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얄팍한 속임수의 유통 기한 (1)
며칠간 내 발코니를 드나든 것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그 이후로 루시페우스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손거울로도 역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야, 뭐야.’
신기루 같던 며칠 밤의 추억. 달고도, 설렜던….
“다네요.”
“응?”
“달아요.”
달긴 뭐가 달아?
그가 솜사탕의 맛을 진지하게 선언하던 걸 떠올릴 때마다 손끝이 홧홧해져, 나는 주먹을 꼭 쥐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일이 생겨서겠거니 생각했다.
‘힐베르크 후작이 복귀한 일로 곤란을 겪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자….
‘또인가.’
그날 밤 나 스스로에게 느꼈던 실망감이 곱절로 커졌다.
내 역할을 잊고, 루시페우스의 집착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마음을 위해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지키도록 보낸 그날 밤의 실망감.
그러니까 결국, 누군가에게 기대하게 되어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말아서.
‘그런 감정은 찰나일 뿐인데.’
묻어두면 사라질 거였는데.
마음을 줬다가 배반당하고 마는 건 내게 익숙한 일이었다. ‘나’에게야 익숙하지만, 세실리아로서는 처음인 일.
그러니까 스무 해도 넘는 세월 만에 또 겪어버린 일이었다.
‘어쩌면 나랑 헤어지고 나서 아멜리에게 집착하게 될 상황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니까 결국, 내가 무엇을 하건 간에 그는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전하, 듣고 계세요?”
“으, 응? 아, 미안. 피곤해서.”
아, 맞다. 소대장 회의 중이었지.
피곤…하기야 했다.
평소 자정 전에 잠들던 내가 그와 만나느라 늦게 자기 시작했고, 요즘은 새벽이 깊을 때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를 기다렸던 것도 같고….
‘이따금 심장이 죄는 듯한 것도 다 수면 부족이어서겠지….’
왠지 답답한 마음에, 나는 주먹으로 명치께를 꾸욱 눌렀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속 안 좋으세요?”
“황궁의를 부를까요?”
“저, 헨리에테 경. 소화제를.”
“별거 아니야.”
내 컨디션에 늘 예민하게 구는 암조의 세 소대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요 얼마간 계속 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지라 다들 걱정하는 눈치였다.
주군 실격이다. 정신 차려야지.
나는 눈꺼풀에 달린 미련을 떨치듯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일하자, 일.’
일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 건 내가 신성력 하나 없어도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황실의 막내라는 거고,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올해 일들을 잘 해내야 하니까.
나는 두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다시 얘기해줘. 잠깐 못 들었네.”
“네에.”
엘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피며 다시금 보고를 이었다.
“우선, 렌틸 자작님과 만나겠다고 귀족파 여러 가문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게이블스 쪽은?”
“일단 칩거 중입니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게이블스를 담당하는 엘런의 보고를 들으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스칼렛은 괜찮을까?”
“워낙에 처신을 잘하시니까요. 후작이 의심하시기는 했다지만 영애님에 대해 잘 모르…시잖습니까?”
엘런이 스칼렛에 대한 후작의 평가를 굉장히 에둘러 표현했다. 나는 비웃음을 굳이 지우지 않으며 대꾸했다.
“응, 스칼렛이 그런 정치적인 수를 썼으리라곤 상상도 못 할 인간이지.”
“예에. 그래서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자작님께 이를 갈고 있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좋아, 좋아. 귀족파 반응은 어때? 줄을 서려는 쪽? 경계하는 쪽?”
“아직은 경계하는 쪽에 가깝죠. 워낙에 갑작스러우니…. 다만 자작님이 전하의 스승이시니, 그분의 행보에 전하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추측하는 쪽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딘진 몰라도 똑똑하네.”
내 친구의 아비와 달리 말이야.
나는 태양절 연회 때 혼란스러워하던 게이블스 후작의 얼굴이 떠올라 고소한 마음이 되었다.
‘스칼렛이 제가 그리 싸고도는 아들보다 훨씬 잘난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온 대가가 이거야, 이 아저씨야.’
내 얼굴에 만족감이 깃든 걸 확인한 엘런이 말을 이었다.
