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9)
꽤 깊이 베였는지 손끝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얼굴만 보자면 나보다 그가 더 아픈 듯해, 그걸 홀린 듯 바라보느라 나는 아픈 줄도 몰랐다.
그가 내 손끝을 꾸욱 누르자 베인 곳에서 피가 송골송골 맺혀 나왔다.
곧바로 그는 황급히 단검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해로운 것은 내 근처에조차 두면 안 된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내내 긴장해 있던 케인과 엘런이 나지막이 숨을 내쉬는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그가 나침반 마도구 한가운데의, 홈이 오목하게 팬 부분에 내 손에서 나온 핏방울을 흘려 넣었다.
이내 나침반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프셨죠.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루시페우스는 자신의 양 손바닥을 맞대어 내 손가락을 지혈하듯 꼬옥 눌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 양손이 맞닿은 틈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내 손끝은 그의 손바닥에 감싸여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 손끝에 입 맞추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끝이 홧홧했다.
“쉬고 계십시오. 안심하시고요.”
기왕이면 식사도…. 그가 응접탁자에 덩그러니 놓인 돔 접시를 흘끗하며 말했다.
그리고 내게만 들리리만치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전하께서 아시는 제 비밀을 믿어주세요.”
그의 비밀이라.
그가 자신의 빨간 눈을 두고 문제가 있는 태생이라 말하던 것이 떠올라 나는 또 마음이 저몄다.
하아, 그가 털어내듯 내뱉은 낮은 숨소리와 함께 결계가 사라졌다. 나침반 마도구를 집어 든 그는 어느새 훌쩍 일어났다.
“그, 군청색 머리의 기사에게 제가 전하를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감쪽같이 아문 내 손끝에서 심장이 두근댔다.
이상하게도 루시페우스가 다녀가고 나자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그것이 세르니타의 사용인들이 준비해준 식사를 삼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황망함에 정신 못 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멜리 역시, 그가 사망자가 없다고 단언해준 것이 도움이 됐는지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가 순간 이동 마법을 써서 사라지는 것까지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겠지.’
어쨌든 아멜리는 원작에서도, 지금도 세르니타의 사냥 대회 때 그가 마법을 쓰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도 원작의 억지일까, 아닐까….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창밖만 쳐다보았다.
어느새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황성과 달리 불빛 하나 없는 세르니타 장원의 야경은 공동과도 같은 어둠뿐이었다.
저 너머의 어둑한 숲속에, 유시가 있겠지.
죽지 않은 것이 확실한 유시는… 루시페우스가 찾아줄 거고.
마치 내게 마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가와 놓고, 한순간 마음을 거두어가 버린 그 남자가.
내가 스무 해를 기다려 올해 그가 하려는 일 모두를 저지하기로 한 상대가.
그리고 나를 절대로 해치지 못한다고 맹세한 그가.
내가 신뢰하는 그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를 믿고 있는 거지.’
자조적인 미소가 입가에 깃들 때였다.
쿵쿵쿵, 다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전하, 알렉스입니다!”
내내 적막했던 응접실에 반짝 활기가 돌았다.
“알렉스?”
문을 지키고 있던 린지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유스티안 전하, 모셔왔습니다!”
“유시!”
나는 절로 벌떡 일어났다. 유스티안이 조난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로 가장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알렉스의 뒤로 3소대에서 가장 덩치가 큰 로건이 유스티안을 둘러업고서 들어왔다.
그리고 유스티안은….
“헤헤, 이모님.”
옷가지며 살갗이며 겉보기에는 만신창이였지만, 여유가 있는지 헤벌쭉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유시 넌 진짜, 뭘 잘했다고…!”
“죄송해요….”
“진짜, 너…. 읏.”
“전하!”
아아, 그제야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로건이 업은 유스티안에게 다가가던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시금, 아멜리가 나를 부축해 주었다.
“난 괜찮아. 유시를 먼저 눕히고, 의사와 신관을.”
기사들은 내가 지시한 대로 유스티안을 소파에 눕혔다.
