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8)
“…제 도움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문 너머에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어떤 격정이 억눌려 있는 게 선연했다.
그러니까 그 목소리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와의 관계를 끝낸 그가….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멀거니 있을 때였다.
“문책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엘런이 그리 읊조리고는 재빨리 문가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열린 틈으로 그의 신형이 드러났다.
어제 봤을 때처럼, 아까 창밖으로 봤을 때처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사냥복 차림에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묶은 머리칼.
그리고 그의 낯이….
적막하리만치 차분해야 할 그의 낯이 어딘가 흐트러져 있었다.
왜?
루시페우스가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고요한 발걸음으로 몇 걸음 걸어, 그는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섰다.
내 발코니에 찾아들면서도 내 방 안은 넘보지 않던 것처럼.
그가 퍽 가까워졌기에 그의 낯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으나, 나는 오히려 그의 구두코로 시선을 내렸다. 무릎 아래서 각반이 접힌 부츠는 숲에는 잠시도 걸음 한 적 없는 것처럼 말끔했다.
‘얼굴 마주할 엄두가 안 나….’
열흘 만에 보는 거였고, 그동안 나는 자책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했던 데다가, 얼굴도 엉망이었고,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게 무서웠다.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인가, 나는.’
실소가 픽 났다. 바람 빠지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때, 그가 깊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마치 가쁜 숨을 고르려는 듯이.
“잠시.”
발걸음이 응접실 구석으로 멀어졌다가 다시금 가까워지더니… 주저하던 걸음 끝에 조심스레 카펫 위에 올라섰다.
아멜리가 시선으로 그의 동선을 좇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
작게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울리던 위치가 퍽 낮아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내 눈높이와 얼추 비슷해진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로 내뻗어진 손….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그가 내민 것이 무언지 알았다.
언제나처럼 검은 장갑을 낀 그 손에 들린 것은, 그가 내게 연락해오던 손거울일 거였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린 채 굳어 있었다.
탁, 손거울 닫는 소리가 났다. 달칵이는 마찰음이 나지 않는 게 맞물리는 부분이 부서진 듯했다.
‘저게 열려서 우리가 무슨 소리 했는지 다 들었겠구나.’
손거울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열렸더라니, 그게 작동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마음이 황망하여 그걸 창피해할 겨를도 없었다. 얼결에 손끝에 힘이 들어갔는지 소파 긁히는 소리만 났다.
한참 동안 손거울을 들고 있던 루시페우스는 이내, 팔을 뻗어 응접탁자 위에 손거울을 올려두었다.
그러는 내내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송구합니다만.”
그의 단단한 손끝에 턱이 쥐였다.
어느새 자리를 피해 케인 곁으로 간 아멜리가 작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가 강고히, 그러나 부드럽게 내 고개를 살포시 제 쪽으로 돌렸다.
끝까지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입술… 상하십니다.”
그의 엄지가 입술 아래 오목한 부분을 꾸욱 눌렀다. 혀끝에 맴돌던 쇠 맛이 희미해졌다.
그러고도 얼마간 내 턱을 쥔 채, 그는 물끄러미 내 입술 쪽만 쳐다보았다. 힘겹게 숨을 고르는 듯도 했다.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는 중의적으로 울렸다.
내 몸에 손을 대서. 마수를 갖고 장난치려는 귀족파의 음모에 가담해서. 그리하여 유스티안이 실종되게 해서.
혹은, 저돌적으로 구는 듯 사람 헷갈리게 해놓고 발길을 끊어서.
‘마지막은 내 희망 사항이겠지만….’
한참 동안 나를 지켜보던 루시페우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기사들이 대거 숲으로 이동한 기척을 느꼈습니다.”
오래간 입 안에서 준비해 두었던 듯, 퍽 점잖게 울리는 말소리였다. 응접실 안의 기사들이 얼어붙은 듯한 기류가 느껴졌다.
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법사인 거야 암조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가 그 정도로 타인의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아직 나만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나를 겁박하며 내 호위의 수효를 헤아린 건 나와 단둘이 있을 때의 일이었던 것이다.
겁박이라니. 생각해보면 그건 꽤 계산적인 접근이었다.
내가 저를 경계하는 것을 알아서, 저와의 대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려는….
‘그래놓고서, 왜.’
눈물조차 맺히지 않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만. 나누시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지만 그 해명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손거울을 통해 그가 이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또한 나만 아는 이야기니까….’
그가 목적한 대로, 내 기사들이 동요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케인이 기사들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저, 도우신다면….”
“숲에 있는 책임자의 진짜 보고는 어떠합니까.”
고저 없는 그의 물음에 응접실의 대기가 얼어붙었다.
진짜 보고?
나는 깜짝 놀라 케인을 쳐다보았다. 케인의 낯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정말 밤이라 판별하기 더 낫다고 했습니까.”
“그게….”
“마수들은…. 태양이 지고 나면 더 활개를 칩니다. 어둠이 근본인 것들이니 당연하지요.”
당연한 만큼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케인과 엘런은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호언장담했는데….
제발 그렇지 않다고 말해.
그런 마음을 담아 나는 나의 오랜 수하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케인은 쩔쩔매는 낯이 되어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엘런이,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마수들의 활동량이 급증해져서, 신성력으로 감지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합니다.”
“뭐?”
왜 그런 걸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야?
나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릴 기운도 나지 않았다.
“…알렉스가 전권을 위임받았다며, 전하께 알리지 말라고….”
“그게 말이 돼?”
