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8)
‘아, 아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마음 줬다고 다른 거까지 다 줘버리면 진짜 전생 반복이다….’
나의 목표는 이 싱숭생숭한 마음을 스쳐 지나간 바람으로 매듭짓고서, 평생 황실에 붙어사는 것.
이 마음이 더 이상 깊어지지 않게끔 노력하는 것.
그러니까, 그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전하께도 체질상 큰 비밀이 하나 있으시지요.”
다시금 심장이 뚝 떨어졌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역시 알고 있었던 거였어…!’
황망한 마음과는 달리, 나는 짐짓 태연한 듯 대꾸했다.
“…비밀이라.”
“전하께서 3황녀 전하의 사랑을 늘 지니고 다니셔야 하는 이유.”
“…….”
“늘 과하리만치 많은 호위를 몰고 다니셔야 하는 이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가 레베카의 초커에 대해 언급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던 거긴 했지만.
나를 비밀리에 수행하는 그림자 기사들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긴 했지만….
‘왜 새삼스레.’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데.
내가 제 약점을 알아서 나를 해칠 수 없다더니,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내가 자꾸 저를 방해해서 후작에게 깨지니 못 참겠다 싶어졌나?
나는 두려운 마음을 숨긴 채 내게 떨어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데 오히려 그의 낯이 더 초조해 보였다.
그러니까, 초조함….
‘그 루시페우스가? 내가 아멜리를 도와줘서 계획이 틀어졌다고 찾아와 놓고? 내 약점을 갖고서 거래하자면서?’
그런 기색이 읽힌 순간, 우리가 꽤나 가까이 있다는 감각이 느껴졌다. 새삼 체열이 훅 끼쳤다.
그리고 그 온기는, 내게 해가 될 제안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느새 명료해진 내 눈동자에 응답하듯, 그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전하께서 제 비밀을 알고 계신 것처럼, 저도 전하의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전하께서 제게 지신 빚뿐이군요.”
“동화 몇 개쯤은 당장에라도 갚을 수 있다니까.”
무거운 분위기를 떨치기 위해 내가 뱉은 말에,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낯 어디엔가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러니까, 그도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짧은 정적이 흘렀다. 루시페우스는 얼마간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이따금… 찾아뵙고 싶습니다.”
황궁에 무단 침입하겠다는 거야, 그런 농담이 떠올랐지만 그뿐. 그의 낯이 단단히 굳어져 있어 나는 아무런 말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따금 이렇게.”
어느샌가 장갑을 벗은 그의 맨손이, 유리잔을 쥐고 있던 모양 그대로 멎은 내 손에 닿았다.
“제가 닿는 걸 허해 주시기를.”
천천히 내 손을 휘감는 그의 커다란 손. 한편으로는 내 손안에 그의 손이 가득 찼음이었다.
차가운 것을 오래간 쥐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손은 거친 열기로 내게 쥐였다.
손을 맞닿게 한 그때부터. 내 손이 그의 손안에, 아니 그의 손이 내 손안에 밀어 넣어진 그 모든 순간에… 루시페우스의 눈동자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어떤 경건한 의식인 것처럼.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면 안 돼.’
그의 진지한 얼굴, 무언가 갈구하는 눈빛, 절박한 기색. 그런 것을 읽어버리면 내 마음을 흘려보낼 수 없게 된다.
…어차피 그의 마음은 다른 데 있으니까.
나는 부러 가벼이 대꾸했다.
“이런 거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장난처럼 네가 내 손을 잡아보곤 하는 것에.
정작 연모한다는 레이디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으면서, 내게만 이러는 데 무슨 의미가 있어서.
“정말로.”
내 손을 쥔 루시페우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꾸욱 힘을 줬으면서도 내 손을 아프게 하지 않는 그 정도를 그는 알았다.
“너무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제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전하시라도 그건 모르시겠지요.
너무도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마치 어떤 고해성사처럼 울렸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마주한 눈에 힘을 줘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목구멍에서 울컥한 것이 눈가에 방울질 것 같아서.
