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10)
반사되던 상이 사라지면서 글씨가 떠오르곤 하던 거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잠들었나?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또 빚을 지고 말았네.”
그대와 얽히던 핑계인 그 빚은, 다시금 늘어나고 말았어.
이제 어떻게 할래? 그래도 나와의 인연을 저버리는 거야?
수많은 말이 입 안에 들어찼다가 스러졌다.
나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혀끝으로 굴리다 보니, 결국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날이 밝아 사냥 대회가 끝날 때까지… 답은 오지 않았다.
[나의 아멜리. 나를 응원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와주어 정말 고마워요. 그대를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했으니 폐막 연회가 시작할 때 북측의 별채 응접실로 와주겠어요? 사냥감으로 신고하지 않은 특별한 거라 남몰래 와야 해요.]
음색은 레오폴트의 것이었지만, 그 투는 사뭇 다른 말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정말 그렇죠?”
“진짜네.”
진짜로, 아멜리를 납치하겠다고 수를 쓰네.
이튿날, 사냥 대회의 마지막 날.
어제의 노곤함으로 정오가 다 되어 일어났더니, 아멜리가 이 음성 서신을 가져온 것이었다.
“전하 말씀이 정말 사실이었어요!”
어제 못난 모습을 보인 바람에 아멜리를 보기에 민망하겠다고 걱정한 것도 잠시. 아멜리는 퍽 들뜬 기색이었다.
“내 말…?”
“왜, 목소리를 바꾸는 마도구가 유행이라고 하셨잖아요.”
“아아.”
…그랬지.
아멜리에게 혹시나 싶어 해뒀던 말이었는데.
‘유시 때문에 정신없었더니 까먹고 있었네.’
그러고서 아멜리가 내미는 것이, 레오폴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음성 서신이었다.
원작에서는 레오폴트와 아직 어색한 사이였기에, 가짜 음성 서신을 받고서 의심하긴커녕 설렜던 아멜리는.
“일단 저를 부르는 호칭도 다르고요, 말투는 조금도 같지 않아요. 외국인이 책 읽는 것 같지 않나요? 무엇보다 레오는 폐막 연회를 너무도 기대하고 있는지라….”
역시. 원작에서보다 두 사람이 훨씬 가까워진 덕에 아멜리가 속아 넘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괜히 음성 변조 마법 운운하지 않았어도 괜찮았겠는데…?’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와중에 아멜리가 납치되는 사건이 결국 발생하게 된 거니….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씁쓸한 건 씁쓸한 거야.’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결국 아멜리를 납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멜리가 속아 넘어갈 상황이 아닌데도, 원작과 동일한 방식으로.
“레오가 이따금 전하께서 동대륙의 현자에 버금가신다고 말했는데, 정말이었어요!”
아멜리가 해사하게 웃었다. 여주인공다운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내가 미래를 예견했다고 띄워주는 거였는데…. 그게 전혀 달갑지 않아, 나는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이고 말았다.
오후 늦은 시간. 중천에서 내려온 태양이 조금씩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자 참가자들이 속속 컨트리 하우스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다가온 사냥 대회의 폐막.
그때까지 컨트리 하우스에 환각 마법에 걸린 마수가 뛰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성공이야.’
그렇게 귀족파의 흉계 하나가 무사히 무산되었다.
‘3소대에서 여러모로 엄청 고생했으니, 포상을 특히 더 두둑이 챙겨 줘야겠어.’
3소대 기사들은 참가자 중 가장 마지막으로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과 함께 복귀했다.
그랑프리랑 끝까지 싸운 게 4황녀 전하의 호위들이라지?
유스티안 전하께서도 몇 번 일격을 날리셨다던데.
헤르미아나 전하께서 잡아 오신 마수 봤어?
역시 태양의 축복이야.
귀족들은 내 호위 기사들이 선전했음에, 미성년의 두 황손이 늦게까지 버텼음에 모두 떠들썩했다.
저들의 음모가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이를 내색하는 귀족파는 아무도 없었다.
‘후후, 내 기사들 참가 못 하게 할걸 싶겠지.’