내 되물음은 숫제 비명이었다. 나는 정말 기절할 것만 같았다. 목이 졸리는 건지, 심장이 죄이는 건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그럼 유시. 유시는….”
“보급품으로 비상식량과 온열 마도구가 함께 지급돼 있으니 밤이라도….”
“신호탄도 못 쓰고 있는 애야!”
“…….”
나를 어떻게든 안심시키려 애쓰던 두 소대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금 응접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을 무렵.
“그러니까, 제가 돕겠습니다.”
“…….”
“그리하게 해주십시오.”
제발…이라는 말은 덧붙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치 간원인 듯 절박하게 떨렸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왜?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무감한 얼굴. 입꼬리를 미세하게 들어 올려 미소 비슷한 걸 걸지 않는 한 늘 무표정인 그 얼굴에는… 한 꺼풀 너머로 어떤 감정의 너울이 어렴풋이 비치는 듯했다.
잘 빚은 도자기 같은 그의 단단한 낯에 그런 감정이 깃드는 순간을, 나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
그래서 혹여 ‘지금’의 그는 다른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은 아닌지 기대했던 것인데.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져놓고.
왜, 지금 나타나서는….
그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에 부인할 수 없는 원망이 한가득 흘렀다.
“안전하십니다.”
“…뭐?”
“숲에서 목숨을 잃은 이는… 없습니다.”
단정하게 마침표가 찍힌 그의 말소리에 내 낯이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그걸 어떻게.”
“마수들…과 제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가는 듯했다.
다만 응접실에 무거운 고요가 내려앉아 있던 탓에 그 작은 말소리가 엄정하게 울리고 말았다.
“맙소사.”
아무것도 모르고 지켜보던 아멜리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루시페우스가 마법을 쓰는 것도 몰랐을 테니, 그 말이 퍽 기괴하게 울렸을 거였다.
‘아멜리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저를 끔찍하게 여길까 걱정하는 중일 텐데?’
와중에도 원작 생각이나 하는 내게 헛웃음이 날 때였다.
“제가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마수들에게 은사를 진 자를 추적하라고 명령이라도 하려고?”
모든 원망을 담아, 내 말소리가 퍽 날카롭게도 울렸다. 부러 가시 돋친 말을 내뱉은 거였지만 그의 낯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내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창피하게.
이런 모습이나 보이고.
내 눈동자가 그를 피해 구석으로 미끄러졌다.
“죄송하지만 잠시 손을.”
그가 내게 손을 내민 것은 그 수치심이 다시금 원망으로 옮아갔을 때였다.
“뭐. 이 와중에 또 무슨 확인이라도 하려고?”
“제게 마도구가 있습니다.”
“마도구라. 참신한 구실이네.”
그는 내 빈정거림에도 아랑곳없었다. 손을 내민 그대로 묵묵히, 나의 반응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혈연관계에 있는 자의 위치를 찾아주는 마도구입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네. 금시초문이고.”
본대륙의 마탑에서 제작된 모든 마도구의 현황은 황실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술식조차 등록된 게 없었으니, 그런 기능의 마도구도 있을 리가 없었다.
“본대륙에서야 그렇겠지만요. 동대륙의 샤먼이 만든 것이고, 그 기능은….”
거기까지 말한 그는, 어딘가 씁쓸한 듯 미세한 헛웃음을 흘렸다.
“제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뭐, 친부라도 찾았나 보지?”
“아….”
거기까지는 생각을. 그렇게 짧게 얼버무린 그는 품에서 나침반처럼 생긴 것을 꺼냈다.
나침반이되, 바늘을 고정한 곳 위에 홈이 패여 있는 것이 달랐다.
“말씀드렸지요. 저는 절대로 전하를 해칠 수 없다고.”
“…….”
“그건…. 마음 다치실 일도 없게 하고픈 마음까지였습니다.”
…내가 뭔데?
그리고…. 마음 다칠 일 없게 한다면, 왜 그랬는데?
내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뱉으려던 찰나였다.
“저를 신뢰해 주시라고는 말씀 못 드리지만…. 이번만큼은, 제발.”
제발 당신을 도울 수 있게.
그런 말을 삼킨 듯, 그의 손이 다급하게도 소파를 쥔 내 손 앞에 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서 난 뜨거운 열기가 내 손끝에 훅 끼쳤다.
그 열기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알제니아의 장원에서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오던 때 그랬듯이, 그리고 그의 접근을 허했던 그 모든 순간에 그랬듯이….
나는 그의 손끝에 내 손끝을 조심스레 걸쳤다.
순간, 루시페우스가 우리를 둘러싸는 결계를 쳤다. 기사들이 접근할 수 없게 막는 듯했다.
“이보세요, 경!”
“피를 내야 해서 말입니다.”
케인의 외침에 루시페우스는 변명하듯 재빨리 대꾸하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절그럭, 절걱,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발검하기 위해 검 손잡이를 쥐는 소리가 났다.
루시페우스는 그런 소리에는 괘념치 않는 듯 고요히 내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조금만. 잠시만 참아주세요.”
손잡이를 잡아서는 단도를 세밀하게 다룰 수 없어서인지, 그는 검날을 쥔 채였다.
내 손을 제 쪽으로 당기고는 아주 천천히, 매우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내 검지 손끝을 베었다.
딱 필요한 만큼만 상처를 내는 신중한 손길. 검날을 쥔 그의 손이 더 깊이 베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낯은….
“아프시죠. 죄송합니다, 정말….”
그리 읊조리는 그의 낯은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