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밤이 가장 짧아지는 날 (2)
가까이서 본 힐베르크 후작은 기품 있는 인상의 미중년이었다.
‘전직 신관이니 인상도 참 맑으시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연갈색의 머리칼과 멋있게 기른 턱수염은 그의 따뜻한 인상과 중후한 매력을 한층 돋웠다.
“그래, 공. 정말 오랜만일세. 가주직을 물려받았다며 인사 온 게 벌써 수년 전인데, 그 이후로 신년 인사도 안 오고 말이야.”
“송구합니다. 힐베르크의 자격 하나 없는 제가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싶어 그간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인장 반지도 힐베르크령의 반지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힐베르크를 거의 포기했다는 말이었다.
‘조만간 대천사의 성상,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아버지와 힐베르크 후작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 옆에서 잔뜩 긴장한 아멜리에게도 눈 한 번 찡긋해주고.
“옆의 영애는 분명 올해 데뷔탕트였는데.”
“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가 딸을 찾았습니다.”
“허어, 그게 정말인가?”
아버지께서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편을 주시하고 있던 연회의 참석자들이 모두 술렁였다.
개중 알비누스 후작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루시페우스에게 대천사의 성상을 찾아오라 시킨 장본인이었다.
‘역시, 대천사의 성상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나 보구나.’
남들 앞이어서 마음껏 화내지도 못하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고생인 눈치였다.
그리고 바로 뒤에 선 루시페우스는… 차갑게 낯을 굳힌 채였다.
나 때문에 후작의 일이 자꾸 틀어져 안 좋은 소리를 듣는다던 말소리가 떠올라, 조금 미안해졌다.
‘미안하지만 나한텐 힐베르크를 복권하는 일이 우선인걸.’
저도 어차피 나보다야 아멜리가 우선일 거면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금세 울적해졌다.
‘내가 저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니, 힐베르크 후작의 일도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하겠지…?’
안 좋은 생각을 한번 하니 그 가지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갔다.
‘그래도 그렇지. 이쪽 한 번도 안 보고.’
그가 사교계에 돌아온 이래로 늘, 연회 때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내가 시선을 돌리면 꼭 그가 나를 보고 있었는데.
오늘도… 기대했는데.
‘이젠 뭐, 자주 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건가아….’
나는 석고상처럼 냉랭한 그의 낯에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눈을 흘겼다.
그는 끝까지 내 쪽에 시선 한 번 보내지 않았다.
“오오, 세실. 우리 작은 별. 정말 오랜만이지?”
연회장이 2부의 무도회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혼잡한 틈을 타, 테오도르 부부가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단상 위에 올라왔다.
그는 오늘도 부모님보다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그에게 나는 어릴 때처럼 폭, 안겨주었다.
“오라버니, 오랜만에 뵈어요. 공작도 오랜만.”
“세실, 렌틸 자작의 일은 도대체 어찌 된 거야? 너는 알고 있었어?”
테오도르의 감탄 어린 말소리에 나는 헤헤 웃어 보였다.
나의 현명한 스승은 연회의 첫 춤곡이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부모님께 인사 올렸다.
힐베르크 후작처럼 과장하여 큰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그저 부모님과 익숙한 듯 행동할 뿐이었지만.
그러자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들이 수군수군,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3황녀, 4황녀 전하와 황자 전하를 가르쳤대, 학자의 탑 학자래, 게이블스 후작의 누이래, 조만간 원로원에 들어간대.
발 없는 말이 연회장 구석까지 달리는 게 눈으로 다 보였다. 조금 전의 그 풍경이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여, 나는 남몰래 음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렌틸 자작이 게이블스 후작의 누이인 건 도대체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
“으음, 제가 게이블스 영애와 교분을 다지다 보니 두 사람에게서 닮은 느낌이 나길래, 조금 알아봤던 것뿐이에요.”
