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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90화 (90/220)

90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6)

마르크 백작의 재판은 루시페우스가 직접 챙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것은 그의 기억에 ‘없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손이 개입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원고 명 코코 에스메르.

그러니까….

‘직접 오시려나.’

오셨을까, 안 오셨을까.

매번 능청스레 연기하기를 즐기시니 오실 법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천진하게도 안 오실 수 있는 법이었다.

‘설마 여기에까지.’

그의 기대는 보통 충족되는 법이 없으니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지만….

그러면서도, 루시페우스는 원로원의 재판정으로 향했다.

그가 가지 않는다면 기회조차 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그의 발걸음은 참 늦됐다.

“잠시 실례.”

끼익, 재판정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간신히 도착할 정도로.

제 기대가 어긋난다면, 그런 곳에 일 초라도 오래 남아 있을 수 없었으니까.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직시할 수 없어서 무섭고, 한편으로 제 기대가 어긋날까 무서웠다.

그리고 저 앞에, 제 작은 빛을 보았을 때.

‘역시, 오셨군….’

루시페우스는 제가 그녀를 마주치기를 오래간 갈망해 왔음을 알았다.

“마르크 백작가는 채무를 이행하고, 마르크 선대 백작의 사탕발림에 속은 로즈버리 선대 남작에 대한 위자료로 로즈버리 남작가에 금화 열 개를 지불하도록 한다.”

재판은, 그녀의 압승이었다.

제 작은 빛께서는 또 한 번 후작의 음모를 망치셨다. 그 비밀스러운 희열에 그의 가슴 끄트머리가 간질거렸다.

루시페우스는 팔짱 낀 그대로 제 늑골을 눌러보았다.

그 은밀한 기쁨을 진정하려는 듯이.

“수고했어.”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제게 하는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귀 기울이게 되었다.

그저 그런 무채색 인파 속에서 늘 밝게 빛나는 제 작은 빛이셨기에.

“아주 명(名)대리인인걸? 소질 있는데 어떡해, 이제 취직했으니 바로 은퇴인데.”

“일찍 저 못 들이신 거 아쉬우실 테니, 바싹 부려 먹어 주십시오.”

헤헤헤, 그녀의 대리인이 꽤 넉살 좋은 낯을 했다.

‘암녹색 머리칼이라…. 낯이 익은데.’

본디 그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접점이 없는 이가 낯이 익은 일이란 그에게 불가능했다. 누굴까….

“올해엔 제가 아리타우노스 별의 축복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리도 존안을 자주 뵐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머, 저 영식 또.”

“정말 저돌적이군요.”

“저 정도면 아무래도 사심이.”

아.

‘알제니아에서였던가.’

루시페우스는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잔을 깨고 말았던, 그 낯선 경험을 떠올렸다.

그녀와 얽힐 때마다 드는 감정의 동요도, 하물며 뱃속의 간질거림조차 폭주의 전조는 아닌지….

루시페우스는 제 내면에 나타난 미세한 변화를 가늠하기 위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제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 표정으로써 대리인의 활약을 치하하고, 예상한 승리를 거머쥐고서 작은 모자 쓴 머리를 흔들며 밝게 웃는 그녀.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제가 아니라….

아, 문득 팔뚝이 아프기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대편 팔뚝을 쥔 손에 무참히 힘을 주었음이었다.

‘…천치가 되는 것 같군.’

이 동요는 또 무엇일까.

그는 고요히 시선을 그녀의 곁으로 옮겼다.

알제니아에서 그에게 큰 당혹감을 선사했던 신사가 그녀에게 싹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미소 역시 담백하기 그지없는데.’

그녀를 보는 눈이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 음습하고 혼란한 마음과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산뜻하고도 간결해 보이는데….

‘그런데 나는 왜 저자가 미운 걸까.’

루시페우스는 팔짱을 낀 채로, 그렇게 멀거니 앉아 있었다.

막심 블라우베르가 재판부 판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하릴없이 돈을 갚아야 하게 생긴 마르크 백작이 머리를 쥐어뜯고, 귀족파 방청객들이 혀를 끌끌 차며 재판정을 나가는 와중에도.

