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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02화 (102/220)

102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4)

“잘못되기는요!”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말이야. 게다가 야외에서 두 밤이나….”

어휴, 나는 어깨를 작게 떨었다.

사냥 대회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치러졌다. 그간 규정상 베이스캠프인 컨트리 하우스에 자유롭게 오갈 수야 있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사냥에 임하면 그럴 새가 없단다.

‘그러니 원작에서 환각 마법에 걸린 마수들이 컨트리 하우스를 덮쳤을 때, 숲 깊숙이 들어간 참가자들이 아무도 몰랐지….’

컨트리 하우스에는 귀족파가 안전장치 삼아 남겨둔 최소한의 경호 인원만 있어서 더 아비규환이었고.

아멜리가 습격당할 뻔한 것 또한, 레오폴트는 나중에야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내 기사들이 단단히 지킬 거니까. 1소대가 내 호위로 다 와 있고, 2소대도 렌틸 자작 호위를 맡은 인원을 제외하면 그림자로 합류해 있고.’

나는 암조의 전력 배치를 재빨리 되짚으며 조카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디 몸조심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돌아오고.”

이번 사냥 대회는 여느 때와 다르니까.

나는 두 아이와 눈을 한 번씩 마주치며 신신당부했다.

아이들은 무예와 담쌓은 내 말을 크게 귀담아듣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아무리 암조에서 꼼꼼히 대비했다지만, 내가 개입하면서 변수가 너무 많이 생겼어. 이 애들이 참가하는 것도 그렇고….’

얼마 전 저잣거리에서 예기치 못한 위험에 처했던 일이 자꾸만 떠올라, 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는 루시페우스 덕분에 무사했는데….’

나는 남은 손수건 조각을 쥔 손을 꾸욱 쥐었다.

손에 남은 손수건 조각은 단 한 개.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기사가 3소대의 열 명이란 걸 알았는데.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의 것까지 열두 개면 충분한 걸 알았는데.

그러니까 이건 미련 같은 거였다.

혹시 몰라서 여분이라고 되뇌며 기사들의 머릿수보다 넘치게 만들어온 것은, 어쨌든 행운을 빌어주고 싶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계획을 망치려는 것과 별개로….

아까부터 계속 이편을 주시하고 있는 남자.

‘왜 자꾸 저런담. 레오랑 있을 때부터 저러길래, 아멜리를 보느라 그러나 했는데.’

정원 구석의 고목 아래. 루시페우스는 귀족파 영식들에게 둘러싸인 채, 내 쪽만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을, 그를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나 또한 그를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발길을 끊어놓고서.’

혹시나 하여 손거울도 늘 갖고 다니는 중인데.

하지만… 끊임없이 찾아오고 내 약점을 빌미로 무언가를 간구한 게 다 장난이었던 것처럼, 그와의 접점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그것도 내가 마음을 접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변덕으로.

‘그러면서 왜 제가 저렇게 슬픈 낯을 해…?’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일부러라도 더 그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애매하게 남은 손수건 한 조각을 계속 쥔 채로.

“부디 몸조심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지체 없이 돌아오고.”

누구에게나 다정하신 작은 빛께서는 오늘도 많은 이들에게 다정을 나누셨다.

그것이 그녀의 수하들이기도, 그녀의 조카들이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만인을 대함에 있어 제게 비친 것과 같은 온기를 나누었다.

‘내게도, 내가 갈구하지 않는 이상 다정할 이유가 없는 분이시니….’

그러니까, 저만 착각하지 않으면 다 되는 일이었다.

그가 단념하자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륙의 고귀함을 타고나신 작은 빛께서는 타인보다 높은 자리에서 공평히 시선 한 번 스치셨을 뿐, 실수로라도 그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으셨다.

‘모두 내 선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단념하기로 한 것은 제 선택이었지만, 거기에 내몰리고 만 데는 그의 의지가 없었으니까.

‘실망하셨을 테지.’

아니, 실망이라는 말을 쓰는 건 오만일 수 있었다. 그녀가 제게 무슨 기대를 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약속. 찾아뵙기로 해놓고 안 갔으니 약속을 안 지킨 셈이지.’

그래. 그런 식으로라도 실망하셨을 거였다.

‘해명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으니까. 내 해명을 기다리지 않으실 수도 있고….’

태양절. 황궁에서의 연회가 끝나고 귀택했을 때.

언제나처럼 후작의 마차를 먼저 떠나보내고서 주변을 단속한 뒤 돌아온 루시페우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딘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몇 번이고 도망쳤다가 돌아와야만 했고, 마탑으로, 동대륙으로 또 아카데미로 떠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후작저의 현관.

마치 무덤의 입구 같고 마수의 아가리 같은 그 살풍경하고도 어둑한 입구.

그 장식도, 주변의 조경도, 그 저택의 주인마저 언제나와 다름이 없었지만…. 그날따라 그 모든 것이 생경하게만 보였다.

‘달빛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제가 며칠을 감히 드나든 그녀의 발코니도, 주제넘은 소리를 주워섬겼던 황궁 대연회장의 후원도 모두 달의 신의 축복을 받고 있었기에.

그 달빛 아래서 그녀의 은사가 더욱 찬란히 빛났기에.

루시페우스는 얼마간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현관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그에게 달빛은 그가 있을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인 적은 없었는데.

‘얼른 정리하고 뵈러 가야….’

그 낭만적인 상념을 떨치고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순간.

“들뜨고야 만 거니, 동생아?”

“그래도 너무 들뜨진 말면 좋겠다. 너는 반쪽도 아니고 반의반 쪽 아니니?”