자칫하면, 내가 그에게 특별한 뭐라도 되었다는 착각에 빠질 것 같아서.
경이 연모한다는 그 레이디는 어쩌고….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너무 손해인 것 같은데.”
간신히 빚어낸 장난 같은 대꾸에, 그의 낯이 안도한 듯 풀어졌다.
그걸 근사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마음이 울적해지고 말았다.
‘구제 불능이야, 세실리아.’
루시페우스는 정말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이따금 찾아뵙는다더니, 이튿날부터 매일.
프리지어궁에 쳐진 겹겹의 결계는 그에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고, 거기다 무슨 마법을 쓴 건지 그는 발코니에 제 모습을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제일 문제지, 결계를 점검해 보라고 말할 생각이 없으니….’
결계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테지만.
그게 닷새를 넘어가자 나는 적당히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대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느새 그의 방문에 퍽 익숙해졌다는 소리다.
“제가 연모하는 레이디의 채권을 또 인수하셨더군요.”
“뭐어, 코코 에스메르도 로즈버리에 투자하는 것뿐이야. 경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덕분에 또 아버지께 혼나고 말았고요.”
“말썽꾸러기 아들이네.”
그러고 보면 루시페우스는 내 앞에서만 알비누스 후작을 두고 아버지라 일컬었다.
‘케인네 보고에는 어렸을 때부터 꼬박꼬박 가주라고 부르게 시켰다고 돼 있는데.’
그래서인지 ‘아버지’를 언급하는 말소리는 다소 독특하게 울렸다.
“제 탓이 아니니 억울한데, 코코 에스메르를 팔 수도 없고요.”
그의 입매가 빙긋이 흘렀다.
루시페우스는 에스메르 상단과 나의 관계에 대해 떠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르탱이 알비누스 상단하고 만나고서 화재가 났으니, 정황상 충분히 에스메르 상단을 의심할 수 있는데 말이야. 아멜리의 채권을 인수한 것도 그들 뒤를 캔다고 볼 수도 있고….’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경계해야 할지….
‘어쨌건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조, 좋지…만….’
으윽, 정말 기대하면 안 되는데.
그토록 간절한 듯 거래를 청한 것치고, 루시페우스가 하는 건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었다.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다거나, 내가 들고 있던 잔을 앗아 다른 곳에 둔다거나, 밤바람에 하늘대는 머리칼을 그러쥔다거나, 찌푸린 내 미간을 꾸욱 누르거나 등등.
‘내 심장에 사소하지 않아서 문제지….’
세실리아가 신성력 없는 거 알면 조심해줄 법도 한데. 그렇게 다 보이면서, 내 고동 소린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나를 안 좋아한대도, 이쯤은 배려해주면 안 되나?’
하지만 이따금, 아니 거의 매번 그의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그래서 그에게 닿은 곳에 심장이 있다고 착각하리만치.
그것이 또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누가 보면 사람하고 닿아본 적도 없는 사람인 줄 알겠어.’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그는 에스코트라도 하는 것처럼 내 손을 제 손 위에 받쳐 든 채였다.
“후작이 썩 좋은 아버지로 보이진 않더라니, 아들에게 냉정하기 짝이 없네.”
루시페우스의 눈매가 날카로이 굳었다. 제가 아무리 후작을 아버지로 부른다지만, 내가 너무 가차 없이 말한 걸까?
아니면 그가 후작에게 냉대당한다는 게 비밀인 걸까?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으, 있잖아. 경이 황실 연회 처음 온 날. 10년쯤 전에.”
그러니까 루시페우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수확제 연회 때 말이다.
“…예.”
“그때 경의 형…이 조금 이상한 소리를 했어. 그렇지?”
“…….”
아픈 데를 찔러서일까, 루시페우스의 낯이 살얼음 낀 듯 굳었다.
“너는 반쪽도 아니고 반의반 쪽 아니니?”
어휴, 지금 떠올려도 왕재수.
꿈속에서 부마가 되느니 뭐라느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도 윌로우 놈 앞에선 찍소리도 못하던 갈색 머리의 사내놈.
