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7)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데릭의 말소리에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대꾸했다.
데릭은 침통한 낯으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침착하게 보고했다.
“라타도르를 제압하기 위해 기사들이 달려든 사이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라타도르, 그러니까… 이번의 그랑프리가 맞았다.
“유시, 유시가….”
잘못되었다고.
순식간에 마음속의 둑이 무너진 듯했다. 어제오늘 애써 참았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래서. 지금 3소대는.”
“병력을 나누어 수색 중이라고 합니다. 헤르미아나 전하 쪽에 붙여둔 인원도 있고 라타도르를 저지하는 인원도 필요하니 소대 전원이 투입되진 못했지만요….”
“…….”
내내 불안하던 게 이래서였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데릭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게… 그랑프리의 진로를 방해하며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사이에 유스티안 전하께서 그 뒤에 올라타셨다가, 녀석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날아가셨다고 합니다.”
“날아갔다고?”
“그 근처에 가파른 비탈이 있어서…. 전하!”
“전하!”
머리가 핑글, 돌았다.
반쯤 쓰러질 뻔한 나를 아멜리가 간신히 받아 들었다. 나는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혼란한 마음속에서 간신히 생각이랄 것들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상황이 더… 나빠졌어.’
원작에서 이 사건은, 그레이스가 참석했는데도 마수가 날뛰었다며 귀족파가 여론전을 벌였다뿐이지… 황실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는 일이었다.
주요 등장인물 또한 아무도 이 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멜리도… 실은 루시페우스가 구했으니까.’
그가 처음으로 대놓고 마법을 쓰면서 아멜리를 구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꼭, 아멜리를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
다시금 피어오른 못난 생각에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핏기가 가신 채 파들대는 주먹 안이 손톱에 찔려 둔통이 일었다.
그쯤이야, 내 어리석음에 대한 벌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유스티안이 실종된 건, 내가 그런 비뚤어진 마음으로 함부로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한심한 마음으로….
“흑…!”
나는 그 모든 자책을 담아 주머니에 든 것을 집어 던졌다. 뎅그렁, 단단한 금속이 대리석에 부딪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는 유일한 것, 그 바보 같은 손거울이었다.
충격에 잠금쇠가 고장 났는지 헤벌어진 게, 마치 지금 내 너절한 마음 같았다.
“…다 나 때문이야.”
“아니에요, 전하. 전하께서는….”
“나 때문이야. 어쩌지….”
마음이 한껏 약해져 있어서일까,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았다. 아멜리가 나를 위로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손끝도, 입술도, 생각도, 눈동자도 모든 게 벌벌 떨렸다.
어쩌지, 유시. 늘 이모님, 하며 잘 따르던 귀여운 조카. 내가 주군으로 섬기는 언니의 아들.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 이런 나라도, 신성력 없고 손 많이 가는 나라도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두 생에 걸쳐 처음으로 내가 손에 쥔 가장 귀한 것.
“어쩌지, 어쩌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는 아멜리에게 기대어 반쯤 주저앉은 채 어쩌지, 하는 말만 반복했다.
“…지금쯤 추적에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 신호탄을 갖고 있으시니까요. 지형이 가파르다뿐이지 기사단에서 가르치는 생존술이면 얼마든지 빠져나오실 수 있습니다.”
데릭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간신히 주워섬겼다.
꽤 설득력 있는 말소리와 달리 그의 말투에 혼란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케인에게 늘 깐족거리는 그치고 위기감에 담뿍 젖은 말투였다.
아멜리는 묵묵히 내 어깨와 손을 주물러 주었다. 유스티안이 실종됐다는 말에 그녀 또한 레오폴트의 사고를 상상해 버렸으리라.
하지만 내겐 그녀를 안심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유스티안이, 나를 믿어주는 언니의 아들이….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을 때였다.
문가에서 이편을 지켜보고 있던 케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하, 그럼 일단 주최 측에.”
“안 돼.”
“…알리지 말라고요?”
내 일축에 케인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울렸다.
‘유스티안이 실종된 걸 귀족파가 알았다가는….’
일반적인 상황이면 대회를 중단시키고 유스티안을 다 함께 수색하는 것이 맞았다.
이 사냥 대회가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하지만 사냥감들이 환각 마법에 걸린 것은, 귀족파의 술수로 인한 것.
그 함정에 휘말려 황족이 해를 입었다면… 그 내용과 무관하게 귀족파들은 신나서 말을 지어낼 거였다.
원작에선 그레이스가 참석한 자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공세를 펼친 이들이었으니까.
그게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유스티안이 조난까지 당했다면….
그들에게 명분을 주면 안 된다.
“…최대한 늦춰야 해.”
“늦추…다뇨?”
“귀족파가 알게 할 순 없어. 태양의 축복을 받고도, 은사를 지고도 마수에게 당했다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생각한 바를 간신히 뱉었다.
아멜리가 듣고 있는 것도 감안하지 못하고 가감 없이 내뱉은 말에, 그녀가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케인과 데릭은 수긍한 듯 침묵했다. 그것이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일단 1소대.”
나는 간신히 명령이랄 것을 짜냈다. 이 또한 악수(惡手)는 아니길 바라며.
“최소한의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사냥터로 보내.”
“전하.”
“수색에 전력을…. 아니, 얼른 마수들을 먼저…. 아냐. 알렉스. 알렉스의 판단에 따라. 그에게 전권을 위임한다고 해. 아무튼….”
