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밤이 가장 짧아지는 날 (1)
‘아이고고고, 삭신이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온몸이 쿡쿡 쑤셔 근육통에 괴로워했다.
‘아, 어제….’
어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지.
루시페우스가 매일 방문하게 놔두는 것도 미친 짓인데, 그와 불꽃놀이까지 보러 나갔다.
‘암조 애들이 알면 백 번 놀릴 거야. 놀림당해도 싸다, 세실리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지레 창피한 마음에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불꽃놀이를 가까이서 본 것도, 한밤중에 남몰래 나간 것도 다 좋았다.
‘그리고, 내내 안겨 있던 것도….’
꺄악!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바둥거렸다.
이 마음이 언젠가 희미해지고 사라진대도, 퍽 좋은 추억일 거였다.
‘그래도 동대륙 이야기를 들은 건 나름 소득이었어. 거기서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으니까….’
뭘까? 무슨 심경의 변화 덕에 그는 후작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게 된 걸까?
아니, 사실 그게 좋았던 것보다도….
“전하께는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말이라는 게.”
“그냥,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일까요.”
그렇다면, 언젠가 그의 속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어째선지 황급히 말을 돌리긴 했지만….
‘괜히 죽는다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그가 죽음을 입에 담자니,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최후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예민하게 굴고 말았더랬다.
원작대로면 그가 죽는 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격랑 때.
올해 연말을 기해 귀족파가 계획 중인 그 끔찍한 일.
그러니까 그 흉계를 막아내기만 한다면, 그의 최후도 분명 달라질 거였다.
‘거기에 중심 역할을 하는 게 루시페우스인 모양이지만…. 원작 루시페우스도 제가 거기에 휘말려 죽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
내 덕에 악행 안 저지르고, 그로 인한 사망 엔딩도 피하고.
내가 여러모로 좋은 일 많이 해주는 셈이다.
‘따, 딱히 뭐, 그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인도적인 차원에서 하는 일인 거지.’
오늘도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하며,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어제 그렇게 늦게 잤는데, 잠은 왜 또 이렇게 일찍 깨냐아….’
흐아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이리저리 돌리던 내 시선의 끝에….
“어머.”
발코니 쪽 바닥에 내 살굿빛 실크로 된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제가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나지막하게 울리던 그의 목소리. 귓가에 내려앉은 그 말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미 슬리퍼를 돌려받은 느낌이었다.
‘진짜 찾을 줄은 몰랐는데….’
마법으로 가능한 거였을까? 깜깜한 공중에서 떨어뜨린 거라 진짜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서 시녀들에게 둘러댈, 방 안에서 슬리퍼 잃어버린 사연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두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언제 다녀갔대.’
제게 허락된 곳은 발코니까지인 것처럼, 안쪽은 눈길조차 안 주던 그였는데.
내가 잠든 사이 그가 다녀갔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새삼 또 설레…기보다 현실적인 걱정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나 전생에선 피곤하면 코 골았는데. 어제 혹시…. 괜찮았을까?’
잠옷 바람으로도 모자라 맨발을 보였다는 민망함은 저 멀리, 내가 자는 사이 그가 다녀갔다는 게 더 창피할 뿐이었다.
‘맨발 따위가 뭐라고 말이야.’
전생 현대인은 그런 데 연연하지 않는다고. 수런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일부러 머릿속을 와글와글 허튼 생각으로 채웠다.
나는 침대 끝에 턱을 괴고서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늘 발에 꿰는 것이지만, 발코니 쪽을 향해 정갈하게 일자로 놓인 것이….
‘어쩜 저것도 꼭 자기처럼 놓냐.’
어제 나를 단단히 안고 있던 그 단정한 신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헤헤.”
배시시 웃음이 났다.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지.’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친해지면 그가 제 속내도 마음껏 털어놓는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도 이미 좀 그런 셈인 것 같고 말이야.’
뭐, 어차피 다른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니, 속 깊은 친구라도 되어 주겠다는 거지.
