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3)
“태양절의 태양이 내리쬐는 검은 숲의 초원에서 모두를 다시 만나 반가운 일이오.”
개회식을 위해 마련된 단상에 올라서자 사냥 대회에 참석한 사교계의 일원이 한눈에 다 보였다.
황실 대표로 발언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하염없이 떨려왔다.
‘나는 관객이니까. 여유롭게, 여유롭게….’
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써 익숙한 얼굴들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아….’
귀족파의 행사인 만큼 스칼렛 또한 참석하여 귀족파 영애 무리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원작에서는 사교계 인맥을 늘리기 위해 혈혈단신 참석했던 아멜리는, 이제 당당히 레오폴트를 응원하기 위해 와 있었다.
그리고 참가자 무리에 섞여 있는 레오폴트까지.
‘예전 같았으면 나랑 눈 마주치려고 애썼을 텐데.’
가암히 내가 개회사 중인데도 아멜리와 눈 마주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는 얼굴 하나하나를 살피다 보니, 떨리던 마음이 적당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우리 아수라마수라는 태양의 은총을 받은 제국. 신성력으로 축복받은 우리 기사들의 강인함으로써 그늘에서 번식한 짐승들을 제압하여, 주신께서 보우하심을 널리 증명하길 바라오.”
인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준비해온 개회사를 막힘 없이 읊던 순간.
어느 한 곳에 시선이 가닿아, 하릴없이 심장이 무겁게 죄고 말았다.
자석에 이끌리듯 붙박이고 만 내 시선의 끝에는….
“그리고 그대들의 강함을 뽐내어, 삼림의 미물들에게 본대륙에서 누가 가장 주신께 가까이 닿아 있는지 보여주기를.”
사냥복마저 칼같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루시페우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흘 만이었다.
“은사를 진 자로서 바라건대.”
그와 한번 눈이 마주치고 나자, 나는 어째선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 역시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보기 전에도 계속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시선을 거둘 생각 없는 것처럼.
연설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일 뿐인데, 또 내가 과대 해석하는 거겠지….
나는 내처 준비한 말을 이었다.
“황실의 충실한 신하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무사히 귀환하길 당부하는 바이오.”
그러니까… 그의 일이 실패하여 큰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가 마음먹은 일이 틀어지고 말기를.
후작을 위해 저지르려는 일도, 일그러진 연심도 모두 틀어지고 말기를.
내가 바라지 않아도 저 강한 남자는 무사할 테니까.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전하, 개회사 정말 멋있었어요. 정말 위엄 넘치시던걸요?”
단상에서 내려온 나는 곧바로 아멜리와 레오폴트 쪽으로 다가갔다. 귀족파의 영애들이 초조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고마워, 영애.”
“올해는 사냥 대회까지 다 나오시고, 정말 외부 활동 많이 하시네요.”
“로즈버리 영애가 나더러 멋있다고 해서 견제하는 거 아니지, 레오폴트 경?”
“제, 제가 왜요!”
아멜리가 까르르, 청아한 웃음소리를 울렸다.
내 개회사가 끝나자 컨트리 하우스의 정원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곧 사냥 대회가 시작될 거였으니까.
참가자들은 마지막으로 무구를 점검하느라 바빴고,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참관객들은 그들의 선전과 무사를 기원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손수건 이벤트.
“어머어, 레오폴트 경. 검 손잡이에 참 예쁜 장식이네.”
“이 손수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죠!”
헤헤 웃는 레오폴트의 해맑은 목소리에 아멜리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아, 커플 지옥!
내가 이들이 꽁냥대는 걸 보기 위해 평생을 산 사람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보기가 싫은 걸까?
그 이유를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나는 부러 발랄하게 말했다.
“아아, 나도 같은 거 있어. 로즈버리 영애가 수놓은 손수건.”
“이, 이건 다르다고요…!”
“달라? 내 것도 충분히 공들인 자수던데….”
나는 아멜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그게….”
“사랑! 사랑이 담겼어요!”
“레오!”
아멜리가 난처하게 얼버무리려 할 때 레오폴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하, 커플 지옥….
“그럼, 경은 내 손수건 필요 없겠네?”
