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88화 (88/220)

88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4)

“작은 빛….”

나는 그가 오후에 나를 아멜리와 구분한답시고, ‘레이디 작은 별’이라 부른 것을 떠올렸다.

‘황실 직계들에게 붙이는 별호를 부른 건 줄 알았는데.’

거기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게 조금… 애칭처럼 느껴졌을까.

또 얼굴이 빨개지려는 것 같아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쪽을 볼 수는 없다고 했지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을 고르기라도 한 건지 그의 다음 메시지가 온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그 작은 빛을 처음 본 것은 12년 전, 한 꼬마 아가씨가 쓰러져 있던 빨간 눈의 아이를 보살펴 주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루시페우스는, 내가 현실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아, 으응.”

핫, 벌써 보고가 끝났네.

온 대륙이 축제 분위기로 흥성거리는 태양제 기간임에도 임무가 많아 치러진 암조 특별 회의.

나는 아무래도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 마치고서 회의록을 꼼꼼히 읽어 봐야겠네.’

나는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냉차로 목을 축였다.

“괜찮으십니까?”

“어, 으응, 괜찮아.”

“궁의를 안 불러도.”

“괜찮대도.”

어제 축제 장터에서 내가 혼겁할 만한 사건이 있었던지라, 암조 기사들은 저마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제 일어난 일 때문이긴 하지. 날뛰는 말에 다칠 뻔한 일 때문이 아니라, 루시페우스랑 있었던 일 때문인 게 문제지만.’

그가 나와 함께 축제 장터 구경을 하고자 했던 것, 위기의 순간에 아멜리가 아닌 나를 구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십수 년 전 어렸을 때 밖에서 나와 마주친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것….

‘내가 제대로 대꾸했던 거겠지?’

핫, 또 생각이 그쪽으로.

통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감을 느끼며, 나는 손을 내저어 기사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물렸다.

“마르크 백작 재판이 내일이지?”

“넵.”

내 물음에, 알렉스의 옆에 앉은 암녹색 머리칼의 청년이 기세 좋게 답했다. 최근 3소대에 합류한 막심 블라우베르였다.

그의 의욕 넘치는 낯을 확인한 기사들 모두가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내 호위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모두 한 번씩은 막심 블라우베르를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터였다.

‘그가 좀 유난을 떨었어야지.’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들 있겠지만, 빨간 눈의 마을 문헌 조사 때부터 막심 블라우베르 경이 3소대에 합류해 있어.”

“잘들 부탁합니다.”

막심은 자리에서 긴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암조 기사들을 향해 묵례해 보였다. 나와 헨리에테를 뺀 모두가 평민 출신인데도 예를 깍듯이 차리는 게, 목이 뻣뻣하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비(非)무사 출신으로는 두 번째지. 헨리에테 경도 사무 인력이 필요하다고 했고, 현자의 탑과 전문적으로 연락할 인재가 필요하기도 해서 결정한 일이야. 대외적으로는 내 수석 보좌관 직위를 주기로 했어.”

헨리에테처럼 말이지. 내가 덧붙인 말에 막심 블라우베르가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리며 더없이 감격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내게 구직을 청한 것이 벌써 몇 년이 된 일이니 벅찰 만도 했다.

“이번 마르크 백작 재판에서 코코 에스메르의 법률 대리인으로 수고해 주기로 했고.”

“영광입니다.”

귀족파의 실세에 칼끝을 겨누는 일이 되는데도, 막심 블라우베르는 기꺼이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블라우베르 백작가가 귀족파의 주류와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막심 블라우베르가 그만큼 내게 충성…을 다하려는 것 같고….’

아니나 다를까, 막심 블라우베르의 군청색 눈동자가 열의에 빛나고 있었다.

어흠, 나는 왠지 멋쩍어져서 지레 헛기침을 했다.

“그럼 앞으로 전하께서 막심 경의 에스코트를 받게 되시려나요?”

“뭐, 황실 연회 때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황궁 밖에서 열리는 연회야 황실 지지율 상승을 위해 엘런이나 리나처럼 인기 좋은 기사들을 대동할 테지만 말이다.

내가 가볍게 대꾸한 말에, 암조 기사들의 눈빛이 의뭉스레 빛났다.

얘들 또 왜 이래, 불안하게…?

“그으, 그분께서 꽤 질투하시겠습니다.”

데릭이 의뭉스럽게 뱉은 말에, 기사들 모두가 큭큭 웃었다.

어제 성내에서 내가 루시페우스와 함께 다닌 게 암조에 다 퍼진 모양이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바람에, 나는 화난 척 재빨리 내뱉었다.

“무슨 소설들을 쓰고 앉았어? 일 얘기 하자, 응?”

탕탕탕, 내가 책상을 치면서 언성을 높이니 기사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데릭, 케인, 요것들이 진짜. 리피샤만큼 입이 싸서는…!’

기사들이 다들 나 놀리느라 신난 가운데, 막심 블라우베르만 영문을 몰라 물음표 한가득한 낯으로 제 좌우 동료들을 살폈다.

“경, 그게 말입니다.”

“알렉스!”

내 질타에도 알렉스는 끝까지 설명을 마친 듯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막심 블라우베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아아, 알비누스의 차남요?”

나는 절로 이마를 짚었다. 헨리에테가 눈치 좋게 내가 이따금 씹는 두통약을 찻잔 옆으로 밀어주었다.

