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밤이 가장 짧아지는 날 (4)
춤…?
나랑 추자고…?
도미닉 알비누스의 말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어떻게든 나를 부마로 넣으시기로 했어.”
12년 전, 내가 처음으로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신년 하례식 날. 꿈속에서 루시페우스를 찾았을 때, 그리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굴던 소년의 말소리.
그리고 황실 연회에 참석할 때면 매번 내게 들러붙던 그의 눈빛.
윌로우 놈을 같잖게 여기면서도 내게 말 걸 수 있음을 부러워하던 그 음험한 눈빛.
‘유학 갔다면서 안 나타나길래 잊고 있었는데.’
윌로우 놈이 있을 땐 아는 척도 못 하더니, 지금 나타난 것 또한 참 야비했다.
게다가 저 느끼한 안색, 부드러움을 한껏 자아낸 말투, 굳이 사람 다 보는 데서 춤을 청하는 자신감….
‘그 부마 어쩌고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거지?’
꿈속의 아이가 루시페우스인 것을 알고서 알비누스 부자가 그 망상을 실천할까 봐 걱정했지만….
‘무슨 낌새라도 있었으면 아버지든 그레이스든 공개적으로 쳐냈을 건데, 내내 조용했단 말이지.’
하지만 내가 응하리라 확신해 마지않는 듯 내뻗은 손을 보니, 그 망상을 이제부터 펼치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손을 내려다보던 나의 시선이, 나도 모르게 옆으로 흘렀다.
도미닉의 미끈한 낯 너머… 그가 떠나왔을 그의 자리가 보였다.
알비누스 후작의 곁에서, 오늘 내내 마주칠 수 없었던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이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야 눈이 마주치다니, 반가움이 인 것도 잠시.
‘그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서대륙으로 유학을 떠났던 도미닉 알비누스가 돌아오자마자 내게 접근하리라는 것을…?
‘후작의 수족이니까 알고 있었겠지.’
…서운하네. 어제 귀띔이라도 해주지.
가라앉고 마는 마음을 뭐라고 이름 붙일 길이 없어,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말았다.
“전하…?”
내 침묵이 길어지자 도미닉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나는 별 대꾸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늘 연회장에 들어오고서 처음으로 루시페우스와 눈이 마주쳐서였을까. 나는 평소처럼 우연인 척 넘기지 못하고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루시페우스 또한… 이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어째서기는, 제 의형의 수작이 먹히는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내가 아멜리도 아니고, 제 의형이 부마가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오래간 알고 있었을 테고.
거기에 생각이 닿자, 나는 조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안, 경.”
루시페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는 또박또박 입술을 움직였다. 내 입 모양을 그가 읽을 수 있도록.
그가 내 답을 기다리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어제 발을 다쳐서 말이야.”
“…예?”
도미닉 알비누스의 얼빠진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까 테오도르랑 아버지랑 한 번씩 춤 잘 춰놓고 이런 소리를 하니 황당했을 거였다.
‘내가 제 춤 신청을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나?’
제가 뭐라고?
나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루시페우스에게 붙박아 두었던 시선을 물려 도미닉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루시페우스의 낯에 어떤 동요 한 점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가 내 말소리를 읽었음을 나는 알았다.
거기에 조금 기분이 좋아져, 나는 도미닉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해맑고도 천진하게, 그래서 무슨 의도가 있으리라고는 의심할 수 없도록.
내가 늘 그리하듯이.
“연회에서 누가 춤을 청할 줄 알았다면 조심하는 건데 말이야. 미안하게 됐어.”
나는 원래 연회에서 아버지랑 오빠랑 말고는 춤 안 춘다는 뜻이었다. 아수라마수라에 그거 모르는 이가 없는데, 한심하기는.
그것이 창피했는지, 도미닉의 낯이 미세하게 굳었다.
“하긴, 전하께서 존체가 미령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내가 허약하다고…?
세실리아에 대한 과보호는 단순히 황실의 과도한 애정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에둘러 거절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걸까?
예상외의 반응에 영문을 몰라, 나는 입꼬리를 내리지 않은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다면 혹시.”
무안해진 손을 거두며, 도미닉이 다른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그의 뒤편으로 그림자가 져 시야가 어둑해졌다.
거기 나타난 사람은….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어머, 레오폴트 경.”
시선을 들어보니, 레오폴트가 마치 차례를 기다리듯 도미닉의 뒤에 서 있었다.
‘아멜리는 어쩌고?’
