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5)
‘법률 대리인을 맡은 그자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혼외자를 중용하는 그녀의 행보야 워낙에 유명한 거였고, 세실리아가 그자를 보는 눈빛 또한 호위 기사들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과 질투심이 드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지만.
그런 못난 감정을 갖는 거야 작은 빛에게 감히 끌려버리고 만 그에게 응당 내려야 할 형벌이었다.
하지만 아우렌바흐 소공작은. 이전의 생에도 그가 궁금해하던 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는….
이번에는 세실리아의 가장 친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에서, 서로를 대하는 몸짓에서 그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얼마 전부터 자각한, 그가 ‘밉다’라는 감정.
결국 질투로 판명 난 그 감정.
그에 대해 생각할수록 잘 정리해 두었던 재질들이 뒤엉키는 것 같아, 그는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그 곤란한 감정의 해일이 폭주의 전조인 것만 같아서.
달빛 아래 있으면, 제가 함부로 찾아갔을 때 세실리아를 비추던 그 빛을 쬐면 그 동요가 가라앉을 것 같았으니까.
아름다운 달빛이라.
루시페우스는 손을 눈앞으로 뻗어 보았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도 위스키에 담뿍 젖어버린 옷가지가 불편한 감촉을 냈다.
‘이젠 더 이상 못 보겠지.’
북향의 방에는 그 달빛 한 점 비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추억이 이리도 쉽게 흐릿해지고 마는 것일까.
‘나 혼자서만 벅찼던 찰나의 일들인데…. 더 귀찮게 해드릴 이유는 없으니까.’
너무도 다정하셔서 저의 억지조차 거절하지 못하신 걸 거였다.
“경이 황실 연회 처음 온 날. 10년쯤 전에.”
고만고만한 영식들 틈에서 제 의형의 비아냥을 듣던 그 초라한 사내아이를 기억하시는 분이셨다.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는 허름한 아이를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분이셨다.
그렇게 다정하시니 잠시 어울려 주셨던 것 아닐까.
그러니까 그 모든 게, 그녀에게는 별거 아닌 관심이었을 거였다.
그에게야 감로수 같았지만….
‘나 혼자서 바란 것뿐이니까.’
그 이상에 대해 꿈꾼 바가 없으니 포기하기가 쉬웠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척 물러나기도 쉬웠다.
“제가 포기가 빠르다고요? 아닐걸요.”
아니기는.
…아니, 이번 생의 목표를 포기할 수 없어 시한부의 행복을 포기함이었다.
제게야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맞이한 벅찬 즐거움이지만, 그녀에게야 잠깐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터.
제가 포기한다 하여도 작은 빛께 거짓말한 것은 아니리라.
애초에 그분께 이런 것은 다 장난이었을 테니까.
제 저열한 협박에 마지못해 어울려주신 일탈일 거였으니까.
“그 흉수를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거라면. 연말의 일을 어떻게 믿고 맡기겠니, 응?”
마음 같아서는 저를 사특하다 칭하는 저 진정으로 사특한 부자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힘이면 그건 정말 한순간의 일이지만….
‘어머니의 곁에서 죽기 위해.’
얼떨결에 두 번째 기회를 받아버린 김에 후작에게 복수하고, 제 손으로 이 비루한 삶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오래간 품어온 삶의 목표를 실현하려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여는 일까지는, 후작의 입김이 필요하니까.’
눈가가 뜨거웠다.
고이다 만 눈물이 그의 눈시울에서 말라붙었다.
‘그러고 보면 마탑에서 쫓겨난 그날도…. 왠지 곁에 계셨던 것 같았는데.’
마지막으로 울었던 날에 그런 감각도 느꼈었는데.
이런 그늘진 망상이나 하는 저 같은 종자는, 그녀의 곁에 감히 가까이 가지 않는 게 맞았다.
루시페우스는 그렇게 작은 빛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그것이 약속이었다면.
팡!
신호탄 소리와 함께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숲의 입구에 모여 있던 참가자들이 각자 눈여겨둔 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이 3소대 기사들과 함께 사냥터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뒤 컨트리 하우스에 배정된 내 방으로 향했다.
