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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93화 (93/220)

93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9)

“경이? 불꽃놀이를?”

루시페우스와 불꽃놀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차피 아멜리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서.’

내가 속으로 작게 코웃음을 쳤을 때였다.

그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 목소리는 언뜻 해명하는 것처럼 울렸다.

“저야 짐작하신 것처럼 아버지께 퍽 귀애받지 못하고 자라서 말이죠.”

귀애받지 못하였다라. 알비누스 부자가 한 짓에 비하면 퍽 고상한 표현이었다.

“제 어린 시절을 안타까이 여기신 김에, 제 생애 첫 불꽃놀이를 함께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안타깝게 여겼다고…?”

“아닌가요?”

…아닌 건 아닌데.

나는 루시페우스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가 아멜리와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훼방 놓으면서도, 한편으론 늘 그런 마음이었다.

마탑에서 쫓겨나 달빛 아래서 끅끅대며 울던 아이, 저녁놀 진 수면처럼 일렁이던 붉은 눈동자, 가늘게 떨리던 왜소한 어깨 같은 것들….

벌써 10년도 지난 풍경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들이 없도록 빨간 눈에 대해 조사하기도 하고 혼외자에 대한 인식도 바꾸려던 거니까.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반칙인데.’

덕분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 거였다.

내가 고개를 떨구듯 작게 끄덕이자, 이내 그가 내 남은 한 손을 받쳐 올렸다. 양손을 그의 손에 하나씩 올리고서 마주 본 모양새가 되자.

“역시, 제 작은 빛께선 너그러우셔서.”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 창백히 빛나는 그의 낯에, 따스함이 감돌았다.

“제 발을 디디시죠. 귀한 슬리퍼 잃어버리시면 안 되니까요.”

그리 말하며 그는 그의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그대로 그의 구두 위에 한 발씩 올라섰다.

‘순간 이동으로 가려는 거겠지?’

이르겐트의 내부에서 겪은 이동 마법진은 기절할 것 같은 괴로움을 선사했지만, 그의 마법이라면 안심이었다.

얼마 전 날뛰는 말에게 걷어차일 뻔한 걸 그가 구해줬을 때도 그랬으니까.

그래, 언제부턴가 나는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를 남몰래 좋아하게 된 마음과 별개로.

그가 알비누스 후작의 사냥개고,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열어 대륙을 위험에 빠뜨릴 음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걸 알면서도….

내게 보여주는 다정한 순간들과 나를 착각하게 만드는 따뜻한 기색 때문에.

나만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그의 말소리를, 위험한 순간마다 나를 구하고 말았던 그의 손끝을 믿어서.

‘정말 미쳤지, 세실리아.’

사랑 따위엔 절대 빠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서는…. 자조적인 마음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서로의 심장이 맞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 내 눈가에 그의 숨결이 닿은 순간.

어느새 우리는 황성의 상공에 떠 있었다.

저 멀리서 터지는 불꽃놀이를 세실리아가 눈에 담자,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 색색의 불꽃이 깃들었다. 황족의 상징인 금빛 반점만이 물들이던 바로 그 자리에.

그 광경에서 루시페우스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반의반 쪽인 저와 은사를 진 그녀.

변장 모자를 쓰면 은사야 가려진다지만, 마법에 영향받지 않는 녹금안은 제가 그녀의 곁을 찰나조차 지킬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애초에 감히 그런 걸 상상한 적도 없지만.’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불꽃의 잔상이 범벅되던 순간, 루시페우스는 그 박탈감을 잊고 말았다.

제 눈동자에도, 제 비천한 출신의 증명에도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을 거여서.

그녀가 제 손을 잡고 슬리퍼만을 사이에 둔 채 제 발을 딛고 올라섰을 때. 그녀의 눈동자가 제 눈에 비친 것과 같은 무늬로 물들었을 때.

루시페우스는 그 순간이나마, 제가 그녀의 곁을 차지한 것 같아 가슴이 뻐근해졌다.

제가 다른 사람처럼 거리낌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존재도 그녀뿐, 마음 놓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존재도 그녀뿐, 제 빨간 눈을 아무렇지 않은 눈빛으로 본 존재도 그녀뿐.

