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7)
나와보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손거울에 떠오른 그의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필압의 강약, 문자 끝의 돌출된 세리프와 장식선까지 정교하게 계산된 그의 필체.
그 너머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게 깔끔하게 묶고 다니는 그의 머리 모양, 손목 위까지 꼼꼼하게 잠그는 그의 장갑 같은 것들이 비치는 듯했다.
그런 그가, 지금 나와보라니.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손거울에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윽고 떠오른 문자의 나열을 본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늘 이런 아름다운 달빛을 보시며 주무시겠군요.」
이런 달빛? 늘?
‘설마.’
정말로?
깜짝 놀란 나는 뒤돌아 발코니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은은한 달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는 그 커튼 너머에는… 어느샌가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열린 곳도 없는데, 커튼이 슬며시 휘날렸다. 나부끼는 반투명 직물 너머로 아른아른, 장신의 실루엣이 비쳤다.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인영이었다.
“…루시페우스.”
나는 숨을 토해내듯 그의 이름자를 입 안에서 굴렸다.
내가 요 며칠간 뇌리에서 지우지 못한 이름….
그 이름의 주인이, 내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꼼꼼하게 갖춰 입은 정장 차림이 아니라 간단한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콩닥콩닥콩닥, 심장 울리는 소리가 너무 컸다.
“이거, 진짜…야?”
내가 자꾸 생각해서 일어난 환상 아냐, 혹시?
내 목소리가 손거울을 통해 전달된 걸까, 팔짱을 낀 채 난간에 기대어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마치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가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머릿속이 혼란했다.
‘…왜?’
이 시간에 나를 왜 찾아오지? 아까 그렇게 가놓고….
‘그리고, 어떻게?’
신성력 결계가 겹겹이 쳐져 있는 프리지어궁. 개중에도 경비가 가장 삼엄한 세실리아의 침실.
그가 태연자약하게 내 발코니에 있고 그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비상사태.
‘호위를 불러야 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호출기를 누르면 방문을 열고 내 기사들이 달려 들어올 텐데.
그래야 하는 걸 아는데,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만으로도 벅차서.
올해 암조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대상으로 정한 그를 두고서….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그 모순적인 마음을 추스를 방법은 그저 외면하는 것뿐이라, 나는 모든 감정의 동요를 눌러 내리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하자, 진정.’
괜한 의미 부여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가 용건이 있어서 왔다. 끝.
그 너머를 상상하려 애쓰지 말자.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니까….’
그의 낯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는 커튼을 걷고 발코니 문을 열었다.
깊이 가라앉은 여름의 밤공기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달빛을 찬연히 받아내고 있는, 조각처럼 단단한 얼굴.
‘진짜 루시페우스야.’
바깥으로 나서니 여름의 습한 미풍이 살갗에 훅 새겨들었다. 그 온도 차를 가늠하듯 내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루시페우스의 눈동자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얼굴에 진득이 붙박여 있는 다갈색 눈동자.
무표정한 그의 낯에서 유일하게 어떤 기색이 담긴 부분이었다.
“순서를 뺏기고 말았네요.”
윌로우에게서 나를 구해주고는 말을 걸고 싶었다 하던 소년의 눈동자가 겹쳐졌다. 어떤 마법으로도 가리지 않은, 본연의 눈 색깔 그대로였던 눈동자.
그리고 마법으로 가린, 그의 그윽한 갈색 눈동자.
창을 열고도 나는 얼마간 아무 말도 빚어내지 못했다. 발코니로 향하는 문지방만 톡톡 굴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였다.
“약속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말투에는 일말의 죄송함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만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떨렸지만.
갈구라니, 내가 바라는 걸 투영하면 안 되는데.
‘게다가, 지금 약속 없이 온 것만 문제가 아니잖아?’
지금은 자정이 다 된 심야고, 여기는 일몰 후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황궁의 내궁 구역이고, 무엇보다 그는 프리지어궁에 설치된 겹겹의 결계를 뚫고 내 발코니에 멋대로 들어와 있다.
하지만 그런 논리적인 것은… 그저 머릿속에 뒤엉켜 있을 뿐. 나는 간신히 말 비슷한 것을 입에 머금었다.