‘애들이 부디 돌발 행동을 안 해야 할 텐데.’
3소대 기사들이 어련히 잘 살피겠지만, 내일부터 마수들이 날뛰기 시작할 테니 걱정이 만만이었다.
‘그래도 그랑은 다른 쪽으로 갔으니 괜찮으려나….’
그러니까 그 와중에, 루시페우스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만 것이었다.
무운을 비는 장식 하나 달리지 않은 검을 차고서 인파에 스며드는 그의 뒷모습을.
‘…구제 불능이야.’
“전하, 푹 쉬고 계셨어요?”
이번 사냥 대회 동안 내가 머무르게 된 가장 넓은 손님방의 응접실. 약속한 대로 아멜리가 찾아왔다.
“응, 레오폴트 경 배웅 잘해줬어?”
“네에, 뭐, 배웅이랄 것까진 아니지만요….”
내 말소리에 아멜리가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일단 좀 씻으시겠어요?”
“응, 그럴까?”
시녀 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음에도, 아멜리는 제 장점인 눈치를 살려 임시 시녀 역할을 척척 해나갔다.
‘역시 싹싹하고 생활력 강한 여주인공다워.’
세르니타에서 붙여준 하녀들을 불러들여 간단한 목욕을 마친 뒤, 나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서 응접실에 다과상을 펼쳤다.
파올리 세르니타에게 미리 부탁해둔 아멜리 취향의 디저트들을 잔뜩 곁들여서.
‘아멜리를 위한 건 줄 알면 아까워 죽겠지. 내가 먹겠다니까 공들여 준비해준 걸 텐데 말이야.’
나는 마음속으로 파올리에게 사과하며 치즈크림이 진하게 발린 당근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래서, 결국 케인이 그 영애랑 헤어진 거야?”
“네, 좀 미안하게 됐지만요….”
어머어, 나는 아멜리의 말소리에 시선을 스르륵 미끄러뜨렸다. 문 앞에 서서 경호 중인 케인이 민망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면전에서 제 이야기를 하는데도 케인은 근무 중이라 마음대로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영애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결정은 케인이 한 건데.”
“그래도요. 괜히 저 때문에….”
“뭐, 옛 아가씨와의 정이 더 중요할 만큼 별로 마음이 깊지 않았나 보지. 원인 제공을 한 건 선을 넘은 그 영애일 거고.”
“저, 다 들리는데요….”
듣다못한 케인이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칭찬해주는 건데?”
“…….”
케인이 퍽 불만스럽다는 듯 낯을 굳혔다.
아멜리를 번번이 괴롭혀 온 케인의 연인, 말로테 자작 영애는 결국 아멜리에 대한 질투심을 못 참고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며칠 전 태양절 황궁 연회장에서.
제 정인인 케인의 호의를 받는 걸로도 모자라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연인이 된 그 눈엣가시가, 심지어 힐베르크 후작가의 후계자가 되게 생겼다니.
아멜리가 그녀의 것을 뺏은 것도 아닌데, 눈이 뒤집혀버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깜짝 놀랐겠어. 그렇게 인적 드문 데로 불러내서 떼로 달려들면….”
“괜찮아요. 적당한 때 레오가 와주기도 했고요.”
어찌 알고 왔나 몰라, 아멜리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황성의 대표적인 딸부잣집의 말로테 영애는 아멜리를 발코니로 불러내고는, 제 언니들과 동생들을 동원하여 집단 구타라도 할 요량이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신경전 벌이는 사이에 레오가 도착했던 것 같고.’
그러니까 그날 아멜리가 사라졌던 것이 루시페우스와의 일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한심한 걱정과 달리.
루시페우스와 단둘이 있을까 봐서 레오폴트를 보낸 거였는데.
‘괜한 오해를 했네. 그가 아니라고 하기야 했지만….’
하지만 그 이후에 아멜리와 무슨 일이 있었든, 혹은 아멜리가 레오폴트와 다정한 장면에 새삼 눈이 돌았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든….
루시페우스는 아멜리에게 집중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거겠지.
