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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04화 (104/220)

104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6)

사냥 대회 둘째 날.

간단한 정찬회로 차분히 마무리한 첫날과 달리, 컨트리 하우스는 다소 부산해졌다.

이따금 부상자가 실려 왔으며, 참가에 의의를 둔 자들이 일찍 사냥을 마무리하고 전리품을 전시하여 떠들썩해진 것이었다.

‘헤니랑 유시도 그냥 지금쯤 오면 좋을 텐데.’

황족의 역할은 이 정도로도 충분한데, 둘 다 사흘을 꼬박 채우고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아직 마수들이 폭주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다행인가….’

정원의 소란은 남의 일인 양 평온한 후원의 산책길을 거닐면서도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오늘 일어나고 말 일을 알고 있었으니까.

“전하, 어디 불편하세요?”

“응?”

“표정이.”

“아아, 으응. 헤니랑 유시가 걱정돼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은 모양이었다. 아멜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아주 거짓은 아닌 말로 둘러대었다.

아멜리가 생긋 웃었다.

“분명 은사를 지신 분들답게 씩씩하게 해내실 거예요.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 나이 때 사냥 대회에서 큰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는걸요.”

내 기분을 북돋기 위함인지, 그녀의 상냥한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해사했다.

‘그래. 이렇게 너그럽고 다정한 여주에게 뭘 부러워하면 안 될 일이야….’

내가 요 며칠 불쑥불쑥 치밀던 못난 마음을 다독이며 그녀에게 마주 웃을 때였다.

“간밤 평온히 보내셨는지요?”

반대편에서 갑작스레 인사말이 들려왔다.

미끈한 낯짝에 느끼한 미소를 건 갈색 머리의 남자….

‘윽, 재수 없게.’

루시페우스의 의형인 도미닉이었다.

‘아직도 포기 안 했나.’

내 낯이 굳었는지, 아멜리가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알비누스 후작의 첫째야. 그, 루시페우스 경…의 형이지.”

“아, 신사님의.”

나는 재빨리 아멜리의 말소리가 어떻게 울렸는지 곱씹었다.

연회 날 루시페우스가 원작에서처럼 굴었다면 꺼림칙해할 법했으니까.

‘태양제 장터에서 마주쳤을 때랑 별다를 것 없는 것 같은데. 친근하지만 적당히 담백한….’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나? 그렇다면 그는 왜, 무슨 계기로 마음을 다잡은 걸까….

‘혹시 도미닉이 내게 접근하는 것과 연관이 있나…? 내가 그를 거절할 거란 확답까지 받아놓고선, 이제 와서 그를 내게 붙이려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도미닉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어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정찬회에 오시지 않으셨더군요.”

“응, 안녕. 어제는 피곤해서.”

…네가 이럴까 봐서 안 갔지.

귀족파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멜리를 위해 안 간 것이기도 했지만.

내 불친절한 대답에도 도미닉은 계속해서 수작을 이어갔다.

“아, 연약하시기가 노르타 산맥의 요정과도 같으십니다. 전하를 보필할 자격을 얻는다면 얼마나 영광일까요.”

…그게 너일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숨긴 채,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척 대꾸하지 않았다.

“곁의 레이디께서는.”

“힐베르크 후작의 영애야. 사냥 대회 동안 내 임시 시녀를 맡아주고 있어.”

“힐베르크….”

도미닉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 또한 알비누스 후작이 대천사의 성상을 확보하려던 일을 알고 있음이 확실했다.

‘혹시나 싶어서 일부러 로즈버리가 아니라 힐베르크라고 말한 건데.’

내가 예견된 수확에 흡족해하건 말건, 아멜리는 한껏 당황하여 재빨리 말했다.

“저, 그게, 로즈버리 남작의 둘째 아멜리라 합니다. 힐베르크 후작님과 혈연이 있는 것으로 확인은 되었지만, 아직 후작가에 입적이 안 되어….”

쓸데없이 정직한 것도 여주인공의 매력이셨다. 이런 올곧은 면이 그에게 매력으로 다가갔다고 원작에… 아.

제발 그만하자, 세실리아.

나는 자꾸만 그에게로 가닿는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차라리 도미닉에게 말을 붙이는 편을 택했다.

