제보가 들어왔어. 그래서 그들을 수사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영애가 함정에 빠진 척해주면 좋겠는데….”
“어머, 그럼 변장하고 있다가 깜짝 놀래주면 재밌겠어요!”
아멜리를 대신 함정에 빠뜨릴 수는 없지만, 다른 쪽으로 양해를 구할 수야 있었다.
실리주의자인 그녀가 레오폴트와의 첫 사냥 대회 참석이라는 낭만보다 황실의 공무를 중요시해 줘서 일이 잘 풀렸다.
“그나저나, 모처럼 멀리까지 나오셨는데 방에만 계셔서 어째요?”
“그대들 노는 틈에 내가 껴서 뭐 해?”
“전하께서 자리하신 것만으로도 더 재밌었을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리 은근히 말하며 스칼렛은 부채를 살랑거렸다.
뭐지, 무슨 속셈이지? 이게 진짜 용건 같은데?
내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쳐다볼 때였다.
“요 며칠 재밌는 소문이 하나 돌고 있거든요.”
“재밌는 소문?”
“네, 알비누스의….”
또 그 소린가. 나는 절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형제 두 사람이 모두 전하께 반하고야 말았다는, 그런 흔한 염문설요.”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짜증이 치밀어, 내 말소리가 꽤 날카롭게 울렸다.
“형 되시는 분께서 전하께 못 다가가 안달이던데 말이에요.”
그리 말하는 스칼렛의 말소리가 꽤 느물거렸다.
안 그래도 태양절 연회 날 도미닉이 대놓고 내게 춤을 청해서 설마설마했는데, 어제 산책길에서 마주친 것 때문에 쐐기가 박힌 모양이었다.
그 동생의 일이야, 지금까지 암조 애들도 스칼렛도 매번 엮어대던 일이고.
그럴 때면 나는 황당하다는 듯 쏘아붙이고 말았는데.
이제 와서는, 그 말을 듣는 게 꽤….
‘아픈 데를 들쑤시네, 다들.’
심장 아래가, 또 손끝이 저릿했다.
그에 대해 별 마음이 없었을 때, 마음이 생긴 줄도 몰랐을 땐 헛소리 말라 받아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내 쪽의 상황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루시페우스는….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잇기가 어려웠다.
“믿는 거 아니지, 영애?”
“뭐, 반 정도는요?”
“다 거짓말인 거 알잖아.”
흐음, 그런가…? 평소와 다른 내 반응에, 스칼렛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내 낯을 바라보았다.
내 낯에 어떤 의도가 비치기를 바라는 듯했지만….
‘의도는 무슨. 그저 사실인걸.’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기대하는 바를 나 또한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하여, 지금 내 처지가 나를 더 슬프게 하니까.
그리 생각하니 심장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 가식을 꾸미는 대신, 자리를 떠나는 편을 택했다. 그녀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웅얼거렸다.
“연회엔 안 남아 있을 거야. 황성에서 봐.”
“에구, 많이 피곤하시구나. 쉬세요.”
스칼렛의 눈매가 좁아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담, 그런 물음을 삼키는 듯도 했다.
무슨 일, 없어서 문제였다.
도대체 왜 제가 미련 남은 듯 내게서 시선을 못 떼는지 모를 저 남자와는, 아무 일 없었다.
이전 생에서와 같이 그 레이디의 신병을 확보하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하지만 사뭇 다른 상황에서.
“로즈버리 놈들이 헛꿈 꾸지 못하게 해야 한다.”
“힐베르크 후작, 그놈을 협상 테이블에 앉혀야 한단 말이다.”
로즈버리가 되었든 힐베르크가 되었든, 그 레이디가 실마리였다.
로즈버리를 위협하기 위해 루시페우스가 짜낸 수는, 왜 자꾸만 끌리는지 확인해보고 싶던 그녀를 눈에 닿는 곳에 묶어두는 거였다.
그리고 힐베르크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가 짜낸 수는… 간편히도, 한번 써먹은 것 그대로.
계획을 성공하는 게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면 의심받지 않겠지.’
루시페우스는 제 악독한 의형을 떠올렸다.
그가 후작의 일을 돕는 것에 건성이 된 것을 알아차리고서, 약속된 바를 내어주지 않겠다던 도미닉의 으름장.
유일하게 바라온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감히 바랄 수조차 없는 것을 저버리고 말았다.
저는 곧 떠날 거였으니까.