이윽고 저녁의 폐막식과 폐막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컨트리 하우스가 부산스러워졌을 때.
나는 응접실에 세 소대장을 불러 모았다.
“로즈버리 영애에게 기묘한 서신이 왔어.”
케인이 아멜리에게서 받아둔 음성 서신을 테이블 한가운데 펼쳤다. 평범한 편지지처럼 보이지만 접혔던 것을 평평하게 펼치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아멜리.]
“헉.”
“음성… 서신인가요?”
레오폴트의 목소리로 녹음된 메시지가 흘러나오자, 엘런과 알렉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기묘하다는 말씀은….”
“이게 아우렌바흐 소공작님이 아니라.”
“응. 누군가가 음성을 조작한 거야. 로즈버리 영애를 불러내기 위해.”
와, 목소리 똑같네. 기사들은 저마다 혀를 내두르며 생각에 잠겼다.
“마법이겠죠?”
“이런 일을 할 인물은.”
“최근 마탑 밖으로 나왔다는 마법사가 없으니까….”
그들의 생각 끝에 나타난 얼굴은 단 하나일 거였다.
‘…유시를 찾아준 건 정말 적선 같은 거였던 거지.’
나를 도울 수 있게 해달라며 간절히 말하던 그 낯에, 내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모양이었다.
‘덕분에 또 잠시 헷갈렸지만. 열심히 본분을 다하고 있네….’
입가에 자꾸만 한숨이 어렸다.
그럼 나도, 내 본분을 다해야지.
나는 기사들이 생각을 정리할 짬을 준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이게 귀족파에서 꾸린 함정이라고 생각해.”
“그렇죠,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고 또 별채를 마음껏 빌릴 수 있는 자일 테니까요.”
“마수를 이용한 작전이 실패했으니, 다른 뭐라도 해야겠지 싶나….”
“그런데 귀족파에서 로즈버리 영애님을 왜…?”
세 소대장은 저마다 이 상황에 대한 감상을 읊조렸다.
“우리가 최근 입수한 정보로도 알 수 있듯이 로즈버리령 자체가 귀족파와 꽤 묘한 관계에 처해 있잖아?”
내 말에 세 소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즈버리 선대 남작이 빌려준 돈이 모두 귀족파에 흘러들어 간 정황, 귀족파가 로즈버리령의 폐광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황.
“게다가 로즈버리 영애가 황실파 수장인 아우렌바흐의 후계자와 교제를 시작하고 성녀의 아들인 힐베르크 후작의 친딸로 밝혀지는 등…. 요즘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니까.”
나는 적당히 이치에 닿을 법한 근거들을 읊었다.
내 안에 정답은 따로 있었지만.
‘루시페우스가 이 세계의 섭리대로 아멜리를 구속하려 해서….’
다시금 올라오는 무력감과 슬픔에, 나는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이 함정을 역이용할까 해.”
“그렇죠, 거기에 연루된 이들을 체포하면….”
“로즈버리령을 둘러싼 묘한 일들에 누가 관여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겠네요.”
“적어도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라도요.”
세 소대장은 최근 암조 내에서 공유된 정보들을 떠올리며 상황을 곱씹었다.
“그럼 일단 로즈버리 영애님께서 속아 넘어가신 척….”
“아니.”
나는 작전을 구상하며 읊조리던 엘런의 말을 끊었다.
“내가 갈 거야.”
“네?”
“무슨 말씀을!”
“너무 위험합니다!”
세 소대장이 펄쩍 뛰었다. 그들의 눈이 아까 음성 서신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크게 휘둥그레졌다.
“어제는 호위를 다 빼라시더니, 전하…!”
오늘도 다시, 엘런이 어제만큼 동요하였다.
‘다들 당황할 줄 알았지.’
나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아니면? 나 말고 로즈버리 영애로 위장할 사람이 누가 있는데?”
내가 응접실 안의 세 소대장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이것은 아멜리를 목표물로 삼은 함정.
그렇다면 아멜리와 비슷한 체구를 가진 사람을 미끼로 삼아야 하는데, 세르니타에 온 내 사람은 모두 기사들뿐이었다.