“경은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나 보지?”

“제가 유학한 서대륙에서는 사냥할 일이 없어서요. 제가 무예에 소질이 그다지 없었던지 다 까먹고 말았지 뭡니까.”

“하긴, 서대륙에서는 신성력이 그리 주목받는 재질이 아닐 테니.”

신성력을 중요시하는 본대륙과 달리, 다른 대륙에서는 마법이 일상화돼 있다고 했다. 루시페우스가 동대륙에 다녀온 것에도 그런 이유가 있을 거였다.

‘아, 또 그 생각이.’

몇 번이고 거듭되는 낭패…. 마음이 하릴없이 씁쓸해졌다.

“맞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따로 찾아뵙고 서대륙의 마도 공학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구나.”

나는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었으므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꾸만 하고 말았다.

‘서대륙 유학생이면 막심도 있다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눈동자를 슬쩍 굴리던 도미닉이 다시금 말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레이디 아멜리…께서는 어쩐지 사교계에서 겉도시는 느낌이 있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나는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다른 영애들 계신 곳에 전하께서 계실까 찾아가 보았더니 다들 원망하는 눈초리시기에.”

이렇게 대놓고 아멜리의 입지가 안 좋다는 걸 언급하다니? 나는 그의 무례가 불쾌해 낯을 굳혔다.

‘실제로 내가 아멜리하고 다니니까 귀족파 영애들이 이쪽에 얼씬도 안 하기는 했지만.’

그걸 면전에서 말하는 건 그의 인성이 저열해서이기도 하고, 그만큼 힐베르크 후작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전하께서 워낙에 너그러우셔서 친우의 연인을 챙겨 주시는가 보지요.”

“글쎄. 내가 사람을 곁에 두는 데 다른 사람이 이유가 되지는 않는데.”

“전하….”

내 말에, 아멜리가 슬며시 감동한 듯한 눈길을 보냈다.

“…어찌나 너그러우신지.”

그리 말하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다른 쪽 손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루시페우스와 달리 그가 마법을 쓸 리 없으니, 정말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지팡이칼인 듯했다.

그 손짓이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음, 그러니까. 제 미욱한 동생을 잘 보살펴 주셨다지요.”

“어머. 동생이라면.”

아멜리의 목소리가 해맑게 울렸다.

‘태양제 장터 때의 일로 오해해서 그러겠지….’

루시페우스가 나와의 관계를 저버린 지금, 하필 그녀가 그와 내 사이에 대해 언급하는 건… 불쾌했다.

내가 아멜리를 어떻게 이기겠으며, 결국 이기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그건 싸움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내가 헛바람이 들었던 것뿐.

나는 가라앉은 마음만큼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에겐 내가 빚진 것이 좀 있어서 말이야.”

“아아, 예. 그가 게이블스 소후작과 마찰을 빚었다던데.”

집을 떠나 있던 그도, 어쩌다가 루시페우스가 윌로우와 대립했는지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애가 소후작인 저를 깍듯이 섬기는지라 전하께 예를 다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 공을 제게로 돌리고 있었다.

시커먼 속이 빤히 보이는 그의 미끈한 낯짝, 천진하게 나와 루시페우스의 관계를 넘겨짚는 내 여주인공, 그녀에게 시기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죄책감,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빠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존재까지….

‘아, 정말.’

머리가 지끈지끈, 어지러움에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섬기다니, 형제 사이에.

그를 거슬리게 할 그 말을 토해낼 뻔했을 때였다.

“전하.”

귓가에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몇 걸음 떨어져 따라오던 케인이었다.

“알렉스에게서 전언이 왔습니다.”

…타이밍 좋고.

하마터면 속내가 빤히 보이는 말을 뱉을 뻔했다.

나는 도미닉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미안, 경.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럼 혹시 이따.”

“응접실엔 여성 손님만 받을 예정이고, 정찬회는 안 갈 공산이 크네.”

나의 확고한 거절에 도미닉이 손을 말아 쥐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이를 빠드득 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나를 부마로 넣으시겠다고 했어.”

어떻게든 넣겠다니, 그건 방법이 없단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그리 그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조금 나아져, 나는 사뿐히 발걸음을 돌렸다.