떠나지 않더라도, 감히 곁을 청할 수 없는 반의반 쪽이니까.
‘…그리도 아름다우신 분께 얼룩이 되면 안 되지.’
그는 폐막식에서 수상자들에게 시상하고 축사를 읊던 세실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실의 축복인 은사는 모두의 앞에서 찬란히 빛났고, 우주를 담은 듯 금빛이 어룽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또한 멀리서 보기에도 명료히 반짝였다.
그가 감히 다가갈 수 없다 여기는 그 온전한 아름다움.
‘그런데 어제는….’
울고 싶었으나 울지 못해 발갰던 그 눈가, 비참함으로 흐려져 있던 황실의 보석, 늘 새초롬히 굳혀두시던 것과 달리 잔뜩 허물어져 있던 낯, 어찌나 괴롭혔는지 군데군데 핏기가 비치던 입술.
늘 의뭉스럽고 능청스러운 모습만 보이시던 작은 빛께서 그리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신 건 처음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쏟아내고, 표정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원망과 슬픔과 괴로움을 선연히 드러내던 작은 빛의 애달픈 자태.
어제 세실리아의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그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가 후작의 음모를 도우며 한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녀 앞에서….
몸속에 잘 갈무리해 두었던 마력과 신성력이 뒤엉키는 느낌이 여실했다. 태양절 연회 날 아우렌바흐가 감히 그 손을 받잡은 걸 보고서 겪은 답답함은 축에도 못 꼈다.
숨이 목 졸린 듯 가빠져, 그는 천천히 숨을 골라야만 했다.
실로 간만에 겪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저잣거리 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을 때, 그녀가 손으로 도닥여주자 간신히 가라앉았던 그 일.
폭주의 전조.
그게, 그리도 쉬운 거였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리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곧 죄책감으로 귀결되었다.
감히 제가 그녀의 곁을 얼씬거렸다는 죄책감.
“경, 고마워. 또 빚을 지고 말았어.”
세실리아가 처음으로 제게 먼저 말을 걸어왔지만, 루시페우스는 즉각 알았으면서도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기쁨이면서도 그 이상으로 고통이 되고 말았으니까.
제게 기쁨이란 감정을 느끼게 해준 그녀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크나큰 죄책감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적었다가 제 마음과 달리 냉정하게 울리는 것 같아 지우고.
「푹 쉬십시오.」
그러지 못할 걸 아는데 어찌 그러나 싶어 지우고.
「죄송합니다.」
입으로 몇 번이고 사죄했음에도, 죄송할 일을 하고 말았음을 다시금 직시할 수 없어 또 지웠다가.
그는 결국, 날이 밝도록 아무런 답도 건네지 못했다.
그녀가 제 메시지를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늘 꾹꾹 누르고 있는 제 마음을, 보고 싶은 마음을 걷잡을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보고 싶은 마음이라.
어린 시절, 외로운 줄도 모르고 외로움에 사무쳤을 때면 꼭 따라붙던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제 머리칼을, 눈가를 매만져주던 그 온기.
그리고 그 온기와 꼭 같은 따스함이었던 세실리아.
십수 년 전 세실리아를 마주친 이후로, 루시페우스는 오래간 세실리아에 대해 생각해왔다.
소녀의 작은 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족했다.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안도감.
제가 보고 싶을 때 보길 원하던, 주제도 모르는 욕심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괜히 용기를 냈지. 감히 억지로 가닿고자 해서, 곤란하실 일만 잔뜩 만들고.’
이따금 같은 공간에 자리할 수 있고, 저도 모르게 눈길이 따라붙는 대로 살피면 그뿐.
‘감히 욕심을 부리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실은 지금도 보고 싶었다.
한 공간에 계심을 아는데도 보고 싶었다.
고개 돌리지 않은 온전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한여름의 초록처럼 깊디깊은 그녀의 눈동자를 제 상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시고, 저를 이따금 떠올려 주시고, 제가 그렇듯 저로 인해서 기쁨이든 재미든 어떠한 감정을 느끼시길 바라고….
아, 슬픔을 느끼셨나.
‘순식간에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으로 흘러서야.’
다시금 깊은 자책.
루시페우스는 고개를 들어 연회장 안을 살폈다.
은연중에 늘 그녀를 좇게 되어, 억지로 다른 데 붙여두었던 시선이었다.
그런데.
‘어디 가셨지?’
세실리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