귀족파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유스티안을 몰래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유스티안이 실종된 것을 알자마자 세르니타령 바깥에서 섭외해온 의사와 신관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세르니타령의 신전에서 신관을 초빙했다가는 순식간에 귀족파 사이에서 소문이 날 터.
바로 옆, 경계를 맞댄 영지가 황실파의 영지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대부분 찰과상이랑 타박상이시고, 다행히 골절상은….”
“아, 아으앗!”
“예에, 갈비뼈 골절이시네요. 그리고 어깨랑….”
“아윽!”
“발목도 염좌군요. 신성력으로 회복하시더라도 며칠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의사가 왕진 가방에서 가져온 부목과 천으로 유스티안의 발목과 어깨, 흉통 등을 덧대고 감쌌다.
이윽고 신관이 유스티안에게 신성력을 퍼부었다.
“2황손 전하께서 지니신 신성력이 방대하시더라니, 덕분에 이 정도에 그치신 것 같습니다.”
“헤헤, 잘됐네요.”
“헤헤는 무슨 헤헤야, 응?”
“죄송해요, 이모님….”
나는 정말이지, 내 조카를 콩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정말 고맙네. 황궁에 돌아가면 곧 다 나을 테니, 며칠만 말조심해 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고.”
“당연한 말씀을요. 저야말로 은사를 진 분들을 모실 수 없어 일신의 영광입니다.”
“주신의 찬란한 볕과 달의 신의 온화함에 축복을 기원합니다.”
유스티안이 신성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제 신성력만 써도 감쪽같이 나을 거였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어주길 당부하며, 나는 이럴 줄 모르고 가져온 금붙이와 보석들을 그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두 사람이 떠나고, 복귀한 1소대와 2소대를 정비하기 위해 케인과 엘런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나는 남은 기력을 짜내어 매섭게 유스티안을 노려보았다.
“…그래, 유스티안.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 볼까?”
“아, 그, 그게….”
올 것이 왔구나. 유스티안은 볼을 긁적이며 내 눈을 피했다.
“이모가 뭐라고 말했니?”
“저어, 무사히 돌아오는 게 본분이라고요….”
“또.”
“참가한 것만으로도 본보기를 보였다고….”
“그런데!”
윽, 소파에 길게 누운 유스티안은 멀쩡한 팔을 들어 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보면 내가 때리는 줄 알겠네.
“이모님 목쉬겠어요….”
큼큼, 안 그래도 그간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셨던 터라 목이 칼칼했다.
그러니까, 나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전전긍긍한 데 대한 원망을 담아 자꾸만 유스티안에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랑프리를 너 혼자 잡으려고 난리 치다가 내 기사들 다 고생시키고, 응?”
“죄송해요….”
“신호탄은 왜 안 썼어?”
“그게, 비탈에서 굴러떨어지고서 쓰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마사슴이 나타나서….”
놓쳤….
쿡, 유스티안의 기어들어 가는 말소리에 아멜리가 작게 웃었다.
내가 유스티안을 드잡이하는 터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진 지 오래였다.
나는 황당해서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마사슴 한 마리에도 놀라는 네가 어떻게 라타도르를 잡겠다고?”
“그으, 검을 잃어버려서요….”
“검이 있었으면 안 놀랐고?”
“…….”
내가 놀리듯 추궁하자 유스티안이 조금 불만스러운 낯이 되었다.
아쭈, 잘못은 제가 해놓고?
“그곳 지반이 약해서, 거기서 한 번 더 굴렀거든요….”
“뭐라고?”
아이고, 맙소사…. 나는 절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유스티안이 신성력을 많이 타고나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스스로 치유하며 기다렸을 테니까.
‘오늘 못 찾았으면 사냥 대회 끝나고 단체로 수색할 때까지 버텨야 했을 텐데.’
재빨리 알렉스가 끼어들어 오늘의 일에 대해 보고를 이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 떨어져 계셨습니다. 그으, 알비누스의 둘째 영식께서 안 도와주셨더라면, 정말….”
그리 말하며 눈알을 제 소대원들 쪽으로 굴리는 것이었다.