그리 말하며 나는 눈동자를 굴려 스칼렛을 살폈다. 스칼렛은 오늘도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루시페우스한테 당한 데가 아직 안 나아서 참석도 못 한 윌로우 놈 따위보다야, 스칼렛이 가주에 훨씬 더 어울리지.’
내 시선이 향한 쪽을 확인한 테오도르는 싱긋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세실, 귀족들은 속여도 이 오라비는 못 속인다. 북대륙 해적을 소탕하고 싶다던 네가 수선화궁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어째 잠잠하다 했구나.”
“스승께서 저와 정계에 관해 이야기하시다 보니 직접 투신하고 싶으셨던가 보지요. 제가 뭘 어쩌겠어요?”
그리 말하며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추측하신 거 맞지만 여기서는 듣는 귀가 많으니 대충 얼버무립시다, 네?
내 낯을 들여다보던 테오도르가 씨익 웃으며 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정말 우리 베니가 세실을 닮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오.”
“베니는 전하처럼 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판에서든 기회를 잡는 대상인이 되어야 하는걸요.”
테오도르가 여느 때처럼 나를 제 딸처럼 자랑하자 글렌치아 공작은 부러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저 팔불출을 받아주고. 정말 배포가 크단 말이지, 내 새언니.
“그나저나 그새 부쩍 얼굴이 피셨어요, 전하. 아까 그 신사 덕분인가요?”
“으응?”
글렌치아 공작이 부러 목소리 높여 울린 말에 주변의 귀족들이 나누던 대화를 멈추고 귀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그 신사라니…?”
“아까 전하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받은 막심 블라우베르 경 말이에요. 혹여 그와 특별한 사이라도 되신 건가요?”
그러니까 오늘 내 행보를 관찰한 귀족들의 관심사, 내가 막심의 에스코트를 받아 입장한 연유를 귀족 대표로 묻는 거였다.
역시….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어흠, 암튼 그런 미혼 여성의 사생활은 큰 흥밋거리였다.
나는 그녀의 직구성 발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낯으로 대꾸했다.
“아이, 참. 이번에 내 수석 보좌관으로 들어온 거야. 막심 경이 아카데미 졸업하고서부터 채용해 달라고 어찌나 애원했는데, 이제 나도 여력이 생겨서 말이지.”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낭랑하게 높여서 말했다. 저 멀리 귀 쫑긋 세운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내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듯 글렌치아 공작의 보랏빛 눈동자가 기민하게 내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씨익 올라가는 그녀의 입매.
“휴, 다행이네요.”
글렌치아 공작이 장난스레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여보, 다행히 그 장갑 막심 경에게 던지지 않아도 되겠어요. 안 그래도 구하기 힘든 실크로 만든 건데.”
“장갑…요?”
“그래, 세실. 우리 막내의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이 오라비와 결투 한 번은 벌여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까, 내 짝이 되려는 이에게 결투를 신청하시겠다?
검술을 교양 이상으로 배워본 적 없는 나의 미중년 오빠 테오도르가 그리 말했다.
“오라버니, 결투라니요.”
“네가 오월제 연회 때도 어떤 영식하고 테라스로 사라졌대서, 내가 그놈도 한번 불러낼까 하던 참이다.”
“여보. 전하께서 남성과 테라스로 사라지신 게 아니라, 전하께서 쉬러 나가셨는데 그 영식이 따라갔다니까요.”
“그래, 감히 세실의 뒤를 밟다니! 얼마나 음습하오?”
테오도르 부부가 내 앞에서 옥신각신하였다.
그러니까… 글렌치아 연회 때 내가 루시페우스를 끌어내겠다고 테라스로 나갔던 일을 이야기하는 모양…인 거지…?
‘글렌치아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두 사람은 알고 있는 모양이네….’
윌로우 놈의 용태가 비밀이어서, 그날 내가 누군가와 개인적으로 만난 것부터가 입단속한 것처럼 알려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양손을 코앞에 모으고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해들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때 한 명은 나를 위협하겠다고 들어온 사람이고.”
“으응, 아니에요.”