“손수건요? 전하께서요?”
수를 놓으셨다고요? 레오폴트가 깜짝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손을 잘못 찔리기라도 하면 위험하니, 나는 귀부인의 소양 중 하나인 자수도 배우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내 품에서 길게 잘린 천 쪼가리들을 꺼내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내가 직접 수를 놓을 순 없으니, 오래 쓴 손수건을 잘라 왔어.”
“아, 하긴 전하께는….”
“응, 우리 기사들도 참가해서 말이지.”
나는 한쪽에 모여 있는 알렉스의 3소대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전하께 손수건 받은 적이 없어서 탐나긴 하지만…. 전하의 기사들을 위해 제가 양보할게요.”
“응, 연인의 손수건이랑 같이 달면 부정 탈 테니까.”
“아, 그게 아니라…!”
레오폴트가 당황하여 쩔쩔매었다. 나는 왠지 쌤통이다 싶어 키득거렸다.
“참, 영애. 부탁이 있는데.”
“부탁요?”
“내가 오늘 새벽같이 움직이는 바람에 시녀들이 같이 못 왔어.”
같이 못 온 게 아니라 일부러 안 데려온 거지만.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다면 대회 동안 나랑 같이 다녀주겠어?”
“네? 제가요?”
아멜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호바다를 담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황녀의 시녀 자리는 고위 귀족 가문에서도 못 들어가서 안달인 자리. 아무리 임시라지만 아멜리에게는 더없는 영광일 거였다.
나와 같이 다니는 것 자체로 평판에도 도움이 될 테고 말이다.
“하지만, 제가 어찌 감히….”
나는 오늘의 호위로 내 뒤에 서 있는 케인을 턱짓하며 말했다.
“케인도 있으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불편하긴요, 저야 황송하지만요….”
하지만 왜 하필 저를…. 그리 말하며 아멜리가 두리번거리는 게, 귀족파 영애들보다 제가 처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처지기는, 내 여주인공은 너인데.
나는 내색할 수 없는 마음을 숨긴 채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피차 혼자 온 사람들끼리 정답게 있자고. 잘 부탁해.”
“부탁은 제가 드려야지요….”
아멜리가 귀 끝까지 붉어져서는 고개를 떨구며 내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레오폴트는.
“전하, 감사해요….”
한없이 감동받은 낯을 짓는 것이었다.
아멜리가 오로지 저를 응원하기 위해, 적대적인 사람들의 한복판에 온 것을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지켜주겠다는 듯 나서니 고마울 수밖에.
‘응, 아니야. 지켜주는 건 맞는데, 너 때문은 아니야.’
환각 마법에 걸린 마수들이 미쳐 날뛸 때를 대비해서였으니까.
사냥터의 마수들이야 3소대 기사들에게 맡겨 두었지만, 아멜리는 아멜리대로 문제였다.
원작에서는 스칼렛이 제 추종자를 시켜 마수 하나를 유인하는 바람에 아멜리가 큰 위기에 처한다.
‘스칼렛이 그때와는 다르니 그럴 일이 없지만…. 원작의 억지력이 또 어떻게 발동할지 혹시 모르니까.’
내 여주는 내가 지킨다.
나는 방긋 웃으며 아멜리의 손을 쥔 손에 힘을 꼬옥 주었다.
“레오폴트 경 배웅 잘하고, 이따 내 응접실로 꼭 와야 해?”
“네, 네! 전하.”
두 사람과 헤어진 나는 3소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경들, 사흘만 힘내. 우승하란 말은 하지 않을게.”
그리 말하며 나는 길게 자른 손수건 뭉치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열 가닥 남짓한 천 쪼가리들이 마치 치어리더의 응원 수술처럼 하느작댔다.
“차라리 마수 사냥이 목적이라면 마음 편하겠습니다만….”
알렉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이 업무를 핑계로 마음껏 검을 휘두를 생각에 신난 듯했다.
“마수를 많이 사냥하면 덩달아 사람들도 지키는 셈이 되니까.”
“역시 그렇죠?”