엘런이나 린지 같은 여기사들도 모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실수로라도 아멜리로 착각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로즈버리 영애님께….”
“우리가 하는 일을 다 까발리자고?”
알렉스가 어렵사리 꺼낸 말을 나는 곧바로 기각하였다.
‘어제 귀족파가 어쩌느니 아멜리 앞에서 주절대긴 했지만, 암조 작전에 참여시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지.’
가짜 서신을 받은 아멜리로서는 그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것이 실은 귀족파의 함정이니 그 함정에 빠져봐 달라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탁한다면 아멜리는 상냥하게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겠지만.’
그게 납득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임을 모두가 다 알았다.
응접실 안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럴 줄 알고 만들어둔 말을 꺼냈다.
“이번에 온 암조가 모두 스물여섯이야. 경들이 나 하나 못 지키리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주군을 미끼로 삼는 작전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 줄 알고요?”
기사들이 모두 앓는 소리를 냈다.
머리로야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작전임을 알 거였다. 대안도 없었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반대로 나 또한… 내가 억지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어쨌든 아멜리에게 부탁할 수야 있었고, 엘런이나 린지의 키가 아무리 크대도 그들이 아멜리의 키가 어떠한지 알 게 무언가.
하지만… 여기엔 내가 가야만 했다.
‘더 이상, 내가 개입하는 일에 다른 사람이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
어제 유스티안이 조난된 일을 계기로 다짐한 바였다.
귀족파를 정리하여 황실에 이바지하는 게 표면적인 목표라지만, 내 행동에는 매번 사심이 깃들어 있었다.
내 고마운 친구 레오폴트가 운명적인 사랑을 수월하게 쟁취할 수 있도록, 성년이 다 되어 마음을 나눈 스칼렛이 제 야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그런 것들이야 사심이라 하기에도 귀여운 축이었지만.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도록….’
원작의 흑막이 여주인공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려는 게 아니라, 루시페우스가.
내가 마음을 줘버린 그가 다른 이에게 집착하지 않도록.
그런 그릇된 마음이 깃들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세상의 흐름에 개입하고 있는 건 오로지 내 욕심에서 비롯된 거였다.
그러니 책임도 내가 지는 게 맞았다.
동시에, 그가 아멜리에게 집착하여 만든 함정을 보란 듯이 내 손으로 부수고도 싶었다.
‘이 정도 심술은 괜찮겠지.’
그리고 일이 성공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통쾌하겠지.
그가 나와의 교류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대도… 나를 해치지는 못할 거니까.
‘그러고자 했으면 진즉에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 아무리 내가 황녀라지만….’
그가 빨간 눈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듯이, 그가 나를 해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는 것 아닐까.
나는 어제 내 손에 피를 내면서, 제 살을 에는 것처럼 괴로워하던 그의 낯을 떠올렸다.
머리로는 그가 나와의 관계를 끊고 원작에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따금 그가 내비치는 모습들에 나는 자꾸만 설마, 하게 되는 것이었다.
말로는 아멜리를 연모한다고 하면서, 내가 저를 훼방 놓는 걸 방관하고 있는 그가.
코코 에스메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그가.
그런 신뢰가 남아 있음이 문제일 거였다.
“아마 직접 움직이는 건, 사냥 대회에 가주가 참석한 가문의 사용인들…이 아닐까. 사냥 대회 참가자들이 자리를 비우면 눈에 띌 테니까.”
실제로 원작에서 루시페우스는 이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그와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귀족파 영식들이 저들의 수족들을 내주었다.
내 추측에 일리가 있어, 기사들은 와중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단해. 2소대 그림자들은 약속된 공간에 은신. 1소대는 건물 밖에서 대기. 3소대는 대회 내내 고생했으니까 도면 확보하고 내 알리바이나 만들고 쉬어.”
“전하…!”
“좋은 대안 있으면 폐막식 전까지 보고해. 그럼 난 이제 폐막연 준비해야 해서.”
나는 기사들의 거무죽죽한 얼굴을 외면한 채,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 설렁줄을 당겼다.
아마, 다른 대안은 없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