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밤이 가장 짧아지는 날 (5)
“전하의 체질로는 술도 드시면 안 되는 걸로 압니다만.”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내 입가로 향하던 잔을 낚아채었다.
아차 하는 사이, 잔은 어느새 내 머리 위 허공에 멎어 있었다.
“…경?”
기척도 없이 다가온 게 그답달까…? 잔 너머로 루시페우스의 얼굴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혼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성력 없는 내 체질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그걸 상호 묵인해줄 협상의 대상인 양 지칭했으면서도… 안경 너머 그의 갈색 눈동자가 한없이 다정했다.
‘…망했어.’
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것만으로도 별수 없이 반가워지고 만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괴감은 모두 잊어버린 채.
“이 정돈 괜찮아.”
한두 모금밖에 안 마셨다고. 나는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자꾸 한숨을 쉬시는군요…. 무슨 걱정이라도.”
무슨 걱정이긴, 내 걱정이지. 한심한 내 걱정.
그렇게 답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개인적인 일이야.”
그에게만은 절대 말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군요….”
한데 그의 반질한 미간에 조금 불만스러운 듯 미세한 주름이 스쳤다. 뽀득, 그의 장갑이 유리잔에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을까.
그는 갈증이 났다는 듯, 대번에 잔에 든 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그거 내 건데…?”
“이미 과음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 내가 마시던 건데…. 그는 태연한 낯으로 그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달빛에 빛나는 그의 얼굴은 조금 화가 난 듯도 했다.
‘내가 얼버무린 게 이상했나…?’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속, 나는 대충 말을 돌리는 편을 택했다.
“경은 이런 거 안 좋아하면서.”
“이런 거라 하시면.”
“늘 위스키 같은 거 마시고 있던데.”
“저, 말입니까?”
“응, 드라이한 레드와인이나.”
루시페우스의 낯은 차츰 미묘해졌다.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마치 우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관찰한 티를 너무 많이 냈나? 좀 소름 돋나?’
내가 지금 떳떳하지 못해서일까, 괜히 무언가 잘못한 것 같아 심장이 콩닥거렸다.
기실 그를 만날 때면 이렇게 두근대는 것이 다반사기야 했으나….
그때, 그가 빈 잔을 쥐고 있던 손을 작게 까딱였다. 잔이 사라지고 말았다.
“작은 별이시여, 괜찮으시다면.”
성큼 한 걸음 내뻗어 내 앞으로 옮겨 선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깊이 숙인 허리 덕에 그가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까 그의 의형이 그러하였듯이….
“아무리 황궁 안이라지만 혼자 다니심이 걱정됩니다. 제가 에스코트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엷은 열기가 배어 있었다.
도미닉 때와 달리, 내가 그를 거절할 방도란 없었다.
레오폴트와 헤어져 산책을 나왔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나는 살포시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그와 손을 맞잡은 것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지만 괜스레 더 긴장되었다.
둘 다 성장(盛裝)한 차림이어서일까, 황실 행사가 치러지는 연회장의 후원이라서일까.
내 것과 그의 것, 두 겹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손도 왠지 뜨겁게 느껴지는 것이… 그도 긴장한 걸까.
그 어색함을 깨고자, 나는 한참 동안 입 안에서 굴리던 질문을 던졌다.
“볼일은 다 봤어?”
“볼일…요?”
“후원에 나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후원에 나온 이유요….”
내 말에 무엇을 떠올렸는지,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서렸다. 그게 못내 서운하여 나는 뾰로통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가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았나 보지?”
“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너무 옹졸하여, 나는 절로 웅얼거렸다.
“로즈버리 영애 말이야. 같이 사라졌던데….”
루시페우스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기어코 말을 내뱉었으면서도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났으니까.
“…그 ‘같이’라는 게.”
“아까 나올 때 보니까 둘 다 자리에 없길래.”
“…….”
내 말에 루시페우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감시하는 것 같아서 불쾌한가? 화났나?
내가 생각해도 황당할 거였다. 내가 뭐라고, 질투… 같은 걸 할 처지도 안 되는데.