아멜리가 사교계에 나타난 뒤로는 늘 연회에서 단둘이 붙어 있는 레오폴트였는데? 그래서 스칼렛 추종자들의 질시도 한껏 샀는데…?
아멜리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니, 그녀는 힐베르크 후작의 곁에 서서 걱정스러운 낯으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멜리가 레오폴트를 내게 보낸 모양이었다.
‘역시 눈치 빠른 아멜리, 내가 불쾌한 상황에 처한 걸 알았구나…!’
나는 내 여주에 대한 애정으로 광대가 움찔대려는 것을 참으며, 재빨리 그 주변을 살폈다.
‘오늘 아멜리가 혼자 있으면 혹시 루시페우스가… 아, 아직 이쪽을 보고 있구나.’
하긴, 아멜리가 원작에서와 달리 친부와 함께 있으니 괜찮으려나?
적당히 안심한 나는 난처하다는 듯 도미닉을 흘끗대었다.
“그런데 지금 도미닉 경이 먼저….”
“저, 성기사단장님의 명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입니다.”
성기사단장, 그러니까 로젤리아 핑계였다.
‘당연히 거짓말이겠고….’
슬쩍 눈동자를 굴려 연회장 한편을 살피니, 로젤리아는 내 옛 호위 기사인 란셀과 브랜든 등 제 측근들과 어울려 있었다.
나와 로젤리아는 같은 수선화궁에서 근무하기에, 용건이 있으면 근무 시간 내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걸 도미닉이 알 리는 없는 법.
“저, 군부의 일로 말입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러니까, 레오폴트의 말소리는 실상 도미닉을 향해 있었다.
다행히도 도미닉은 응당 이 상황에서 해야 할 대꾸를 읊었다.
“급한 일이신 듯하니 제가 물러나 드려야겠군요.”
로젤리아 이름의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난처한 상황을 타개하게 되어 그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주었다.
“응, 고마워.”
“전하께서 군부의 일을 하신다더니…. 너무 많은 짐을 지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걱정을. 연회 즐기길 바라.”
그리 말하며 살랑살랑,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훠이, 저기로 가버려.
‘내가 무슨 짐을 지건 말건 뭔 상관?’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그의 뒤통수에 대고 혀를 내밀어 주었다.
“그러니까, 자리를 피하는 척은 해야겠지?”
“눈치채셨어요?”
레오폴트가 씨익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로즈버리 영애가 눈치가 좋네.”
“윽, 거기까지 눈치채셨고요.”
“레오폴트 아우렌바흐랑 15년을 친구로 지내면 알 수 있어.”
“…대사는 제가 지은 거였다고요.”
레오폴트가 입술을 빼죽 내밀고서 부러 투덜거렸다.
‘레오폴트랑 허물없이 구는 것도 오랜만이네.’
최근에 나도 암조 일로 바쁘고, 레오폴트도 아멜리와의 연애로 바빠서 전처럼 단둘이 어울릴 일이 줄어들었으니까.
도미닉에게 거짓말한 것을 변명하듯, 나는 레오폴트의 손에 의지해 일어나면서 다리를 저는 척했다.
“내가 저자에게 발이 아프다고 해놔서.”
“업어드려요?”
“드레스 구겨져, 안 돼.”
레이디 패티샤가 꽤 엄격하죠, 레오폴트가 쿡쿡 웃었다.
“그럼 안아 드릴까요? 그, 전하께서 어릴 때부터 공주님 안기라고 하시던 그거요.”
“내가 로즈버리 영애도 아닌데?”
그리 생각하는데, 문득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다.
밤하늘, 불꽃놀이를 보러 나온 인파를 저 멀리 발아래 두고서 나는 분명, 고, 공주님 안기를….
“전하께서 저와 닿아 있으셔야 저와 함께 움직일 수 있습니다.”
윽, 얼굴 안 빨개졌겠지?
‘그건 스킨십이 아니라, 그냥… 그가 마법을 쓰기 위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날뛰던 말들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그의 품으로 대피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순순히 그의 목을 안던 순간. 그때의 쑥스러움이 배 속에서 간질간질했다.
“근데 아까 그 사람, 알비누스의 소후작이죠?”
“으응, 맞아.”
“오랜만에 봐서 긴가민가했어요.”
“아카데미 졸업하고 바로 서대륙으로 가서 유학하다 왔다더라.”
“…전하께선 정말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네가 기사단 일로 바빠서 그렇지 뭐.”