“대부분 귀족파 주류에서 동떨어진 가문들입니다. 자작님 타운 하우스에 열심히 선물을 넣고 있어요.”
“경호 꼼꼼하게 하고.”
“예. 2인 밀착 경호에 그림자 기사도 둘 더 붙여 두었습니다.”
“좋아.”
감쪽같이 사라졌던 게이블스 선대 후작의 영애가 학자의 탑에 들어가 있었으며, 황실로부터 렌틸 자작 위를 받아 황실 가정교사로 활동해왔단 사실에 귀족 사회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뒤집어졌다.
무엇보다 지금의 게이블스 독주 체제에 불만이던 귀족파 일부가 신났다.
‘게이블스가 윌로우 일로 황실에 반항하기 시작하고서부터 중도로 돌아선 이들이 많다는 거니까.’
그렇지. 후계자가 잘못해서 징계 받아놓고 황실에 뻗대는 건 창피한 일이지.
그런 이유로 귀족파의 혈통을 지녔으되 황실과도 긴밀한 렌틸 자작을 위시하여 중도파를 만들려는 이들도 있을 거였다.
아니면 최소, 그런 기미를 보임으로써 게이블스를 견제하고 싶거나.
‘뭐, 그것도 귀족파를 견제하기에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스칼렛이니까.’
태양제가 끝나고 원로원 휴회 기간이 끝나면 슬슬, 몇 년을 공들인 무대가 펼쳐질 거였다.
‘그때까지 힐베르크 후작이 권리를 되찾아야지. 로즈버리령의 일을 잘 조사해서 귀족파 공격하는 데 써도 좋을 것이고….’
그래, 이렇게나 할 일이 많은데.
고작 한여름 밤의 꿈 따위에, 연애 감정 따위에 휘둘릴 여유는 없었다.
“저, 알비누스….”
켁. 나는 마신 것도 없는데 사레들릴 뻔했다.
“상단 측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으, 으응, 그래. 베라초의 일로?”
“그게, 복합적입니다.”
에스메르 상단의 일을 관리하는 알렉스의 보고였다. 그가 조심스레 꺼내는 말소리에 나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에스메르의 이름을 너무 자주 써먹었나 봅니다.”
“…위험하다 싶긴 했는데.”
“예. 일단 베라초 방화까지는 모르쇠했지만, 마르크 백작 소송 건은 코코 에스메르 명의로 했잖습니까? 거기다가 그, 낙찰받으신 성상…. 그것도 뭐가 있는 것 같던데.”
“성상?”
“그때 경매장에서요.”
“그게 뭐라고?”
나는 시치미를 떼고 대꾸했다.
“그러게요, 그때 그…분도 후작이 성상을 확보하라 지시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말하는 알렉스의 눈매가 어스름히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경매장에서 루시페우스가 찾아온 걸 본 이후로, 알렉스는 그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불경하게 굴었다.
게다가 태양절 연회 때 내가 그와 후원에서 단둘이 있던 걸 그때 그림자였던 기사들이 다 목격한 바람에, 암조의 놀림이 한층 더 심해진 터였다.
‘…사람 속도 모르고.’
전 같았으면 화라도 냈겠지만…. 이젠 대꾸할 기력도 안 났다.
‘내가 아무 마음도 없었으면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결국, 그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거기까지 생각이 치닫자 눈가가 시큰거렸다. 나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며 서류 정리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 가장이 퍽 얄팍했던가.
야, 눈치 챙겨.
조용히 해. 분위기 파악 못 하냐?
어, 이게 아닌가?
평소와 달리 그들의 놀림을 무시하자니, 세 소대장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게 느껴졌다.
‘나를 주군이 아니라 저들 옆집 동생인 줄 알지.’
물론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내가 열한 살이기야 했지만…. 그리고 그게 다 애정에서 비롯된 걸 알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내 마음에 여유가 부족했다.
나는 부러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일단 잡아뗐지?”
“네. 성상이야 뭐,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리 말하는 알렉스의 입매가 미소를 띠고 있는 게, 내게 어떤 의도가 있었으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의도 있었던 건 맞지만….