그런 그녀와 잠시라도 닮아 있을 수 있어서.

그리고 그제야, 그는 제가 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황성 남쪽을 흐르는 렌강 상공.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발아래 두고서, 루시페우스는 겹겹의 결계를 둘렀다.

저조차 볼 자격 없는 세실리아의 무방비한 차림을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여리디여린 그녀가 낯선 고도의 한기에 재채기조차 하지 않도록.

몸속 깊은 곳에 갈무리해둔 지 오래인 신성력도, 실낱같이 짜내어 그녀를 따뜻하게 하는 데 썼다.

그녀가 마법의 부작용을 겪지 않도록 마력도 조심스레 쓰는 중인 만큼, 제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폭주하고 말겠지만….

세실리아의 곁이니까 그는 극도로 주의할 수 있었다.

이번의 삶을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해준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세실리아는 오늘도 그의 품 안에 나붓이 안겨 있었다. 며칠 전 그가 오래간 곱씹었던 양팔의 간격 안에 나긋한 등과 가녀린 다리가 자리했다.

떨어질까 무서운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면서도, 그와 가깝기를 경계하는 양 어색하게 몸을 떨어뜨린 채였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사치 부리고 있으니까.

털끝 하나 닿아 있지 않대도 사람 하나를 공중에 띄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그때의 감각이 그에게는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타인을 품에 안아본 것 또한 처음이어서.

전하께서 저와 닿아 있으셔야 저와 함께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그런 거짓말을 그는 저도 모르게 입에 올려버렸다.

꼭 그래야 해…? 꺼림칙한 듯 우물대면서도 순순히 목을 감싸 오던 가느다란 팔뚝. 제가 안는 대로 순순히 그 가뿐한 무게를 기대던 몸짓.

그리고 제 눈동자에 비친 것과 동일한 무늬가 새겨져 있을 그녀의 눈동자.

그 모든 것이 너무 좋아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으면서도, 너무 좋아서 더 오래 살고 싶었다.

그 벅참을 어쩌지 못해, 그는 천천히 제 손에 맞닿은 그녀의 오금을 문질러 보았다. 마치 제 지문을 새기려는 듯, 깊고도 천천히.

내내 고개를 저편으로 돌리고 있던 세실리아가 문득 목소리를 울렸다.

“어때. 어린 시절에 못 본 거 보상받는 느낌이야?”

“…황홀하군요. 죽기 전에 이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을 정도로요.”

이번의 주마등은 분명히 그녀와의 추억들로 점철돼 있을 것이다. 루시페우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것이 저 혼자만의 추억이겠지만, 뭐 어떻겠는가. 그것이 음침하대도 아무도 모르니 그만이었다.

그런데 세실리아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 목소리를 울렸다.

“왜 불길하게 죽는다는 소리를 해?”

“사람은 다 언젠가는 죽으…니까요?”

그로서야 제 죽음을 정확하게 계획하고 있었지만.

세실리아가 이 화제를 빨리 피해주길 바라, 루시페우스는 부러 농담인 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았던 걸까. 얼마간 말이 없던 세실리아는 새로운 불꽃이 열 개는 더 터지고 나서야 중얼거리듯 말했다.

“경은 안 죽어.”

“제가요?”

“안 죽을 거야.”

“…저도 사람인데요.”

그리 말한 루시페우스는 저만 아는 실소를 내뱉었다.

세실리아 말고 그 누가 저를 사람으로 대하기나 하던가. 제 존재를 누가 달가워나 해주던가.

그 실소의 끄트머리에 수십 년의 회한이 맺혀 있었음은, 아무도 몰랐다.

“그럼 좀 더 살아볼까요.”

“좀 더 살지 말고, 수명 다할 때까지 살아.”

“…그럴까요.”

제 작은 빛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듣겠으나, 그것만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전생에서 그랬듯 이번 생에도 그의 생은 거기까지로 정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세실리아의 말에 큰 기대를 걸고 싶어졌다.