“…어떻게.”
안경 너머의 눈매가 가늘게 이지러졌다. 마치 내 말소리를 한 음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내 낯을 주시하면서.
“결계가 쳐져 있었을 텐데.”
“아, 어쩐지.”
그의 낯에 적이 안도한 기색이 스쳤다. 내가 화내지 않아서일까?
“아시다시피 제 태생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라니….”
그의 태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가 빨간 눈을 지닌 건, 그저 에리나 경이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그를 잉태했기 때문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는 아직 이 세계에 상식이 되지 못한 가설. 어떤 위로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여,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 이건 또 무슨 무례고?”
객관적으로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이었으나 장난스러우리만치 어설펐다.
진심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였겠지….
루시페우스의 입매가 일자로 늘어졌다. 그 끝이 미미한 호선을 띠고 있어, 그가 웃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마르크 백작에 대해 채권 행사하시는 것. 잘 보았습니다.”
“못 알아본 줄 알았는데.”
끝까지 모른 척해서 말이야. 그 불퉁한 마음을 나는 간신히 숨겼다.
“제가 알아보길 기대하셨나 봅니다.”
…아니, 숨기지 못했나.
나는 당황한 마음을 눌러 내리며 태연한 척 대꾸했다.
“뭐어, 경이 채무자하고 연이 따로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길래. 뭐 하러 왔나 궁금했달까?”
기실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그가 적당히 넘어가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내가 황급히 지어낸 말들이 진실인지 가늠하려는 듯, 루시페우스는 얼마간 말없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앗,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잠옷 차림인데…!’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숄이라도 걸쳤어야 하는 건데! 지레 창피해진 내가 발끝을 꼼지락댈 때였다.
“뵙고 싶어서 갔었습니다.”
“으, 응?”
갑자기? 깜짝 놀라 내 눈이 저 멀리 떠 있는 보름달만큼 휘둥그레졌다. 하마터면 손에 쥔 유리잔을 미끄러뜨릴 뻔했다.
그런 내 낯을 스치는 그의 눈빛이, 조금 따뜻하게 빛나는 듯했을까. 그의 입가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났다.
“제 순수한 연심을 방해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했더니, 전하시더군요.”
“순수한… 연심?”
예기치 못한 말소리에 나는 황당한 웃음을 입에 머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저를 방해하시려나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역시…. 그런 거였구나.
그의 추측에 뜨끔해서일까, 심장이 욱신거렸다.
‘내가 아멜리에게 리나를 붙여둔 걸 안 시점부터 의심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가 아멜리의 빚쟁이들을 돕는 게, 그저 귀족파의 작전 때문인 건 아닐지 생각했었는데….
‘아멜리 때문이었구나. 원작 설정 어디 안 가네….’
할아버지의 빚을 받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멜리가 제 도움만 받도록, 그녀를 몰래 고난에 빠뜨리곤 하던 그였으니까.
답을 찾았으니 속 시원해야 할 일인데, 마음은 여지없이 가라앉았다.
입 안이 썼다. 그런 티를 낼 수 없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해라니…?”
“모른 척하지 마시지요.”
“…….”
“제가 그 레이디에게 접근하기 위해 부린 얕은 수작들, 다 간파하고 계신 것 알고 있습니다.”
…그 레이디에게 접근하기 위해 부린 수작. 심장이 다시금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제대로 간파했다면, 네가 지금 아멜리를 두고서 연모하는 레이디 운운하지는 못할 건데….’
내 작전이 완벽하지 못한 바람에 제 운명대로 착실히 아멜리를 좋아하게 된 거면서.
나는 가라앉는 마음을 추어올리기 위해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로즈버리 가문의 채권 문제를 공론화하시기까지…. 덕분에 제가 아버지께 크게 혼나, 퍽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소년의 것처럼 울리는 듯했다.
그러니까, 어딘가 즐거운 듯이….
‘…첫사랑이라는 게,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구석도 있지.’
잘못 들으면 이게 다 농담인 줄 알겠네.