그러면 돌아올 수 없는 바다의 일도 자연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리나와 같은 암조 기사들이 늘 하던 말인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얼굴 근육을 마음껏 풀어두고서 다시금 헤벌쭉 웃을 때였다.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양해를 구하는 말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전하, 일어나 계셨네요?”
“으응, 좋은 아침이야.”
“네, 기나긴 하루가 시작되었어요.”
메리제인이 커튼을 활짝 열자, 뒤따라 들어온 패티샤가 손뼉을 짝짝, 두 번 쳤다.
두 사람의 뒤로 시녀들이 욕조를 들고 들어왔다.
‘아, 맞다.’
간질간질한 상념이 깨져 아쉬운 것도 잠시. 문을 열고 들어온 내 시녀들의 결연한 표정에, 나도 덩달아 비장해졌다.
‘드디어 태양절.’
민간에서의 태양제가 어제까지였고, 태양절인 오늘을 기점으로 앞으로 보름간 귀족 사회에서의 태양제가 시작된다.
해가 가장 높은 시간에 치러질 태양절 기념식부터 저녁의 대축연까지, 온종일 태양절 행사들이 이어질 거였다.
‘그리고 그 연회에서, 루시페우스는 레오폴트와 친근하게 지내는 아멜리를 보고 배신감을 느껴 그릇된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라는 게 원작의 플롯이었지.’
그렇다면 루시페우스는, 이번에도 그러할까?
「“레이디께서 무고하십니까. 황실파의 수장이 되실 소공작과 한배를 타신 사이 아닙니까.”
아멜리의 자그마한 손이 저도 모르는 사이 허공을 날았다.
짝.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리 말하지 마세요.”」
루시페우스의 집착 플래그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사건.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나는 내내 바라왔지만, 이제는 그 이유가 사뭇 달랐다.
‘전에야 루시페우스가 집착 서브 남주 기질 발동하면 아멜리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그다음에 이어질 말이 지레 창피하여 나는 물속으로 코까지 담갔다.
“전하, 움직이지 마세요! 머리카락 빠져요.”
…아니, 그러려고 했다.
창피해할 겨를 없는 황족 인권 보장해!
“대륙에 강력한 평화를 선사하신 태양의 주신이시여. 마(魔)를 멸할 찬란한 볕을 선사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태양절 행사는 황성 한가운데 자리한 개선 광장에서 열렸다. 황제, 그러니까 아버지가 기도문을 읊는 동안 성화대를 둘러싸고 선 대신관들이 신성력으로 햇빛을 모았다.
나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베일을 쓴 채 대신관들의 뒤에서 기도를 올렸다.
화륵, 아버지의 기도 소리가 절정에 다다를 때쯤 성화대 아래쪽에 불이 붙었고, 불씨는 금세 기름 먹인 밧줄을 타고 성화대 상부를 밝혔다.
와아아! 광장을 둘러싼 귀족들과 그 너머의 제국민들이 환호했다.
오늘부터 태양제가 끝날 때까지 타오를 성화.
그 성화를 바라보며, 나는 태양제 기간 동안 일어날 사건들을 떨리는 마음으로 가늠했다.
‘오늘 연회랑 다음 주 세르니타의 사냥 대회가 피크지.’
원작에서도 중요했고, 내가 바꾸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도 중요했다.
‘우선 오늘은, 드디어 렌틸 자작과 힐베르크 후작이 등장하는 날이니까.’
크으, 원작에서는 그냥 아멜리와 루시페우스의 사이가 틀어지는 날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내가 오래간 준비해온 원대한 계획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었다.
‘힐베르크 후작 쪽 일은 루시페우스에게 미안하게 됐지만, 렌틸 자작 일은 별 영향 없겠지…?’
게이블스를 흔들어서 귀족파가 허튼 생각할 여력을 안 주면, 루시페우스가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섣불리 건드렸다가 죽는 일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그의 안위를 고려하게 됐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나는 한참 동안 그의 걱정을 했다.