“방으로 가시겠어요?”

아. 아멜리가 같이 있었지.

지끈지끈, 가시지 않은 두통이 다시금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아멜리에게 답했다.

“먼저 돌아가 있을래? 기사들 보고라, 좀.”

“아, 그럼요. 조심히 돌아오세요.”

“고마워. 이따 봐.”

아멜리가 꾸벅여 보이고는 뒤돌아 컨트리 하우스 쪽으로 떠났다. 나는 그녀의 등에 대고 손을 살랑였지만….

‘아, 피곤하다.’

아멜리 앞에서 생글거리기도 지치던 차였는데.

나는 마음 놓고 표정을 지운 채 산책길 반대편의 으슥한 곳으로 걸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케인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마수들이 일반적인 행동 패턴을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싸워볼 만하다 하고?”

“녀석들이 주변에 신경 안 쓰고 앞으로만 내달리니 오히려 뒤를 치기가 편하답니다.”

“…잘됐네.”

정말로, 시작되고 말았구나.

원작대로 일이 벌어지는 중이구나…. 그리 생각하는데, 입 안이 쌉싸래했다.

왜?

‘그가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언제나처럼 익히 예상했다며 비웃어주고, 그의 수작을 깨부수면 되는 일인데.

그게 왜 씁쓸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가 원작 그대로라는 증명이어서겠지.’

하아.

사냥 대회만 끝나면 당분간 황궁에만 있어야 할 듯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경 줄이 다 녹는 느낌이었다.

저물녘이 다가오자 더 많은 부상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상하네.

새로운 종류의 마수들을 풀었나?

평소보다 부상자가 더 많은 것 같아.

정찬회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응접실의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어제까지는 잠잠하더니, 오늘은 부상자가 꽤 많네요….”

창가에서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아멜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낙천적인 아멜리라도, 레오폴트가 사냥터에 있으니 걱정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원작대로라면 이번의 그랑프리인 라타도르가 정원에 난입하는 것이 이따 초저녁의 일….’

라타도르, 그러니까 사자의 머리에 호랑이 몸을 하고 콘도르의 날개를 가진 마수였다. ‘날갯짓 한 번 않고 숲을 무너뜨릴 기세로 그 산만 한 덩치가 달려들었다.’라고 원작에 묘사돼 있었다.

‘3소대에서 열심히 저지할 테고, 내 호위들 덕에 컨트리 하우스 병력도 원작보다 강화됐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마음 다잡으면서도 초조해져 나는 과일 냉차만 간신히 홀짝였다.

아멜리의 낯은 갈수록 어둑해졌다.

“부상을 입었으면 바로 이송돼 오는 거겠죠…?”

“그럼. 다들 구조용 신호탄을 지급받았으니까 바로바로 구조될 거야.”

아멜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헤니랑 유시도 있고, 내 기사들이 실패할까 걱정도 되고….’

나 또한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아멜리를 따라 창밖을 내다보니 숲과의 경계에는 임시 치료소가 설치되어서 부상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도에 귀환한 사람도 많은 모양이에요. 레오도 일찍 오면 좋은데….”

“영애랑 같이 왔으니 기왕이면 그랑프리를 잡고 싶을 테니까.”

그리 이야기하며 내가 바깥의 동정을 살필 때였다. 마치 잡아끌린 듯, 어딘가에 시선이 가닿고 말았다.

어제 내가 처음 정원에 들어섰을 때, 그가 서 있던 나무 아래.

오늘도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 방이 이곳인 걸 알았던 것처럼.

‘나를 찾았을 리는 없을 테고….’

나는 절로 내 곁의 여인을 흘끗 쳐다보다가….

‘…이게 다 열등감이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마수들에게 마법을 걸어놓고 태연히 돌아와 있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 미끼가 되어 그랑프리를 유인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다시금 애써, 그쪽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창가에서 그를 살피는 건 낭만적인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라고.’

시선은 떼어냈으면서도 마음은 떼어내지 못해, 창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뽀드득, 창틀에 내 손가락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똑똑똑, 벌컥.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데릭이었다.

“전하. 3소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의 다급한 기색에 응접실 안의 누구도 그의 무례를 탓하지 못했다.

“유스티안 전하께서… 실종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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