나는 유리잔을 쥔 손에 힘을 꾹 쥐며 말을 짜냈다. 목 졸린 듯 형편없는 목소리일 터였다.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 하실 일이라는 게, 제게는 그런 결과를 낳은 것뿐이고요.”
그리 말한 그가 싱긋 웃었다.
늘 일자로 다물린 그의 입매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을 뿐이지만, 내가 본 그의 표정 중에 가장 보기 좋은 미소였다.
마치 경매장에서 내 미간을 꾹꾹 누르던 그때처럼….
‘웃는…다고?’
그 미소에는 그의 말소리와 어긋난 구석이 있었다.
‘내가 훼방 놨다면서…? 그럼 화내야 하는 거 아냐? 체념이라도 하거나.’
연모하는 이에게 다가갈 구실을 빼앗긴 사람이 저리 근사한 미소를 짓는 건… 이치에 닿지 않았다.
나는 얼빠진 낯으로 한동안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그때 문득, 검은 장갑을 낀 그의 손이 문득 허공을 배회했다.
“앗.”
내 손에 있던 유리잔이 미끄러져 날아갔다.
“무거우실 듯하여.”
잠시 뒤에는 내 방 안 어디선가 얇은 숄이 날아와 내 어깨를 감쌌다.
“고마…워?”
그는 대꾸 없이 내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편에 뜬 보름달이 그의 신형에 가려져, 시야가 순식간에 어둑해지고 말았다.
“누가 볼까 무섭습니다.”
응?
그리 말한 그의 손이 성큼 다가와, 내 앞섶을 가리려는 듯 숄의 양 끝을 쥐고서 꼼꼼히 묶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제 손끝에만 집중하여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 잠옷 바람인 거 가린다고…?
‘아니, 내가 발가벗고 춤을 추든 어쩌든 제가 무슨 상관이야?’
조금 전까지 순수한 연심이네 수작이네 해놓고, 이거 뭐, 왜.
다정한 건데에….
‘반칙 아닌가.’
자꾸만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말아, 나는 속으로나마 잔뜩 삐딱선을 탔다.
‘내 차림이 예법에 안 맞는다고 보기 싫을 거면 약속을 잡고 만나든가. 아니, 제가 뭔데 감히 황녀의 옷차림에 지적질이야?’
마음속으로는 온갖 불퉁대는 말들이 수런댔지만, 내 입에서는 그저 상식적인 대꾸나 흘러나올 뿐이었다.
“…여기엔 경뿐이고, 경이 본 게 제일 무서워.”
여기는 3층, 맞은편은 정원수 우거진 정원과 그 너머 담벼락뿐인데 말이다.
“네, 저도 문제고요. 달의 신도, 풀벌레도, 밤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문제입니다.”
그 말소리는 마치 농담처럼 울렸지만… 정작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낯은 조금도 농담 같지 않았다.
진지한 그의 표정에, 그러느라 퍽 가까워진 거리까지.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속절없이 떨렸다.
‘드, 들리는 거 아냐…?’
심장아, 조용히 좀 뛰어….
내가 조마조마한 마음에 눈동자만 굴릴 때. 좌우 대칭 완벽한 리본을 만들려는지 한참 꼼지락대던 그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거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
“아직 늦지 않았다면요.”
윽.
연락이 늦은 걸 타박하니 기다린 거냐던 그의 대꾸가 떠올라 나는 또 창피해지고 말았다.
나의 환생은 완벽하지만, 집에 쥐구멍 하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나는 짐짓 태연한 낯을 꾸며내며 말했다.
“누구랑?”
“전하와도 괜찮고, 코코 에스메르 양과도 괜찮습니다.”
“타깃이 명확한 거래가 아니네. 그럼 굳이 나나 코코 에스메르일 필요 없이….”
“아뇨.”
루시페우스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니, 달빛을 등진 그의 낯이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리만치….
리본의 양 끝을 꾸욱 당기는 그의 손짓이 마침표를 찍듯 결연했다. 그의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전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겁니다.”
“…….”
“다른 누가 아니라요.”
조금 전까지 코코 에스메르를 언급하며 다소 즐거운 듯 울리던 말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무엇이든, 이미 그의 청을 수락하고 만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