그가 눈을 빛내며 제 휘하의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호승심으로 번득이는 그의 눈동자에는, 환각 마법에 걸렸건 안 걸렸건 최대한 많은 마수를 사냥하겠다는 비뚤어진 결심이 엿보였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의욕 넘치는 내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내내 묵묵히 서 있던 케인이 말했다.
“1소대가 다 내 호위로 붙어 있을 건데 무슨 걱정이야?”
“그래도,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기까지 말한 케인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일부러 마수에게 환각 마법을 걸어서 폭주시키는 거라면, 관람객의 안전도 보장 못 하는 것 아닙니까?”
자신들의 실력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 안전을 우선시하기에 조심스레 하는 말이었다.
어느새 알렉스도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경들이 오늘 정신 바짝 차려야지.”
나는 두 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3소대는 사냥터에서 열심히 마수 제압하고. 1소대는 열심히 나랑 관람객들 지키고.”
“넵.”
“…예이.”
내 말에 케인과 알렉스, 그리고 그들의 휘하에 있는 기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자리에 나타나진 않았지만, 엘런의 2소대 역시 오늘의 그림자로서 내 말을 들었을 거였다.
“그리고 3소대는 특히. 유스티안과 헤르미아나도 있으니까.”
“잘 살피겠습니다.”
“그 애들을 지키란 소리가 아니라, 평범한 사냥터로 만들어 달라는 거. 알지?”
“알다마다요. 걱정 마세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씨익 웃어 보이고는, 손수건 조각들을 쥔 손을 다시금 흔들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 친애하는 경들에게 무운을 빌고자 해.”
“아이고, 이런 영광일 데가요.”
그리 말하며, 알렉스는 입매에 빙글빙글 웃음을 건 채로 으스대듯 어딘가에 시선을 스쳤다.
‘경매장 같이 다녀온 이후로 얘가 제일 심해.’
그러니까 그쪽에 그가… 있다는 거겠지.
암조 애들의 착각이 어찌나 깊은지, 요 며칠 내가 저들이 놀리는 걸 무시하는 것쯤은 일종의 변덕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짜, 사람 속도 모르고 말이야.’
나는 가라앉는 마음을 추어올리려, 애써 목소리를 낭랑하게 울렸다.
“며칠 사냥터에서 고생하게 생겼으니,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말이야.”
알렉스가 검대에서 검을 풀어, 손잡이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손잡이의 가드 바로 아랫부분에 길게 자른 손수건 조각 하나를 묶었다.
“영광입니다, 전하.”
“나중에 포상 두둑이 해줄 테니까. 사흘만 애써줘.”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를 시작으로 나는 열 명의 기사들의 검 하나하나에 손수건 자른 걸 하나씩 묶어주며 덕담을 건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니, 유시.”
“이모님!”
후계 구도가 정해지지 않았어도 둘 중 하나는 언젠가 그레이스의 후계자가 될 터.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은 수많은 귀족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성기사단에서 그들과 안면을 튼 이들도 있었고, 평소 보기 힘든 미성년의 황손들을 보기 위해 다가온 이들도 있었다.
내가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에게 다가가자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무운을 빌어. 무리하지는 말고, 응?”
“그랑프리는 제가…!”
“유시. 적당히 바람직한 기량을 뽐내고 무사히 돌아오는 게 헤니와 네 본분이야.”
내 말에 헤르미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 대회의 조명은 기사들이 받게 놔두고.”
나는 상체를 기울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들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너희는 참가하여 자리를 빛낸 것만으로도 귀족파에게 큰 빚을 지우는 셈이니까.”
“네, 이모님.”
“…그래도요, 기왕이면.”
유스티안은 별로 납득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무예가 비등하다 해도 손위인 헤르미아나가 신성력 보유량부터 여러모로 앞서는지라, 유스티안은 늘 제 누이에 대한 승부욕에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아직 열네 살인데.’
보통 그들 나이 또래의 기사 수련생들은 참가조차 못 하는데, 재능이 특권이고 그 재능을 선사한 혈통이 특권이었다.
나는 내 조카들의 검 손잡이에도 손수건을 자른 것을 하나씩 묶어주었다.
“너희 둘 중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내가 황태자 전하께 면목이 없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