물론 레오폴트가 성기사단에 근무하지 않고 사교계 활동을 열심히 했대도, 나보다 잘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나는 레오폴트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척 부채로 입을 가리고서, 여느 때와 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어제 밀리랑 렌강변에 가서 불꽃놀이 봤어요.”
“좋았어? 로즈버리 영애도 좋아하고?”
“네, 밀리가 가자고 해서 간 건데, 정말 낭만적이더라고요. 마지막에 장미꽃 모양 불꽃이 한 수십 개 터졌는데, 정말 장관이었어요.”
“으응, 그치? 그거 마지막에 크게 터진 건 모란이야. 정말 예쁘던데.”
나는 어젯밤 불꽃놀이의 하이라이트를 돌이키며 꿈꾸듯 중얼거렸다.
그토록 가까이서 봤으니 귀가 먹먹할 법도 했지만, 루시페우스가 무언가 마법을 걸었던 건지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그 풍경….
“…보셨어요?”
“응?”
레오폴트가 답잖게 눈치 빠른 소리를 하여, 나는 놀란 목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아, 그, 내 방 발코니에서도 보인다니깐? 황궁이 불꽃놀이 명소야. 몰랐어?”
“헤에, 댁에서 보시니 좋으시겠네요.”
“가까이서 본 건 확실히 다를 거야, 그래도.”
다르긴 달랐다. 그 반짝이는 아름다운 불빛이 주는 낭만에 압도될 뻔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고….
어제의 일을 돌이키던 내 시선이,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한곳으로 흘렀다. 내내 그가 자리해 있던….
‘없네?’
어느 연회를 가건 그는 자리한 곳에서 좀체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늘 벽에 기대어 위스키나 와인을 홀짝이며, 오고 가는 귀족파 영식들의 말을 받아주는 정도였을까.
그런 그가 자리를 비웠다면, 혹시….
“로즈버리 영애가, 없네?”
아니나 다를까 아멜리 또한 보이지 않았다. 힐베르크 후작은 홀로 남아 오랜만에 만나는 사교계 지인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어라, 힐베르크 공과 함께 계시기로 했는데. 잠시 발을 쉬러 가셨나…?”
“로즈버리 영애가? 혼자서?”
“어, 그러게요….”
레오폴트는 아멜리가 사교계에서 따돌림받는 건 몰라도, 이런 때 단둘이 다닐 법한 여성 지인을 만들지 못한 건 알았다.
따돌림당하는 상황이 원작에 비하면 훨씬 온건한 것이 다행이랄까.
“가서 찾아봐. 나는 바람 좀 쐴게.”
이 정도면 소후작도 적당히 납득했을 거야, 그리 말하며 나는 나를 에스코트하던 레오폴트의 손을 떠밀었다.
“밀리 찾고 나서 같이 인사드리러 갈게요.”
“그래. 가봐.”
이러니저러니 해도 걱정스러웠는지, 레오폴트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이성인 친구, 부질없다, 정말.
나는 알제니아의 가든파티 때 멀미 난 연기를 했을 때처럼 흐린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침울해지고 만 내 마음은 그 눈빛 너머 적당히 얼버무린 채로.
달빛이 내려앉은 황궁의 후원.
나는 스파클링 와인 잔을 쥔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사그라들지 않는 자그마한 자괴감을 달래면서.
‘분명 레오폴트 친구 역할로 구경하는 게 목표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휩쓸려 버려서는….’
그러니까 레오폴트더러 아멜리를 찾으러 가라고 보낸 것은, 본분을 망각한 일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위협할 테니 레오가 찾으러 가는 게 맞긴 하지만, 내가 레오를 보낸 심정이, 그게….’
순수하게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위한 것만은 아니니까….
아아, 나는 나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마음에 스파클링 와인을 다시금 홀짝였다.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물론 루시페우스가 아멜리한테 집착할 계기를 없애는 게 맞는데, 그러니까 아멜리가 혼자 있게 놔두면 안 되는 게 맞는데….’
거기에 내 사심이 섞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으니까.
‘요즘 진짜 엉망이다.’
요 얼마간의 일들로 그에게 다른 마음이 생긴 걸까 기대하면서도, 그가 원작 설정을 답습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실망스러워.’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모를 실망감에, 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막심 눈도장도 잘 찍고, 힐베르크 후작과 렌틸 자작도 잘 데뷔하고, 흡족해하던 게 조금 전이었는데. 고작….’
고작 연애 감정 따위에 휘둘려서….
그것도 곧 접어야 하는 마음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와인을 머금으려 할 때였다.
“과음하시는 것 아닌가요.”
등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내 입가로 향하던 와인 잔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