고개를 저은 글렌치아 공작이 다른 쪽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게이블스는 폐하 말씀이 없었어도 우리 전하께 너무 처져요. 말고 잘생긴 쪽.”
“응?”
“저기 까마귀 신사 말이에요.”
그, 그러니까, 루시페우스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물론 그가 잘생기지 않았느냐면 당연히 잘생겼지만, 나는 그를 그런 식으로 판단한 적이 없는데….
당황한 내가 눈동자를 오들오들 떨 때였다.
“막심 경도 나름 매력은 있지만요, 전하. 그래도 이 사람 저 사람 찔러 보시다가 정착은 천천히 하세요. 전하께서 아수라마수라에서 가장 고귀하신 미혼의 여성이신데 조급할 것 있나요?”
“저, 정착?”
“여보, 우리 세실은 평생 황실을 안 떠날 거라잖소.”
“뭐, 안 하셔도 되고요.”
글렌치아 공작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금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아까 보니 그 신사가 잔뜩 질투한 모양이던데. 굳이 오해 풀어주지는 마시고요. 언제든 떠날 것처럼 구셔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답니다.”
“아니, 애초에 나는 그랑 그다지…!”
“오호, 선 긋기? 바람직한 자세예요.”
글렌치아 공작이 윙크해 보였다.
아니, 그런 사이가 아니래도…?
황성 사교계의 일인자인 게이블스 후작 영애 근처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녀의 미소 한 자락 얻을 수 있어 감격하였으나 그에 대한 감상은 저마다 달랐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오만함으로 읽었고, 또 어떤 이들은 솔직함으로 읽었다.
실제로 스칼렛은 오늘 전에 없이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찬 상태였다.
모두에게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까 저 귀부인께서 레이디 스칼렛의 고모님 되신다는 거죠?”
“고모님을 찾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처음 뵙는 건가요? 그간 교류가 없으셨어요? 후작님께서 놀란 눈치시던데.”
“4황녀 전하의 스승이시라던데, 레이디 스칼렛께선 들으신 바가 없나요?”
주변에서 모두가 고모님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고모님의 선전하심이 제게 어떤 호재로 작용할지 잘 알아, 스칼렛은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발톱을 숨기고 웅크린 채 윌로우가 자멸하기만을 기다리던 그 시간.
늘 실없이 웃기만 하는 아우렌바흐 소공작을 연모한다고 거짓말하던 것도 슬슬 끝낼 때가 왔다.
‘그걸 때려치울 수 있다니 헥터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고.’
진심으로 웃는 웃음이 이리도 파괴적인 거였나. 광대가 아린다고 생각하며, 스칼렛이 시선을 돌릴 때였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장신의 신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검정 일색의 정장을 입고서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귀족파 영식들의 구심점이 되어 있는 신사.
‘저자는 분명.’
그녀의 부친이 무언가를 모의하는 곳에 늘 끼어 있던 젊은이.
그리고 제 은인과 묘한 관계에 놓인 남성.
스칼렛은 그에 대해 나름대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저 영식이 로즈버리 영애를 연모한다 하셨지만, 아무리 봐도 상황이 전혀 다른데.’
사교계에서 권력을 쥔 것이 벌써 다섯 해가 넘은 일이었다. 스스로 염문에 휩싸인 적 없대도 신사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눈빛을 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하물며 정인이 있는 그녀임에랴.
스칼렛은 그가 로즈버리 영애를 바라보는 눈빛도 살폈고, 세실리아를 보는 눈빛도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은근히 허술한 구석이 있으시단 말이지.’
제 은인에게 마음속으로 애정 어린 타박을 하며 스칼렛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헥터의 앞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먼저 실례.”
평소 같았으면 제게 몰려든 이들에게 하나하나 미소 지으며 양해를 구한 후에 자리를 떠났을 것을,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고모님께서 이 연회장 안에 자리하신다는 것만으로도 뒤가 든든하였다.
“안녕하세요, 그… 알비누스의 둘째 아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