“그건 구원일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쥐고 깨어난 그 말소리를 내가 옳게 해석한 거라면, 내가 하려는 일은 모두 잘될 거였다.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사랑뿐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도 덩달아 좋은 일일 테니까….
그중 가장 뇌리에 선명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기도하기 위해 모아 쥔 양손에 힘을 꼬옥 주었다.
“마지막으로 세실리아 4황녀 전하 드십니다!”
언제나처럼 내가 황실 가족 중 가장 마지막으로 연회장에 입장했을 때.
“전하 옆에 저분은….”
“호위 기사가 아니네요?”
“블라우베르 소백작의 아들이 4황녀 전하의 수석 보좌관으로 들어갔다더니.”
“맙소사, 서출, 어, 어흠, 평등한 인재 채용을 추구하신다더니, 결국…!”
“말이 그렇지, 혹시 가까운 사이이신지도.”
“젊은 애들 사이에서는 막심 경이 4황녀 전하께 연서를 쓴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역시나.
생각대로인 사람들의 반응에 나는 입꼬리를 생긋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막심 블라우베르의 에스코트를 받아 입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야인(野人)으로 지내던 그가 내 보좌관이 됐음을 공표하는 데, 이보다 더 주목받을 기회가 또 어디 있겠어?
평소와 달리 사람들이 내게 환호도 못 한 채 눈 빠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져, 나는 마음이 꽤 고무되었다.
“진짜 긴장되네요. 전하께서야 늘 하시는 일이겠지만.”
“말은 이따가. 입 모양 읽혀.”
나는 큰 무대에 처음으로 올라선 내 새로운 수하를 위해 친절한 조언을 덧붙였다. 겉으로는 이런 자리가 매우 익숙한 듯 태연히 미소 지어 보였지만, 오늘도 나만의 주문을 속으로 열심히 읊으면서.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준비해놓은 판이 너무도 큰걸…!
‘이 정도로 쫄면 안 된다고. 관객은 안 쫄아.’
오늘은 정말, 관객의 마음이어야 했다.
판을 내가 깔기야 했지만, 주인공들은 따로 있었으니까.
연회장 한가운데의 붉은 융단을 지나 막심과 헤어지고, 내 가족들이 자리한 단상에 올라섰을 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서 연회장 안을 살폈다.
‘보자, 잘 왔나…?’
마치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짠 듯이, 섬처럼 인파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자리한 오늘의 주인공들.
‘저 사람이 힐베르크 후작이구나. 역시 여주 아버지답게 잘생겼네.’
오늘 아멜리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아멜리의 친부, 힐베르크 후작.
‘어머, 드레스 차려입으니 딴 사람 같네. 전직 게이블스 영애 기품이 어디 안 가나 봐.’
그리고 게이블스의 성을 버린 이후로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황궁 연회에 참석한, 나의 스승 렌틸 자작.
갑작스레 나타난 연주홍빛 머리칼의 귀부인을 보고서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는 눈초리였다. 그녀의 10대 시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대도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확신하기 어려울 거였다.
‘그리고 게이블스 후작은….’
게이블스들이 늘 자리하는 곳을 살피니, 게이블스 후작이 혼란스러운 낯을 하고 있었다. 학자의 탑에 은둔했던 누이가 별안간 30년 만에 나타난 것이 퍽 충격적이리라.
나는 내가 만들어낸 풍경에 도취되어, 실룩이는 광대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게이블스들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알비누스 후작의 뒤, 루시페우스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시선이 따갑기 그지없었는데도.
“지고하신 대륙의 태양, 신께 축복받으신 보름달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힐베르크의 가주, 에이든입니다.”
아버지의 짤막한 개회사가 끝나자마자 힐베르크 후작이 단상 앞으로 나아왔다. 제 친딸, 아멜리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사람들이 가장 주목할 순간을 기민하게 고른 눈치였다.
두 사람의 사이를 추측하느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드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