나는 그런 기색을 낯에 띄우지 않으며 말했다.
“그래. 마르크 백작 소송 건만 우리가 한 거야. 상단 창고 방화야, 증거도 없고.”
“그게, 있답니다.”
“뭐?”
깜짝 놀란 내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때 분명히 꼬리 안 밟히게 조심했다고 했잖아?”
당황한 내 시선을 받은 알렉스는 굉장히 계면쩍은 낯을 했다.
“그,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마법 추적 결과, 거기에 사용된 신성력과 에스메르 상단 관계자의 신성력이 일치했다고….”
“마법 추적 결과?”
“네, 그 원리는 몰라도 아마….”
알렉스가 최대한 완곡히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곁에 앉은 케인과 엘런이 저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시페우스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겠지.’
마법사들이 마탑에만 모여 있다 보니 민간에는 마법이 굉장히 희귀하고 특별한 거였다. 그래서 마법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으면 다들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 가문에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믿을 수밖에 더 있나.
‘그가 마법사라는 걸 우리가 안다는 것까지는 모르고서 한 말이겠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내가 말이 없으니 세 소대장도 나만 바라보며 의견을 내지 않았다.
“왜 말들이 없어?”
“뭐, 언질 받으신 거 없으십니까?”
“언질?”
“알비누스 상단에서 항의한 게 어제 일이니 분명 요 며칠 새 그 마법 추적이란 걸 한 모양인데요.”
그러니까, 나더러 루시페우스에게서 들은 게 없냐는 소리였다.
‘들은 게 있기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데 말이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기사들이 날 놀리려고 한 소리는 아니지만 나는 지레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어색한 침묵이 회의실 안에 흘렀다.
“경들이 뭐, 흘리고 온 건 아니고?”
“저희가 방화는 초범이어도 잠입은 전문가 아닙니까.”
“…그렇지.”
몸에 오래 지니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면 거기에 깃든 신성력을 단서로 추적할 수 있는 건데, 그런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신성력으로 방화한 흔적만 갖고 우리 쪽 소행인 걸 눈치채다니. 역시 세계관 최강자….’
손가락을 맞부딪히거나 손짓하는 것만으로 간단하게 순간 이동을 시키고 결계를 두르곤 했으니까.
…마법을 쓰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심장이 욱죄는 것 같았다.
‘혹시 세계관 최강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
그럴 리가.
나는 장난 같은 생각으로 그를 생각하면 드는 우울한 마음을 잊으려 애썼다.
“정말 들으신 바 없는 거예요?”
“연회 날 같이 산책하셨다면서요.”
“그림자 애들이 난리도 아니었어요. 손도 잡고 분위기도….”
좋으셨다고…. 깐족거리며 말하려던 알렉스가 아차 싶었는지 입을 홉 다물었다.
눈치 없어?
1절만 해라.
미, 미안….
세 소대장이 다시금 내 눈치만 살필 무렵.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애먼 데 신경 끄고, 사냥 대회 준비나 잘해. 알비누스 상단 쪽에는 무조건 잡아떼고.”
넵, 네넵. 내가 마침표를 찍듯 던진 말에 세 사람이 순순히 답했다.
한 달 남짓 치러지는 태양제 기간 동안 가장 큰 행사를 꼽으라면 바로 태양제 사냥 대회였다.
본대륙에서 가장 넓은 숲인 검은 숲을 끼고 있는 황성 남부 세르니타 후작가의 영지에서 치러지는 사냥 대회.
오월제에 글렌치아의 무도회가 있다면 태양제에는 세르니타의 사냥 대회가 있었다.
글렌치아 무도회에 뒤지지 않도록, 세르니타는 해마다 더욱 진귀한 사냥감을 공수해와서 사냥 대회의 명성을 드높였다.
한데 그것이 세르니타의 힘만으로는 힘든 일인지라, 다른 귀족파 가문들과 연합하여 꾸려온 지 오래였다.
세르니타령의 검은 숲은 실제로 귀족파들이 종종 사냥 회합을 갖는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익숙하니 무슨 음모를 꾸미기에도 좋겠지.’
그러니까 이 사냥 대회는 귀족파가 만든 정교한 함정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