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100화 (100/220)

100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2)

태양제 사냥 대회는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닫도록 아수라마수라 일족을 보내신 주신께 영광을 돌리는 행사다. 그래서 사냥감으로 마수를 풀었다.

그리고 그 마수를 푸는 일에 귀족파의 흉계가 깃들어,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예정이었다.

마수에 대한 공포를 확산해 황실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마구잡이로 사들인 수정 값을 폭등시키기 위해.

‘스칼렛이 여기에 연루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녀가 원작에서만큼 귀족파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는데도, 게이블스 후작은 착실하게도 오늘의 무대에 스칼렛을 활용하려고 했다.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은 버리기도 쉽다, 이거지.’

나는 속으로나마 작게 이를 갈며 내 친우의 아비를 힐난했다.

“아버지께서 이번 사냥 대회를 맡아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한다고 했어?”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사했어요. 전하께서 말씀해주신 게 불현듯 떠오르지 뭐예요.”

얼마 전 안전 가옥에서 렌틸 자작과 회동했을 때. 스칼렛이 사냥 대회 주관인 이야기를 꺼내길래 어찌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오늘 사냥 대회에서 생긴 문제로 스칼렛은 사교계에서 경애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 될 거였으니까.

‘원작에서는 패악질도 잔뜩 부렸고, 레오폴트 연모하는 역할에 심취한 탓에 스칼렛을 ‘꽃’으로만 볼 뿐 인재로 보는 이가 없기도 했고….’

반면 지금의 스칼렛은 누가 뭐래도 젊은 귀족들 사이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니까.

이번 사냥 대회에서 사냥감으로 풀린 마수들은 광역 환각 마법에 걸린 채, 무장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 달려들 것이었다.

환각 마법이 쓰인다는 소리는, 그러니까 오늘….

‘그가 오겠지.’

열흘 만에 보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콩콩 뛰는 것이….

‘아니, 오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 아, 신경은 써야 하는구나.

그 흉계를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내가 난생처음 사냥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어차피 그를 막을 수는 없을 텐데.’

내 기사들이 모두 그에게 달려든대도 승산이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대신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었다.

평생 과보호로 수많은 기사를 거느리고 다닌 내가, 오늘도 과할 정도로 많은 기사를 데리고 나타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선 늘 과할 정도로 많은 호위를 데리고 다니시더군요.”

윽, 이런 데서도 그와의 일이 떠오르다니. 나는 또 가슴이 꾸욱 죄었다.

‘무엇보다 사냥 대회에서는,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납치하는 이벤트도 발생할 거고….’

그래. 그는 아멜리에게 집착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만 거겠지.

나처럼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 시간을 할애할 바에야, 제가 연모하는 레이디를 소유하기 위한 수작에 공을 들이려는 거겠지.

‘서로 약점 잡고 협박하는 사이는…. 친구로든 지인으로든 비정상적인 관계고.’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속절없이 처참해졌다.

이런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어 나는 마차 차창에 콩, 이마를 기대었다. 창밖으로 평온한 숲의 정경이 스쳤다.

‘그래, 잘됐어. 어차피 마음 접으려고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이런 식이기를 바란 적은 없는데.

콧잔등이 시큰해질 무렵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누님을 이겨 보일 겁니다.”

“어디 한번 해보렴, 귀여운 유시.”

“그렇게 부르지 마시래도요…!”

곁에서 두 소년 소녀가 왁자지껄 아옹다옹하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황실의 상징인 은빛 머리칼을 하나로 높이 묶은 새초롬한 표정의 소녀와 짧게 삐죽삐죽 자른 은발 아래로 군청색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는 소년.

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의 조카인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 그레이스의 자식들이다.

열여섯인 헤르미아나와 열넷인 유스티안은 나이도 비슷, 신성력도 비슷, 문재(文才)도 비슷하여 아직 누가 그레이스의 후계가 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헤르미아나의 쪽이 더 우세하지만…. 아직 그레이스가 즉위하지도 않았으니 후계에 대해 논하는 건 시기상조니까.’

그래서인지 일찍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던 그레이스와 달리, 두 아이는 우선 성기사단에 들어가 기사 수련을 받고 있었다.