유학을 갔는지 사교계에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작게 어깨를 떨었다.
“그게 경의 의형, 그러니까 후작의 큰아들이었던 거잖아. 그렇지?”
“…예, 맞습니다.”
“그것만 봐도 경이 썩 곱게 자라진 못했겠구나 싶더라고.”
“그런 걸 다 기억하시고…. 신기하셨나 보군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이 퍽 냉랭해져 있었다.
놀린다 생각하는 걸까? 치부를 들춰서 불쾌한 걸까…?
아아니, 딱히 그렇다기보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우물거렸다.
‘그렇다고 꿈속에서 너를 어려서부터 지켜봤어, 이렇게 말할 순 없잖아….’
손바닥에 땀이 날 것 같아, 손을 슬그머니 치우려던 때였다.
퍼엉.
하늘 먼 곳에서 아스라한 폭음이 들려왔다.
절로 그쪽을 쳐다보니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다.
불꽃놀이였다.
‘아. 내일이 태양절이니까.’
황성 남쪽을 흐르는 렌강의 강변에서 태양절 전야제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었다.
펑, 퍼엉. 퍼펑.
색색의 불꽃이 점멸하며 다양한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예쁘네….”
나는 한동안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멜리는 레오폴트랑 불꽃놀이 구경하고 있겠지? 강변까지 갔으려나.’
요 며칠 낮에는 암조 일로, 밤에는 루시페우스의 방문으로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네….
‘아멜리는 그렇게 나름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데. 아멜리를 두고서 꼬박꼬박 ‘연모하는 레이디’라 칭하는 루시페우스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흔들림 없는 한 쌍의 눈동자가 내게 닿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멜리에게 불꽃놀이 보러 가라고 귀띔할 때 루시페우스도 옆에 있었는데.’
원망의 눈초리, 뭐 그런 걸까…?
나는 조금 씁쓸한 마음이 되어 입을 열었다.
“저, 경.”
“가까이 가 보시겠습니까.”
미안해, 경이 연모하는 레이디가 레오폴트랑 좋은 추억 쌓도록 추천해줘서, 뭐 그런 말을 주워섬기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가까이?”
“저 불꽃놀이요. 관심 있으신 것 같은데.”
“으응, 난 뭐 이 정도로도….”
괜찮은데. 여기서 봐도 잘 보이니까.
매해 나는 내 발코니에서 불꽃놀이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경호 문제도 경호 문제지만, 그 대상이 황실의 유리 몸인 나여서야 정말 언감생심이었다.
‘불꽃놀이 가까이서 못 보는 것 정도야 별것 아닌걸.’
늘 그렇듯 이렇게 보고 말아도 상관없는데.
내가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자, 루시페우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눈을 못 떼시는 것 같으시길래요.”
“어어, 그런가…?”
그냥 눈에 들어와서 봤을 뿐인데, 그래 보였나?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자니.’
속절없이 마음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야 한가득 반짝이는 풍경, 여름밤의 고즈넉한 정취…. 그와 맞닿은 내 손바닥을 타고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일 지경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아멜리가 저기 있을 걸 알아서 그러는 건가…?’
레오폴트랑 같이 구경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다거나, 뭐 그래서인가?
하긴, 나더러 저기에 가자고 할 이유가 딱히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기어들어 가듯 중얼거렸다.
“아니, 별로.”
기분이 상했음을 간신히 감춘, 바보 같은 말소리였다.
“안 가고 싶어.”
“…정말로요?”
“응.”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멜리 보고 싶어서 가려면 혼자 가라지, 괜히 휘둘리는 건 사양이었다.
내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했는지, 그는 얼마간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별안간 그가 내 턱 끝을 살며시 감싸 쥐나 싶더니, 그의 손끝이 내 입술 아래 와닿았다.
그의 엄지에 꾸욱, 아래턱이 눌렸다.
잇새에 눌렸던 입술이 슬며시 빠져나왔다.
“제가 보고 싶어서 그렇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