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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96화 (96/220)

96화. 밤이 가장 짧아지는 날 (3)

“루시페우스입니다.”

그가 제 이름을 읊자 스칼렛의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를 사교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이로 만들어준, 일명 황홀한 미소였다.

루시페우스를 둘러싸고 있던 귀족파 영식들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와 달리 단 한 번도 다른 빛을 띠지 않는 신사의 다갈색 눈동자.

“루시페우스 경. 결례를 빚어 죄송합니다.”

스칼렛은 눈썹을 한껏 모으며 눈으로 웃었다. 하지만 스칼렛의 말소리는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 듯 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황성 사교계에 루시페우스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알비누스의 둘째 아들, 혹은 알비누스의 사생아, 혹은 알비누스 후작의 그림자. 그런 길디긴 수식으로 지칭되곤 했으니까.

스칼렛은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 우아하게 인사해 보였다.

“게이블스의 스칼렛입니다.”

“레이디 스칼렛을 모르는 자가 황성 사교계에 발붙일 수 있다던가요.”

그의 나직한 말소리를 들으며 스칼렛은 퍽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정말, 저를 대함에 있어 한 치의 사심도 깃들지 않은 목소리.

‘아우렌바흐 소공작은 좀 천치 같을 때가 있는데, 이자는 썩 남자답네. 전하께서 이런 취향이셨나 보지?’

그걸 알았더라면 저를 따르는 영애들이 어려서부터 세실리아를 질시할 것도 없었는데.

저만 아는 사연을 곱씹으며 스칼렛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향한 곳은 명확했다.

아이쿠, 그럼 이만. 두 사람 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영식들이 재빨리 몸을 물렸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에 아무도 없게 되자, 스칼렛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퍽 고혹적이었으나 루시페우스의 눈엔 그저 의뭉스럽기만 했다.

“경께서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연인을 연모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루시페우스의 낯이 대번에 굳었다. 그건 수줍음이라기보다 불쾌함에 가까웠다.

이거 봐, 이거 봐. 스칼렛은 속으로 웃었다.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4황녀 전하와 오랜 교분을 유지하고 있어서요.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아, 소문이 벌써 그리 났습니까.”

역시, 틀리지 않았다.

세실리아를 언급하자 대번에 온화해지는 기색. 스칼렛은 마치 도박에서 큰돈을 딴 것만 같은 쾌감을 느꼈다.

그 부드러운 눈빛에서 스칼렛이 느낀 것은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내가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볼 때랑 헥터를 볼 때가 다른 것처럼.’

스칼렛은 생긋 웃으며 은근하게 덧붙였다.

“제가 단속한다고 하는데 저와 친한 영애들이 자꾸만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연인을 괴롭히네요.”

“그러셨습니까.”

“경이 어찌 나올지 모른다고, 조심하라고 하도 신신당부하시기에.”

“…아하. 그런 말씀까지.”

기본적으로 차갑게 굳은 낯이면서도, 세실리아를 연상할 수 있는 말만 나오면 그것이 따스하게 풀어졌다. 그 변화가 미세했으나 사교계 모든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스칼렛에게는 빤했다.

그 빤함에, 스칼렛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같은 정파끼린데 느슨하게 봐주세요. 저도 나름대로 충심을 다하는 중이에요.”

아, 제 가문에 말이에요. 스칼렛이 능청스레 덧붙이며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세실리아가 몇 년을 공들여서야 볼 수 있었던 그녀 고유의 미소였다.

루시페우스는 그녀의 의도를 살피려는 듯 스칼렛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스칼렛은, 그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갈색 눈동자가 조금 날카롭게 빛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안경에 굴절된 빛 때문인지도….

“충심… 말씀이십니까.”

“경과 어쩌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고요.”

스칼렛의 입매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 낯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중력에 이끌리듯 미끄러졌다. 스칼렛의 너머로 제 작은 빛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충심이라.’

오늘은 그쪽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그녀에게 시선이 닿아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건 충심이 배반당해서인 걸까. 내가 안전을 지키겠다 말씀드렸으니까. 누구와 연회에 입장하실지 내게 말해주시는 게 더 이상한 일인데….’