그가 태도를 바꾼 데 어떤 계기가 있다면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 애초부터 그가 대놓고 아멜리를 연모한다고 말했으니까….’
나만 헛물켠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서.
나는 씁쓸한 마음을 꾸욱 눌러 내리며 찻잔 너머로 아멜리를 살폈다.
레오폴트와의 안정적인 관계 때문일까, 나와도 적당히 친분을 쌓아서일까, 황성 생활이 생각보다 잘 굴러가서일까.
아멜리는 처음 봤을 때보다 퍽 단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글생글한 미소, 올곧게 빛나는 눈동자.
‘사랑받고 자라서, 그에게도 사랑받고. 부럽….’
…다고?
나는 불현듯 든 낯선 생각에 너무도 당황하였다.
내가? 아멜리를? 부러워해?
‘정말 미쳤지, 미쳤어. 어차피 난 흔한 ‘관객 1’인데 헛바람만 들어서.’
정말이지, 연애 감정은 이렇게도 사람을 못나게 만드는 거였다. 아멜리는 그저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인 죄밖에 없는데.
뭘 확인하네 어쩌네 해서 나를 잔뜩 흔들고 멀어진 장본인은 따로 있는데.
내가 스무 해를 기다린 여주인공과 교분을 맺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그를 어려서부터 지켜봤다지만.’
그는 기실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엮어주는 데 있어 방해꾼에 불과했는데.
언제 이렇게 본말이 전도되고 만 건지.
‘저잣거리에서 같이 다녔을 때 아멜리랑 별로 안 가까워 보였어서 그래. 레오 질투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건 내가 뭐에 씌어서 잘못 봤던 걸까? 나는 다시금 자책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멜리에게 직접 물어볼까? 태양절 연회 때 루시페우스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지만 적당한 질문이 만들어지지 않아 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그가 원작대로 아멜리에게 집착 중이라면, 분명 사냥 대회 마지막 날 연회 때….’
그의 본격적인 집착의 서막을 여는 납치 사건이 벌어지고 말 것이었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고 있으니까 구출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기왕이면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이는 아멜리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바람에 레오폴트와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화제를 전환하듯 넌지시 말했다.
“참, 영애. 요즘에는 목소리도 바꾸는 마도구가 유행이라는 거, 알아?”
“목소리를요?”
“응, 내가 쓰는 것 같은 변장 마도구야 상용화된 지 꽤 됐는데, 목소리를 변조하는 건 이번에 새로 나왔대.”
“어머. 신기하네요. 그때 그 보닛도 신기했는데.”
나는 아멜리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루시페우스의 사주를 받은 귀족파의 잔챙이들은 음성 변조 마법을 사용해 레오폴트인 척 음성 서신으로 아멜리에게 밀회를 청할 예정이었다.
거기에 걸려들어 아멜리가 납치당하는 거고.
물론 정말로 그런 마도구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루시페우스에게 그쯤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지금은 아멜리가 레오랑 가까운 사이가 됐으니 그 방법이 먹히지 않겠지만, 그들은 달리 판단할 수도 있고. 혹시 모르니까 대비는 해두는 게 좋겠지.’
아멜리가 최대한 경계할 수 있도록 한 뒤, 그들이 아멜리를 납치하려고 시도하는지 확인하는 게 관건이었다.
정말 그 일이 일어난다면, 그걸 역이용해 얽힌 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원작에서는 루시페우스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 그와 비밀리에 거래한 귀족파의 잔챙이들이 나섰으니, 그들을 노리는 거야.’
이 건은 그의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누가 루시페우스의 악행에 가담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가 안 될 일에 집착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다시 그와 살갑게 지내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의 마음을 바란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심장이, 또 손끝이 저릿했다. 나는 찻잔을 쥔 손에 힘을 꾸욱 쥐며 애써 발랄하게 말했다.
“그렇지, 흥미롭지? 혹시 누가 쓰는 거 보면 나도 꼭 알려줘. 재미있을 것 같아.”
그가 아멜리를 납치하기 위해 그 마법을 쓴다면… 하나도 재미있지 않을 테지만.
찻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