어린 시절과 같은 제 의형의 비아냥이 쏟아졌다.

후작저의 홀 한가운데 자리한 두 개의 계단. 루시페우스의 방이 있는 손님방 구역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도미닉이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위스키 잔, 다른 손에는 위스키병, 멀리서도 풍겨 오는 알코올 냄새.

그 낯과 차림새만은 말끔해 보였지만.

연회장에서 수가 틀려 버려서일까, 그는 퍽 불쾌한 기색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형님.”

“형님이라.”

도미닉이 한쪽 입꼬리를 기이하게 들어 올리며 계단에서 내려섰다.

이렇게 마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얼마 뒤에 도미닉이 서대륙으로 떠났으니 거의 7년 만이었다.

오늘 행사에도 함께 참석했으나 말조차 섞지 않았다. 그는 후작보다 루시페우스를 더 멸시했으니까.

도미닉이 서대륙으로 떠나던 시절 빼빼 말랐던 사내아이는 사교계의 모두가 선망하는 근사한 신사로 자라났지만…. 도미닉에게 루시페우스는 여전히 하찮은 밥버러지에 불과했다.

루시페우스는 제 의형에게 그가 원하는 대꾸를 해주었다.

“…소가주님.”

“건방지게.”

쯧, 짓씹듯이 말한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얼음 달각이는 소리가 적막한 홀에 나직하게 울렸다.

“나를 부마로 만들어줄 미래의 피앙세께서는 참 너그러운 성정을 가지셨지.”

“…….”

“너같이 더러운 핏줄 따위에게 눈길도 주시고 말이야.”

루시페우스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세실리아.

그 아름다운 달빛 아래서, 그녀의 은빛 머리칼은 태양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다.

생애 처음으로 만져본 타인의 머리칼….

감히 제가 맨손을 드러내어 스치듯 만져볼 때, 창백한 손끝에 그 은빛이 배어난 그 풍경을 바라보면 루시페우스는 목구멍에 치받는 무언가를 느꼈다.

미천하고 저주받은 핏줄의 제가 얻을 수 있는 고귀한 그녀의 일부가 단지 그 정도일 테니까.

루시페우스는 간신히 말을 짜냈다.

“…너그러우심은 사실입니다만.”

그래서 저 따위와 어울려 주심도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다 틀렸다.

“경의 형에게는, 확실히 안 될 일이지.”

그는 달빛처럼 흐르던 세실리아의 말소리를 떠올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하, 거기에 시선이 닿은 도미닉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그래, 너 같은 악마 자식도 사람 행세를 하다 보면 착각할 수도 있겠지.”

도미닉이 발걸음을 내디뎌 루시페우스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서로의 구두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 거리에서, 도미닉은 눈을 치뜬 채 이기죽거렸다.

“네가 그사이 아버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의 핏줄에게 그쯤은 손쉬웠을 테지?”

루시페우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저보다 눈높이가 낮아진 이지만 루시페우스는 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 그의 폭언을 감내하던 게 버릇이 되어서일까.

그때에 비하면 퍽 온건한 빈정거림이었으나, 그렇대서 아프지 않느냐면… 해묵은 외로움과 서러움이 밀려오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의 서러움은, 세실리아의 눈동자에 물든 금빛 반점을 볼 때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네가 접경 지역에서 자라게 하는 데 성공했다던 베라초가 다 불타고, 아버지께서 내 기반으로 주시려던 힐베르크령을 놓치게 되었다지?”

“…그게.”

“아버지는 속였는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비죽 웃은 도미닉의 손이 순식간에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을 향했다. 위스키병에 들었던 것이 콸콸, 루시페우스의 목깃에 쏟아졌다.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라. 퍽 재밌는 이름도 붙었더구나.”

그의 옷차림에서 유일하게 희었던 드레스셔츠가 그늘진 구릿빛으로 젖어들어 갔다.

“알비누스라니. 너를 구성한 것 중 알비누스는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

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아, 그 여리신 분께서는 이 향만으로도 기절하실 텐데. 루시페우스는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그 흉수를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거라면. 연말의 일을 어떻게 믿고 맡기겠니, 응?”

루시페우스의 옷깃에서 위스키가 뚝뚝 흘러내리는 것을, 도미닉은 퍽 만족스러운 낯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그 끔찍한 일을 어찌 맡기겠느냐는 말이다.”

꾸욱, 윙팁이 화려하게 장식된 도미닉의 구두가 아무 무늬 없는 루시페우스의 구두를 지르밟았다.

“네놈의 간악한 능력이 누구를 향할지 어찌 알고 애써 모은 수정을 내줘?”

어젯밤, 얇은 실크 슬리퍼를 사이에 두고 세실리아의 조붓한 발이 맞닿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도미닉이 그런 걸 알 리는 없었지만, 세실리아를 감히 눈에 담은 것을 힐난하려던 게 목적이었다면 그는 성공하였다.

루시페우스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오래간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기다리실 텐데.’

제 방으로 돌아온 루시페우스는 딱딱한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아 한참을 있었다.

도미닉이 위스키를 쏟아부은 셔츠를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차림으로 갈 수는 없는데. 불쾌해하실 테니 갈아입어야…. 아.’

이런 차림이 아니어도, 저를 불쾌해하실 텐데.

감히 자꾸 가닿고, 약점을 갖고 협박하고, 밤의 시간을 나눠달라 강요하고.

감히 저 따위가.

‘또 감히, 독점하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황궁의 연회장에서 제 의형의 수작을 받아내던 작은 빛께서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셨을 때.

루시페우스는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깊은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래, 그건 이름 붙이고 나니 질투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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