그러면 곁을 내어 주시나요. 제가 당신의 무엇이라도 될 기회가 올까요.

그 모든 것이 무용한 물음임을 알아, 루시페우스는 정작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제가 동대륙에 있었을 때 말입니다.”

세실리아는 여전히 불꽃이 터지는 먼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지만, 그녀가 제게 귀 기울이고 있음을 루시페우스는 알았다.

“동대륙을 현자의 대륙으로 만들어줬다는 영험한 곳들에 많이 다녀 보았습니다.”

그 영험함이 제게 무슨 답을 줄까 봐서, 그는 번번이 동대륙을 헤맸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 많아 밤이면 은하수가 머리 위를 빼곡하게 채웠습니다. 이 폭죽의 불꽃과는 퍽 다르지만, 밤하늘이 반짝거린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말하며, 루시페우스는 스스로에 대한 낯섦을 느꼈다.

그는 애초에 그리 말을 길게 하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러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모든 것은 목적 아래 꼭 필요한 만큼만. 그것이 그의 언행에 규칙이 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런 대자연 아래에서는, 모든 노력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수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루시페우스는 제게 정해진 수명이 올해까지라고 생각했다. 사인이야 다르겠지만 수명은 저번 생이나, 이번 생이나 다를 바 없을 거라고도.

거기까지 말한 루시페우스는 작게 자책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에게는 평생 그에게 귀 기울여줄 부모도 형제도 없었으므로, 남에게 불필요할 이야기를 해본 적 또한 없었다.

한데 제 작은 별에게는, 한순간이라도 저를 더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자꾸만 말 걸게 되고 가닿게 되는 거였다.

그래도, 이런 건 역시 이상했다.

루시페우스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이상하게 들렸겠네요. 전하께는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말이라는 게.”

“그냥,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일까요.”

그러고 보면 제 작은 별 또한 궁금해할 리 없는 이야기였다.

자꾸만 뭘 바라게 되는 걸까.

그가 다시금 스스로를 책망할 무렵, 세실리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경은….”

동정의 눈빛일까, 눈동자에 오래간 그를 담고 있던 세실리아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꺅.”

허튼 생각에 빠진 그를 나무라려는 듯, 갑작스레 거센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아차.’

집중이 잠시 흐트러져, 겹겹이 둘러두었던 마법 중 한 가지가 깨진 모양이었다.

‘은신 마법은 안 깨졌으니 다행이지만.’

찬란히 나부끼는 은빛 머리칼의 한 올이라도 다른 누가 봤다간 여러 의미로 곤란했을 터였다.

남에게 들켰다는 것도, 제가 독점한 이 순간 그녀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는 것도.

그가 그 은밀한 안도감을 곱씹던 순간.

“앗, 슬리퍼어….”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울렸다.

“날아갔어.”

갑작스레 불어닥친 바람에 한 짝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한쪽 발에만 위태롭게 슬리퍼가 걸려 있었다.

아, 어쩜 저곳마저 조붓하실까.

뒤꿈치에서 조잘조잘한 발가락까지 굴곡진 곳 없이 길게 뻗은 발. 그녀의 시중을 드는 이가 아니라면 절대 볼 일 없을 부분.

그것이 무례라는 생각도 못 한 채 루시페우스는 세실리아의 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를 안고 있어 그 발 한번 만져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

‘방금 방심하여 슬리퍼를 잃어버리시게 만든 주제에.’

저열하기 짝이 없는 감정 아닌가.

제 작은 빛을 마음에 담은 이후로 새삼스러울 것 없어진 자기비하를 서슴없이 하며, 루시페우스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가 찾아다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날아간 줄 알고?”

“그쯤이야 제게 어렵겠습니까.”

“…하긴.”

세실리아가 수긍하는 기색에 루시페우스는 기분이 즐거워졌다. 그것이 저를 믿어 주심이었으니까.

궂은일은 나의 몫.

음습하고 저열한 것도 모두 나의 몫.

당신께서는 고운 자리에 늘 쉬고 계시길. 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셔주시길.

제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저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주시길.

더 오래 기억해 주신다면 두 생의 말미에 큰 영광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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