세실리아가 되고서 이토록 생각이 꽉 막힌 느낌은 처음이었다. 나는 무력감에 젖어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튼, 여기는 괜찮을 거니까.”
그래, 괜찮을 거였다.
밖에서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남자는 어쨌든 나를 구한 전적이 있고, 또 원작에서는 자신이 환각 마법을 걸었음에도 그랑프리가 아멜리를 습격하자 그녀를 구하기도 했으니까.
여기는 어떻게든 될 거였다.
유스티안.
유스티안을 구해야 했다.
그 애가 해를 입는다면 모든 게 다 소용없어지고 말 테니까.
정원이 저녁노을로 물들 때까지 새로운 연락은 오지 않았다. 1소대에서 케인과 막내인 린지를 제외한 모두가 투입되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해가 거의 다 기울었을 때 나는 그림자로 수행하고 있던 2소대에도 전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전하 곁을 어찌…!”
엘런이 한껏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이토록 동요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치에 안 닿는 말로 들릴 걸 알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엘런의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머릿속에 든 것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여기서 나를 해할 사람은 없어. 황족이 마수에 다치면 그건 여론전의 소재가 되지만, 사람이 날 해하면 중범죄니까. 경들이 사냥터에서 마수를 잘 막으면 나는 안전할 거야. 그리고 마수를 조종하는 사람이 로즈버리 영애와 같이 있는 나를 해할 리도 없고.”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다 보니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마구잡이로 쏟아내게 되었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멜리의 낯에 물음표가 차올랐지만,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전하….”
“…….”
나의 침묵은 곧 완고함이었다. 엘런은 마지못해 저를 제외한 소대원을 모두 사냥터로 보냈다.
응접실에는 몇 시간째 무거운 적막만이 내려앉았다.
나는 나가보지도, 편히 앉아 있지도 못하여 바닥에 주저앉아 소파에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전하, 손이….”
나도 모르게 손톱을 씹고 있었다. 이건 세실리아의 버릇이 아니었다.
‘유스티안이 반드시 무사해야 하는데. 그 아이가 잘못되면 내가 면목이 없는데. 어떻게 찾은 내 자린데….’
수십 년 만에 튀어나온 전생의 버릇에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나는 심적으로 굉장히 몰려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편 하늘 끄트머리에 남아 있던 붉은 기운조차 자취를 감췄고….
“저, 밤이어도 괜찮을 겁니다. 참가자들이 움직임을 멈추니 신성력을 감지하기도 쉽고요.”
“저희가 암조 일 하면서 암행에는 아주 도가 텄잖습니까? 신성력으로 시력 강화하는 것도 성기사단에서도 저희가 최고 수준이고요.”
케인과 엘런이 램프를 켜며 부러 기운차게 주절대었다.
컨트리 하우스의 본채에서는 이편의 사정을 상상도 못 한 채 정찬회가 치러졌다. 내게도 기별이 왔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세르니타의 주방에서 준비해준 요리가 돔 접시에 담긴 채 응접탁자에서 식어갔다.
“그런데, 정말로 주최 측에 안 알려도….”
“…모르겠어.”
정말로,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체하는 사이 혹시 유스티안이 조금씩 생명을 잃어가고 있으면 어쩌지? 신호탄을 쏘지 못한 걸 보면 이미 잘못되고 만 걸까?
그렇다면 황실의 정통성에 대한 여론전이 일 것을 각오하고 이 상황을 알려야 할까?
그래서 원작에서보다 황실이 더 큰 혼란에 휩싸인다면?
나는 내 안에 피어난 물음들 중 어느 것에도 답하지 못한 채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흐흐흑, 우는 소리를 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울 자격도 없어, 나는….’
잔뜩 씹어대어 거칠어진 엄지손톱 끝에 연한 양가죽으로 된 소파가 까드득 걸렸다. 입술에서는 쇠 맛이 났다.
그때였다.
똑똑.
느릿한 노크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간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도 느껴졌다.
무언가 말을 전하러 온 세르니타의 사용인일까? 혹여 도미닉이 미련을 못 버리고 찾아온 걸까?
나는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쉰다고 해.”
케인과 엘런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문가에 서 있던 린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린지가 밖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는 쉬고 계십니다.”
“알비누스의 루시페우스입니다.”
일순간 응접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멜리를 쳐다보았다. 내 옆에 앉아 나를 토닥여주던 아멜리 또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낯은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역시 도와주시려고…!”
돕기는 뭘…?
그녀의 해맑음을 마주하자 내 안에서 치민 감정은… 명백히 짜증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무슨 노력을 하건 간에 귀족파의 음모를 충실히 실행 중인 그는, 아멜리에 대한 연심을 포기하지 않은 그는 왜 하필 이런 때….
내가 가장 비참할 때.
“어떻게 할까요?”
“…….”
기사들이 내 낯을 살폈지만, 나는 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멜리를 보러 온 걸까…?
도대체 왜?
원래 그랑프리가 그녀를 덮치려는 걸 그가 구했어야 했는데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접점을 만들려는 원작의 억지인가?
머릿속이 온갖 혼란으로 가득 차 제대로 된 생각도, 아무런 답도 짜낼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 하여.”
닫힌 문틈을 타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것 봐요, 도와주신다잖아요,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서 아멜리가 내 팔을 토닥였다.
제가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 여주인공의 천진함….
나는 왠지 모르게 더 마음이 비참해져,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방 안의 모두가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도움이라도 괜찮으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