기실 그는 연회장에 세실리아가 들어선 이후로 작은 배신감과 함께 얄미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옹졸한 감정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제 뵈었는데 언질이라도…. 아아, 아니야. 구제 불능이군.’

루시페우스는 오늘도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책망하며 스칼렛에게로 제 시선을 물렸다.

“게이블스의 영애께서는 오라버니보다는 말이 좀 통하실 것 같군요.”

“그래 봐야 저는 여식이라, 후계자도 못 되는걸요.”

스칼렛은 눈매로 그윽한 호선을 만들며 루시페우스 쪽으로 한껏 상체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반대편, 그의 의형 도미닉이 있는 쪽을 향했다.

스칼렛의 시선이 향한 쪽을 확인한 루시페우스가 한숨처럼 반응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이시군요.”

피차 집안에서의 입지가 비슷하다는 소리였다.

그에게 지금껏 이런 식으로 접근한 이가 있었을까.

알비누스의 무엇이 아닌, 어머니로부터 루시페우스라는 이름자를 받은 제게 관심을 갖는 이가….

제 작은 빛을 제외하면, 눈앞의 여인이 처음이었다.

‘그게 하필이면 스칼렛 게이블스라니.’

루시페우스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기울여 그 홧홧한 알코올로 입술을 적셨다. 하필이면, 제 손으로 몰락시킨 적 있는 그녀라는 것도 기묘했다.

그가 마음껏 제 낯을 살피게끔 둔 스칼렛은 다시금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4황녀 전하와 교분을 쌓게 된 이유, 혹시 아실까요?”

“…사교계에 유명한 일 아닙니까.”

이전 생에는 없었던 일. 하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은 일.

그때도 지금도 스칼렛 게이블스가 레오폴트 아우렌바흐를 연모한다는 건 사교계의 상식이었으니까.

“레이디께서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하여 그 친우이신 4황녀 전하와도 친분을 다지신다고.”

“네에, 사랑 덕에.”

거기까지 말한 스칼렛은 부채를 제 쪽으로 팔랑거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알아차린 루시페우스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제 귀를 갖다 대었다.

“주군을 찾았달까요.”

“…아하.”

루시페우스의 머릿속에 관계도가 재빨리 그려졌다.

제 작은 빛이 사사하고 있는 렌틸 자작, 옛 이름 안네마리 게이블스. 그녀는 오늘 학자의 탑에서 나와 정계에 복귀할 것을 선언하였고, 게이블스의 여식이 제게 4황녀와의 친분을 과시한다.

‘이 여인도 달라졌군.’

모든 기억을 가진 그야 달라질 수밖에 없다지만, 아니, 작은 빛에게 무참히 끌려버리고 만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지만.

눈앞의 여인 역시 제 작은 빛에 의해 다른 길을 걷고 있는가.

루시페우스는 후련한 듯 짧게 웃었다.

“그 심정, 이해합니다.”

제가 아니면 그 누가 이해하겠는가.

루시페우스는 그녀와의 찝찝했던 결말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며, 미소 비슷한 것을 입에 걸었다.

어머, 검은 신사님께서.

역시 남자는 남자셨나 봐.

레이디 스칼렛에게만, 역시.

아무도 이름자 모를 만큼 다가가기 어려운 알비누스의 검은 신사가 레이디 스칼렛에게만큼은 미소를 내어줌에, 모두가 탄식하였다.

제 상대조차 못 되는 영애들의 한숨 섞인 수군거림. 스칼렛은 빙긋이 웃었다.

“글렌치아의 방계가 껄끄럽다면 알비누스의 둘째도 나쁘지 않다. 지금 당장에야 가진 게 없으니 못나 보이겠지만.”

제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아버지께서 이 장면을 보시면 퍽 좋아하시겠지. 하지만….

‘나쁘지 않기는.’

스칼렛의 미소가 삐딱하게 흘렀다.

‘장차 부마가 되실 분께 무슨 실례를.’

뭐야, 쟤네 왜 이렇게 친해?