응접실에 남아 있던 3소대 기사들끼리 루시페우스가 나를 도운 일에 대해 의뭉스러운 눈빛을 공유하고 있는 게 빤했다.
이것들이 정말, 사람 속도 모르고.
내가 지금 퍽 안도했으니 봐준다, 너네….
잠시 날카로워진 기류 속에서 아멜리가 해맑게 말했다.
“루시페우스 경께서 마법을 쓰시는 줄은 처음 알았는데…. 정말 실력자신가 봐요.”
“예에, 그러게요.”
대꾸하는 알렉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이모님, 그 마법사가 알비누스였어요?”
“아, 으응, 그래.”
하긴, 미성년이어서 귀족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는 유스티안으로서는 그를 처음 봤을 거였다.
‘유스티안에게 마법을 쓰는 걸 보였나 보네? 괜찮나?’
유스티안을 직접 찾아놓고선, 알렉스에게 인계한 뒤 홀랑 가버린 모양이었다.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그렇게 바로 가버릴 일인가…. 내가 그에게 작은 서운함을 느낄 때였다.
“귀족파에서 부마를 들여도 되나….”
퍽 심각한 어조로 유스티안이 중얼거려, 나는 황당한 마음이 되었다.
“유스티안 로젠하르트 알 아마리우스. 지금 뭐라고.”
“아, 왜요! 그 영식이 이모님 걱정하신다고 절 혼냈단 말이에요!”
“거짓말할 기운 있으면, 사람들 깨기 전에 빨리 다시 사냥터로 돌아가.”
“거짓말은요? 저는 그 사람 반대예요. 너무 차가워요. 말수도 적은 게 불친절하고요.”
“알렉스, 2황손 전하께서 다 나으셨다시네. 빨리 모시고 가.”
알렉스가 광대를 실룩거리며 내 말을 거역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들 보기에 멀쩡해 보이도록 사냥복을 갈아입은 유스티안이 3소대 기사들과 함께 몰래 사냥터로 돌아간 뒤, 깊은 밤.
가장 어둑한 밤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곱씹느라.
내내 얼씬도 않던 루시페우스가 나타난 일.
내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간원하고 또 결국에는 도와주고 만 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톡, 톡, 톡. 내 손가락이 탁자를 울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그 손가락은, 아까 루시페우스가 피를 내기 위해 상처 입혔던 그 손가락이었다.
진즉에 피가 멎은 손가락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내 손을 감싸 쥔 찰나 곧바로 낫고 만 손가락이었다.
‘마법으로 경지에 이르면 치유까지 가능한가? 치유는 신성력의 영역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손끝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고 보면 루시페우스가 가진 나침반에 대한 묘사가 있었어.’
‘공제눈’의 클라이맥스가 되었던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전장 장면.
루시페우스 또한 그곳에서 죽었고, 그가 죽은 자리에는 망가져 바늘이 뱅글뱅글 돌던 나침반이 있었다는 서술이 있었다.
그것이 이따금 아멜리가 있던 쪽을 향해, 마치 갈 곳 잃은 그의 연심을 표현하는 것 같던 그 소품.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제 혈연을 찾으려는 걸까?’
친부에 대해서는 찾을 생각도 안 한 듯한데.
아니면, 그곳이 에리나 경이 전사한 장소인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원작 속 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자니, 문득 불꽃놀이를 보며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때. 어린 시절에 못 본 거 보상받는 느낌이야?”
“…황홀하군요. 죽기 전에 이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을 정도로요.”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그의 진지한 말소리를 떠올리자… 그러니까, 나는.
달칵.
그가 마법으로 고쳐둔 손거울이 작은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창을 통해 스며들어 오는 희미한 달빛에 거울이 빛났다.
그가 깨어 있다면, 내가 손거울을 작동했음을 알겠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가닿지 못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을 일이었다.
그저, 내가 말해두고 싶었으니까.
“경, 고마워.”
몇 번을 연습한 말소리가 내 입가에서 우물거렸다. 나는 파르라니 빛나는 거울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