루시페우스는 그 자리에 앉아 내내 앞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에 일고 만 이 감정의 물결에 대해, 루시페우스는 세실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별안간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저를 향했을 때.

모른 척 재빨리 고개를 돌리기야 했으나 그녀가 필시 저를 눈에 담았을 그 찰나.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 제 상이 얼룩진 건 한순간에 그쳤겠지만, 그 순간만으로 모든 심란함이 일거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족했다.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곤란한 감정을 느낄 일도 없지….’

무언가를 넘보는 것은,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언감생심인 일이었으니까.

그게 마음처럼 될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또, 또! 또냐!”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알비누스 후작의 집무실 바닥에 얼룩이 졌다. 후작의 책상에 있던 잉크 병이었다.

“또 에스메르 녀석들이야!”

“…….”

“대천사의 성상도 그렇고, 마르크 쪽 일까지, 도대체 어떻게! 번번이!”

“마르크 백작가의 자금이 저희 쪽으로 흘러들어 온 정황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안심하라고 하는 소리야!”

챙강! 조금 전까지 그가 고상한 척 따라 마시던 티팟이 하늘을 날았다. 반쯤 식은 찻물이 실크로 된 벽지에 얼룩을 남겼다.

후작이 집어 던진 모든 것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 루시페우스는 언제나처럼 문가에 서서 후작이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니, 언제나처럼이라기엔 조금 달랐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즐거움이 피어나 있었으니까.

그가 후작과 거래한 이후 후작의 수작은 실패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그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것이 자책감이든, 억울함이든.

루시페우스는 그저 가만히 그곳에 서서 후작이 열 내는 꼴을 관망하고 있었다.

“어제 상회 건물 화재도, 그 녀석들과 만나고서 난 게 수상쩍단 말이다!”

그게 얼마를 공들인 일인데! 후작이 고목 가지 같은 양팔을 휘저어 제 책상에 쌓여 있던 서책을 내동댕이쳤다.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서류들이 파스스, 바닥에 흩어졌다.

씨익, 씩, 후작이 숨 고르는 소리가 한동안 공간을 울렸다.

“쿠로바츠 블랑, 그 사기꾼을 쓰겠다고 들인 돈이 얼마인지 알아?”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왜 모르겠는가. 그를 섭외한 것이 루시페우스 본인이었는데.

수십 년 전에 우정을 들먹이며 빌리고서는 안 갚은 돈을 앞으로도 안 갚기 위해 변호를 서달라니, 쿠로바츠 블랑은 자존심이 상한다며 오래간 수임을 거절해온 것이었다.

못 이길 거라 말하지 않았소, 그리 뇌까리며 재빨리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

애초에 재판의 결과에 루시페우스가 관심이 없었음을 몰라서였으리라.

“방화범의 실마리는 찾았느냐?”

“황성 경비대에서 현장을 관리하고 있어서 진입하기가 어렵습니다.”

“네놈에게 그런 게 문제가 되더냐?”

“낮에는 이목이 너무 많습니다. 밤에 시도해 보겠습니다.”

에잉,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후작은 그의 말을 납득하였음을 표했다. 루시페우스는 제 혀가 참 매끄럽다고 생각했다.

“에스메르 그놈들, 정체가 뭐야 도대체?”

“올해 황성에 들어와서 아직 파악이….”

“그게 답이라고 하는 소리냐?”

후작이 눈을 번득이며 외치는 소리에 루시페우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정체에 대해 아느냐면, 너무도 잘 알았다.

제 작은 빛이 장난처럼 굴리고 있는 사업체. 그들이 후작의 수작을 훼방 놓는 걸 알면서도 제가 눈감고 있는 곳.

아니, 오히려 후작의 일들을 망치도록 제가 고삐를 쥐여주고 있는, 사랑스러운 가녀린 손이 운영하는 곳.

사랑…스러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루시페우스는 스스로 당황하였다.

“…알아보겠습니다.”

“잘 좀 하자.”

후작은 한참 동안 제 수양아들을 노려보았다. 언제고 감정을 드러내는 법 없는 그의 매끈한 낯이 오늘도 불쾌했다.