‘아수라마수라가 마계와의 전투를 종식하며 세워진 왕조라, 일종의 정통 무가인 셈이니까. 무력 바닥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오늘, 두 황손이 사냥 대회에 황실의 성의를 보일 겸, 저들의 무예도 선보일 겸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레이스가 행차하여 격려사를 읊을 자리에 내가 참석하는 대신이기도 했다.

“올해 제가 외부 행사에 자주 참석하다 보니 세르니타 영애가 사냥 대회에도 꼭 참석해 달라고 해서요. 언니 대신 제가 가 봐도 괜찮을까요?”

“나야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리 멀리 가도 괜찮겠니?”

“그간 언니도 그렇고 부모님께서 제 편의를 많이 봐주신걸요. 이렇게라도 언니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나눠 진다면 제 마음이 편할 거예요.”

“네 마음 씀씀이야 늘 고맙단다. 그렇다면 나 대신 헤니와 유시를 데려가 주면 어떨까?”

세르니타 영애의 초청을 핑계로 댔지만, 그레이스는 분명 내게 무슨 의중이 있으리라 짐작하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자식들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리라.

‘내가 귀족파 앞에서 처신하는 걸 보고 배우라는 심산이겠지. 사냥 대회에서 사건이 발생할 줄 알았다면 뜯어말렸을 텐데….’

원작에서는 황태자인 그레이스가 참관한 사냥 대회에서 마수가 날뛴 것을 두고, 귀족파에서 황실에 신의 축복이 다했다는 식으로 여론을 선동했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사냥 대회에 참석하면 안 되기도 했다.

대신 내가 참석함으로써 그런 여론전도 막고, 인명 피해도 대폭 줄일 수 있을 거였다.

황실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임무였다.

‘그래. 이 중대사에만 집중하는 거야….’

내가 결연한 마음을 다지는 사이, 조카들은 옆에서 여전히 티격태격했다.

“오늘 그랑프리는 제가 잡을 거예요.”

“그랑프리 잡겠다고 들쑤시다가 애먼 기사들 피해 주지 말고.”

“피해를 왜 주나요? 제가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할 건데요.”

“유시, 참가에 의의를 두고 마(魔)사슴 몇 마리나 잡아서 이모님께 바치면 다들 감복하여 박수쳐줄 텐데, 뭐 하러 진을 빼니?”

“이모님, 이모님도 마사슴 수십 마리보다야 그랑프리 한 마리가 낫지요?”

하하, 청소년들이란 기운차기도 하지….

나는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 조카들의 활기에 벌써 지칠 것 같았다.

그랑프리, 최고 난도의 사냥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사냥한 마수의 질과 양을 모두 고려하여 점수를 매기는 사냥 대회 시스템상, 다른 사냥감을 모두 잡아도 그랑프리 한 마리만 못했다.

그리고 이번 사냥 대회의 그랑프리는… 관객석으로 돌진할 예정이었고.

“나야 너희들이 아무도 안 다치는 게 제일 좋지.”

“다치지야 않겠지요!”

유스티안이 불쑥 하는 말에 헤르미아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무예에 재능이 출중하여 자신만만인 듯했다.

‘원작에서는 얘들이 사냥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서 어찌 될지 모르는 게 문제야.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내가 참석해서 달라지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이번 사냥 대회 동안 내가 지켜야 할 내 조카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 애들이 황족답게 신성력이 강대한 만큼, 오히려 내가 보호받는 편이 이치에 맞겠지만….

귀족파를 제외하면 이번에 일어날 일은 나만 아니까.

그리고 환각 마법을 걸 그….

아, 생각이 또.

‘미치겠네….’

“전하, 이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손 전하들께서도 먼 여정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를 태운 황실 마차의 행렬이 검은 숲 사냥터의 컨트리 하우스에 다다랐을 때.

반백의 수염을 멋있게 기른 세르니타 후작이 넓은 정원 입구에까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환영해주어 고맙네.”

“오시는 길은 평온하셨는지요?”

“영지가 퍽 아름답더군. 황태자 전하께서 늘 세르니타의 여름을 추억하시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두 분 전하들께서 저희 영지에 대해 그리 이야기 나누셨다니, 황송합니다.”