그래. 이 치졸한 마음의 근원은 질투였다.
막상 인정하고 나니 더욱 창피했다.
나는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내 옆에 선 그의 낯을 살폈다. 그의 낯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웠다는 말씀이시지요.”
“…….”
확인 사살은 하지 말아줄래?
그리 말할 수 없어 나는 입술 안쪽 살을 꾸욱 깨물었다.
“그러시는 전하야말로, 소공작과 함께 계신 줄 알았습니다.”
“레오는 로즈버리 영애를 찾으러 갔어.”
“아하.”
…실은 내가 보낸 거였지만.
그가 아멜리와 함께 있을 거라는 추측 때문일까, 루시페우스는 조금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안 만났어?”
“글쎄요, 부친과 함께 계시니 그럴 수가 있어야지요. 우연인 척 접근하고 싶어도, 저희 가문과 척진 분들하고만 함께하시기에.”
그의 말소리가 왠지 농담처럼 울렸지만, 나는 ‘접근하고 싶어도’라는 부분에 꽂혀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거기에 내가 아멜리의 친부에 관해 알고 있었는지 확인하려는 뉘앙스가 깃든 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그에게 내준 채였다. 그런 그 또한,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아멜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 걸음이 느려지다 못해 마침내 멎었을 때였다.
“안 될 것 같은 일에 마음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생각해.”
내가 오래간 생각하고 있던 문장이었다.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결코 내뱉을 생각 없었던 말. 그럼에도 지나가는 말처럼 보이기 위해 한껏 꾸민 말.
한편으로는 나를 향한 말.
“안 될 것 같은 일…이라고요.”
제 마음을 안 될 일이라고 폄하한 걸로 들렸을까?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슬며시 그의 낯을 쳐다보니 거기에는 깊은 씁쓸함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안 될 일은 맞지. 이미 아멜리는 레오폴트와 끈끈한 사이가 되어 있으니까.
‘원작에서야 이때쯤 두 사람이 덜 친밀할 때라 루시페우스가 끼어들 여지가 있어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정말 아닌걸.’
무엇보다 아멜리는 한 번도 그에게 관심 가진 적 없고. 지금은 친근하게도 여기지 않고.
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설명하려 해봐야 가닿을 리가 없을 테니….
내가 그에게서 시선을 물렸을 때였다.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길이 아닌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일도 있다는 건…. 전하께서는 모르시겠지요.”
그리 말하는 말소리가 너무도 씁쓸하게 울려, 나는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얼굴로 이런 말을 하나 싶어 흘긋 바라본 그의 낯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치고 퍽 현격한 감정의 노출이었다.
그에 안타까워했던 것도 잠시.
‘지금 나더러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한 건가…?’
나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내가 진짜 스물둘인 것도 아니고, 게다가….
‘보답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건, 나도 해봐서 안단 말이야….’
그 대상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그게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내 마음을 제대로 봐줄 생각 없는 이들에게 마음 쏟는 게 얼마나 허무한 일인데….’
희미해졌던 전생의 기억까지 들러붙자, 기분이 더 가라앉고 말았다.
그때, 내 미간을 그가 꾸욱 눌렀다.
‘아차.’
나도 모르게 인상을 한참 찌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장갑의 촉감이 내 이마를 문질렀다.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마치 장난인 듯 울렸다.
“물론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게 없으시지만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나도 겪어봐서 안다고 하기엔, 그래, 세실리아의 인생에는 모를 일이긴 했다.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생각에 나는 불만스럽게 낯만 굳혔다.
“조언해주신 건 감사드립니다.”
“딱히 조언이랄 건….”
아니었는데. 왠지 놀림당한 것 같아, 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내내 내 손을 고이 올려두기만 하던 그의 손이 천천히 접혀 들었다. 내 손이 그 안에 꼬옥 쥐였다.
“제 형님의 경우도 그러하겠지요?”
“경의 형?”
“아까… 말입니다.”
아까? 도미닉이 내게 공개적으로 다가왔던 것?
그러니까, 부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도미닉의 꿈이 안 될 일이라고 확인받고 싶은 걸까…?