상석에 앉아 무알콜 사과 시드르를 홀짝이며 연회장 내부를 살피던 내 눈에 이상한 풍경이 들어왔다.

스칼렛이 루시페우스에게 귀엣말을 속닥거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나랑 엮을 땐 언제고?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으면서? 그러고 보면 스칼렛의 호위 기사랑 루시페우스랑 좀 비슷한 느낌도 있던가…?’

호위를 서느라 입 한 번 열지 않았던 그 기사의 과묵함이 어쩌면 루시페우스의 고요함과 닮아 있는지도…?

갈색 머리 우직한 훈남과 루시페우스가 비슷할 리조차 없는데도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교류도 없지 않았나?’

원작에서야 같은 귀족파라 부딪히곤 했다지만, 나와 교류를 시작한 스칼렛은 귀족파의 일에서 늘 한걸음 물러난 채인데.

‘이것도 원작의 억지력인가? 아, 아니, 저게 뭐야…?’

황당한 마음으로 그들 쪽을 살피던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란 마음을 진정하느라 애써야만 했다.

‘…저거 미소 맞지?’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에게조차 웃지 않는 루시페우스가, 오늘 내 쪽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루시페우스가…!

스칼렛에게 근사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선보인 것이었다.

‘와, 원래 아무에게나 잘 웃어주는 사람이었어? 캐붕 아냐, 이거? 그러면 나 모르는 데서 아멜리한테도 막 웃어주고 그러겠네.’

글렌치아 공작 헛똑똑이네, 질투는 무슨. 아주 태평하게 잘 놀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타, 내가 시드르를 한 모금 벌컥 들이켰을 때였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내게 인사를 해 왔다. 나는 재빨리 얼굴과 마음을 황녀의 것으로 추슬렀다.

그런데, 목소리가 낯설었다.

‘보통 이런 연회 때 나한테 굳이 와서 인사하는 애들은 정해져 있는데. 누구지?’

고개를 들어 올리니 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에는 별 긴장이 서려 있지 않아, 마치 나를 알던 사람인 듯한 느낌을 풍겼다.

‘이상하게 낯이 익기야 한데….’

누구지? 나는 엄숙하게 대꾸했다.

“응, 반가워. 구면이던가?”

“아,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이 없던가요.”

정식? 내가 저랑 알 만한 사이라는 건가?

나는 어서 네 신상을 읊으라는 듯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제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오래간 유학하여 사교계에서 정식으로 활동한 적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엔 이따금 연회에서 뵈었었는데,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군요.”

유학을 다녀온 갈색 머리 남자라면….

‘설마.’

나는 내 짐작이 틀리길 바라며 신사를 바라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사내는 설핏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알비누스 소후작, 도미닉이라 합니다.”

역시, 그놈이었어!

나는 낭패한 빛을 얼굴에 띠지 않기 위해 애써 웃었다.

얘가 여기서 왜 나와? 아니, 언제 돌아온 거야?

“그랬구나. 알비누스 후작의 첫째가 유학 중이라더니.”

“첫째…. 예, 그렇죠.”

저는 외아들이라는 시위였다.

‘루시페우스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지.’

제 의동생을 어려서부터 괴롭히고 부마가 된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이던 소년은, 황녀 앞에서 혼잣말도 소리 내어 말하는 무뢰한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런 삐딱한 마음을 숨긴 채, 나는 그의 외관을 꼼꼼히 뜯어 보았다.

‘어렸을 때도 루시페우스랑 영 딴판으로 생겼더라니, 자라서도 닮은 데 하나 없네. 키도 안 커 보이고, 얼굴도 뭐.’

못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귀족들의 용모가 기본적으로 준수한 것을 생각하면, 그저 평범한 축이었다.

그에 비하면 루시페우스는….

‘그러니까, 자, 잘생…겼으니까.’

그에게 서운한 와중에도 글렌치아 공작이 했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마음이 수줍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도미닉 알비누스는 한껏 멋있어 보이려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한쪽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황성 사교계에 오니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오래간 그려온 여성은 전하뿐이신데.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내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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