결벽적이고 예민한 인상의 세르니타 후작은 나름대로 사람 좋은 미소를 거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저 미소 뒤에 오늘 벌일 음모에 대한 속셈만 없다면 참 좋은 일이겠지만.

“전하, 와주셨군요! 참석하시겠다고 친서를 보내주셨을 때만 해도 믿기지 않았는데, 이렇게 저희 컨트리 하우스에 와 계신 걸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나요.”

“영애가 내게 보여준 우정이 뜻깊은걸. 기다려줘서 고마워. 사냥 대회의 성공을 기원해.”

“감사해요. 제가 처음으로 주관하는 행사인데 전하께서 자리를 빛내 주신다니 어찌나 설레던지…. 어젯밤 잠도 제대로 못 잤답니다.”

갈색 머리를 높이 묶어 땋아 내리고 사냥복을 차려입은 세르니타 후작 영애 파올리가 생긋 웃었다.

오늘 내 방문은 공식적으로 다과회 멤버인 그녀의 초대에 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렇게 해맑지. 얘도 세르니타 후작에게 버리는 패인 걸 텐데….’

나는 그녀가 세르니타 후작 슬하의 1남 3녀 중 둘째 딸인 것을 떠올리며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전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전하.”

“내가 너무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은사를 지신 분께서 이 먼 곳까지 걸음 하시는데, 그 기다림조차 기꺼운 법이지요.”

세르니타 후작은 연신 듣기 좋은 소리를 해댔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제국의 작은 별, 세실리아 4황녀 전하, 헤르미아나 1황손 전하, 유스티안 2황손 전하 드십니다!”

내가 세르니타 부녀의 안내를 받아 정원으로 들어서자, 개회식을 위해 정원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또 저런 나무 밑에.’

어째서 이 많은 사람 틈에서 그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이는 걸까?

나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시선을 부여잡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파올리, 네가 전하를 안내해 드리거라.”

“전하, 이쪽으로요.”

“헤니, 유시, 기사들하고 같이 가 있어.”

오늘 최대한 많은 기사를 동원하기 위해, 암조 기사들도 사냥 대회 참가자로 등록시킨 참이었다.

대회 참가 팀인 알렉스 휘하의 3소대는 헤르미아나와 유스티안과 함께 참가자들 인파에 녹아들었다.

컨트리 하우스의 정원은 검은 숲 방면의 울타리를 허물어 숲의 일부처럼 꾸며져 있었다. 황실 연회장보다 넓은 그 공간에는 무구를 갖춰 입은 참가자들과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 참관객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정말 많이들 모였네. 며칠간 손님 맞이하느라 고생했겠어.”

“태양제 사냥 대회는 세르니타만이 질 수 있는 영광인걸요. 그저 즐겁기만 해요. 전하께서도 와주셨고요.”

단상 쪽으로 이동하며 내가 하는 말에, 파올리가 헤쭉 웃으며 말했다.

말이 세르니타 사냥 대회지, 귀족파가 연합하여 주최한 탓에 그간 다른 귀족파 부인들이 돌아가며 맡아온 일이었다. 파올리는 그토록 큰 행사를 맡게 된 것에 굉장히 들떠 있는 듯했다.

곧 생길 사고에 꼬리를 쉽게 자를 수 있도록, 가문에서 입지가 약하고 혼처도 정해지지 않은 제가 이용당하는 것도 모르고.

“전하께서야말로 오시자마자 쉬시지도 못하시고요.”

“내가 일부러 오늘 도착하기로 한걸.”

사냥 대회는 오늘 오전부터 사흘간 치러졌다. 거기에 사냥 대회 전후로 열리는 연회 또한 행사의 별미였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대부분 전야제인 어제의 연회부터 참석한 참이었다.

나는 보안과 건강상의 이유로 오늘 도착한 것이었고. 하지만 무엇보다….

‘이제 와서 그렇게 쳐다봐 봤자….’

마주치기 곤란한 사람이, 한편으로는 내 발코니에 찾아들기를 여전히 바라게 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바보같이.’

내가 파올리의 안내를 받아 컨트리 하우스 앞에 자리한 단상 쪽으로 가는 내내… 그의 시선이 끈덕지게 따라붙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애써 무시한 채, 단상으로 향했다.

雪花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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