그와 도미닉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가 잘되지 않기를 바랄 법도 하지만, 어쨌든 알비누스에 충성하고 있으면서…?
“으응, 인사하러 왔었지. 돌아온 줄 몰랐는데.”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생각나지 않았는데, 암조로부터 아무런 보고가 없었던 것이었다.
“어젯밤에야 간신히 도착하였더군요. 황성까지 오는 길에 일이 있었다는지.”
“어젯밤이라면….”
“제가 어젯밤, 평소보다 오래 외출한 바람에 오시는 길을 지키지 못했죠.”
그러니까, 어제 나를 만나러 와서 불꽃놀이까지 보고 간 걸 이야기하는 거였다. 게다가 슬리퍼까지 찾고 갔으니….
루시페우스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물었다.
“발은 괜찮으시고요.”
“뭐어, 좀 시렸던 것 말고는.”
내 대꾸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루시페우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래서요.”
“응?”
“그래서, 제 형님은요.”
아무래도 루시페우스는 그 화제를 고집하고픈 모양이었다.
내가 그에게 아무런 여지를 주지 않을 거라는 확답을 받고 싶은 걸까? 도대체 왜…?
‘저는 어차피 아멜리 좋아하면서, 나한테는 왜….’
제 의형이 그렇게 싫어서, 계속 나를 헷갈리게 하나…. 나는 원망을 담아 따져 묻듯 대꾸했다.
“경의 형이 뭘 했는데?”
“전하께 춤을 청했죠.”
“내가 춤 안 추는 거 몰라서 그랬나 보지.”
“앞으로도 청할 겁니다.”
“…눈치가 없나 봐.”
그리고 나도, 그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굴기로 했다.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안경 너머, 달빛에 투영된 그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비치는 듯도 했다.
그는 꼭꼭 씹는 듯한 어조로 제 물음을 반복했다.
“그런 제 형님은, 안 될 일에 마음을 쏟고 있는 걸까요.”
“계속 춤을 청하는 게?”
“춤을 청하고, 전하께 시간을 청하고 곁을 청하는 것 말입니다.”
루시페우스는 ‘곁’이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것이 부마가 되려는 일에 관한 것임을 모를 수 없었다.
알비누스 부자의 음모를 모른대도,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내게 접근한 걸 보면 빤했으니까.
난 평생 황실에서 살 건데, 입버릇과도 같은 말로 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낯이 너무도 진지하여 나는 그 간단한 답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언급한 것이, 곁과 시간을 청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그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았기에.
‘그에게야 거래를 빙자한 장난이겠지만….’
한데 내 답을 기다리는 그의 낯이 왜 이렇게 절박한 걸까.
장갑 너머 그의 손이 다시금 뜨겁게 느껴졌다. 그 열기에, 나는 잠시 속아보기로 했다.
“경의 형에게는, 확실히 안 될 일이지.”
“제 형님에게는요.”
그래서 나는 도미닉 한 사람에만 국한된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곱씹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조금 후련한 듯했을까. 내 손을 쥐었던 그의 엄지가 내 손바닥을 문질렀다. 무언가를 닦아내려는 듯 느릿하고도 꼼꼼한 손길이었다.
“…경은 참 이상해.”
“제가요.”
밑도 끝도 없는 내 말에 대꾸하는 루시페우스의 말끝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내 답에 퍽 만족한 모양이었다.
“사람 손 처음 잡는 것도 아닐 거면서.”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연모한다면서.
꼭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번번이 진지해서.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 읊조리며, 그는 계속해서 내 손바닥을 문질렀다, 손의 옴폭 팬 곳을 따라, 손가락과 이어지는 고랑을 따라 한동안….
“오늘, 아무래도 피곤하시죠.”
“뭐어, 누구랑 춤도 안 춰서 괜찮아.”
그가 그걸 묻는 의도를 모르지 않아, 나는 미련하게도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그의 방문을 받고 싶었으니까.
“이따 뵈러 가겠습니다.”
“…알았어.”
그리고 그날 밤, 루시페우스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