‘도미닉이 저 녀석이 타고난 것의 반이라도 가졌으면.’

꾸우욱, 문진을 쥔 후작의 손이 부들거렸다. 열 뻗치는 대로 이것을 내던져 저 녀석의 머리라도 깨야 속이 풀리겠지만, 그러면 안 됨을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제 악의를 응축하고 또 응축하여 짓씹듯 내뱉는 것뿐.

“도미닉이 내일이면 황성에 당도하는데, 이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느냐.”

도미닉.

그 세 음절에 루시페우스는 뱃속 어딘가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우렌바흐 소공작의 천진한 낯을 볼 때, 막심 블라우베르의 예의 바른 낯을 볼 때의 그 감정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내내 즐거웠던 마음이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가주님.”

장갑 낀 손이 꾸욱 쥐였다.

‘탄탄대로구먼.’

달빛이 비쳐 들어오는 내 방 안.

시녀들이 모두 물러간 깊은 밤, 나는 차가운 유리잔을 쥔 채 내 방을 거닐고 있었다.

내가 쉬이 잠들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승리로 인해 고양된 마음 때문.

‘베라초도 처리하고, 오늘 마르크 백작 판례도 만들었으니 로즈버리에서 돈 빌린 가문들이 아멜리한테 납죽납죽 엎드리겠지.’

탄산수에 라임즙과 민트를 듬뿍 넣은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크으, 성공이 달다.’

그러니까, 나는 럼주 없는 모히토로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고 있었다.

‘게이블스에게서 뜯어낸 마지막 포도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면 딱일 텐데. 으, 아쉽다.’

다시금 아쉬워지는 세실리아의 허약하기 그지없는 체질.

‘뭐, 이거 나름대로도 풍미가 있으니까.’

나는 라임즙의 새콤달콤한 맛과 민트의 청량함이 한가득 배어나는 탄산수를 입에 머금으며 절로 미소를 지었다.

향취 가득한 음료, 여름용 얇은 커튼 너머로 은은히 비쳐드는 달빛.

‘완벽해. 그리고….’

절로 시선이 협탁 쪽으로 향했….

아니, 왜? 손거울이 뭐?

나는 나도 모르게 돌아간 고개에 화들짝 놀랐다.

‘뭐가 또 그리고야! 이걸로 완벽! 끝! 땅땅땅!’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생각하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하면 실망하게 된다. 나 혼자 이러다 말 일인데….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이 사악한 두근거림이 옅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귀족파는 이제 속 좀 썩을 거야.’

애써 오늘의 승리를 곱씹으면서.

분명 마르크 백작이 돈을 빌린 일이 귀족파의 음모와 연관이 있을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 방청석에 친우도 아닌 듯한 귀족파 치들이 자리하진 않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스레 떠오르고 마는 루시페우스의 얼굴….

‘아, 또!’

나는 습관적으로 낯을 붉히며 유리잔에 든 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눈물이 찔끔 나오니, 속절없이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루시페우스도, 마르크 백작 일이 제대로 처리되는지 확인하러 온 거였겠지.’

분명 그에게는 낭패였을 거였다.

그러니까 눈 마주쳐놓고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렸겠지.

‘…나는 반가웠는데.’

그랬는데.

탄산 때문에 눈시울에 걸린 눈물방울이 조금 무거워지려는 것 같았다.

기대할 주제가 아닌데 기대하니 실망은 당연한 거였다.

그래 뭐, 그에게는 곤란한 일이었고, 그에게는 나를 반가워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이 일 때문에 곤욕을 치를 테니 미안하기야 하지만….’

미안해서 자꾸만 그의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그런 거면 좋겠다.

따끔따끔하던 목구멍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눈물방울도 말라붙은 듯했다.

번거롭게, 이런 감정 기복이라니.

가라앉은 내 눈빛이 습관적으로 한 곳을 향했을 때였다.

손거울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락 온 거야?’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손에 쥔 잔이 넘치지 않도록 살금살금, 보폭을 크게 하여 그쪽으로 다가갔다.

달칵, 이제는 익숙한 손짓으로 손거울을 열자, 거기에는….

「잠시 나와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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