“안 그래도 알제니아의 파티에서 제가 전하께 인사드릴 때, 그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에 무슨 원수를 졌나 했었습니다.”

막심이 난제를 해결했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암조 기사들의 입가에 웃음기가 물씬거렸다.

‘아니, 그때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랑 레오 다정한 거 보고서 유리잔 깬 건데, 무슨 말이야?’

나는 차마 그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어서 그를 향해 눈을 희번덕일 뿐이었다.

눈치가 있으면 거기서 끝내라, 응?

“제가 인사드린 것만으로도 그러셨는데, 제가 전하를 에스코트하기라도 하면… 어휴. 경들이 내 밤길을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으응, 눈치가 없는 모양이네.

막심의 해맑은 말에 암조 기사들은 신난 낯을 감추지 못했다. 늘 뚱한 표정의 엘런마저도 입꼬리를 조금 실룩였다….

‘암조 애들이야 나 놀린다고 그러는 거지만, 막심 쟤는 또 왜 저래….’

나는 어금니를 악물면서 다시금 책상을 탕탕 쳤다.

“됐고, 어제 공용 마차 보관소 사건은 보고할 거 없어? 경들이 어제 실수로 나 못 지킬 뻔한 그 일 말이야.”

“윽.”

“너무하십니다….”

내가 아픈 구석을 찌르자 그제야 기사들이 잠잠해졌다.

어제 루시페우스가 아니었다면 내가 다쳤을 게 뻔한 상황이었던지라, 다들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거였다.

‘나라고 이렇게 야비하게 굴고 싶진 않았단 말이야…!’

상황만 조금 달랐다면 루시페우스가 나를 구한 것을 갖고도 한참을 말을 지어냈을 이들이지만….

순식간에 진지해진 분위기 속에, 케인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우선… 공용 마차 보관소 바로 옆이 알비누스 상단의 건물이었습니다.”

케인이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말소리에 회의실을 둘러싼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나를 놀려 먹느라 낄낄대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문헌에 따르면 동물들이 마기에 인간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한다지요. 어제 말들이 날뛰었다는 그 상황처럼요.”

알렉스가 숙연하게 덧붙였다.

‘알비누스 상단과 마기라.’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마르탱. 알비누스 상단 측과 오늘 만나기로 했다고?”

“네, 에스메르 상단이 아무래도 황성에 갓 들어왔다 보니 꼬리를 자르기가 쉽다고 판단하는지, 여기를 이용하고 싶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좋아.”

나는 퍽 잘 맞아떨어진 상황이 흡족하여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비누스 상단에서 보관 중인 물품 때문에 어제 일이 일어난 모양이네.”

“그렇다면 그게 마기에….”

“응. 아마 에스메르 상단을 통해 시장에 풀려는 상품이 마기에 잠식된 무언가인 모양이지.”

나는 정확히 그것이 마기에 오염된 베라초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내가 진짜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맞히면 안 되지.’

여러모로 일리가 있는 가정에, 암조 기사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물건의 위치를 확인해. 마기에 오염된 거라면, 그게 시장에 나오기 전에 다 처리해야 해.”

그렇지 않다면 그게 전염병 취급을 받는 바람에, 얼마간 황실과 원로원이 구휼 사업을 펼치느라 골치 아파질 테니까.

‘황실 지지율을 위해서도, 레오가 쓸데없이 차출돼서 아멜리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꼭 막아야 하는 일이야.’

며칠 동안, 루시페우스는 그날 밤의 일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그 작은 빛을 처음 본 것은 12년 전, 한 꼬마 아가씨가 쓰러져 있던 빨간 눈의 아이를 보살펴 주었을 때였습니다.」

고심 끝에 만든 문장을 보내고서, 루시페우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작은 빛의 답을 기다렸다.

한동안 세실리아는 말이 없었다.

역시 좀 소름 끼치나….

조금 전까지 연락하던 이가 잠들었을 리는 없으니, 분명 놀라서 말을 고르는 중이실 터인데. 그 짤막한 시간이 어찌도 길게 느껴지던지.

“…그래서 경이 아카데미에서 맨눈을 보여준 거였구나.”

순순히 납득하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루시페우스는 퍽 안심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가 무언가에 초조해하고, 또 미움받지 않았음에 안심하는 것을 깨닫고는….

‘감정에 휘둘린다라…. 정말 다, 그녀와 관련해서만 일어나는 일이야.’

엉망이었던 지난 생에도,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가는 이번 생에도.

그에게 모든 예외가 있다면… 그녀뿐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에서 만난 것 같다고까지 말하면…. 정말로 소름 끼친다고 하시겠지.’

절대로 고백할 수 없는 제 음험한 망상을 숨기며, 루시페우스는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걸었다.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자정에 가까운 시각인데. 어째서 어제의 밤이 더 밝았던 것으로 기억되는지.

‘그녀와 닿아 있었어서…겠지.’

그 미소가 달빛을 따라 흘렀다.

루시페우스는 황성 상공에 기척을 숨긴 채 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탓에 본연의 색을 드러낸 눈동자가 향한 곳은, 저잣거리에 자리한 알비누스 상단 건물.

‘내 짐작이 맞는다면, 분명….’

어제 세실리아가 마차로 돌아갈 때, 알비누스 상단에 용건이 있다며 동행을 청한 것은 정말 핑계가 아니었다.

그 용건이 알비누스 상단과 약속된 것이었느냐면, 그건 아니었지만….

“작은 도련님 오셨습니까? 어쩐 일로….”

“지금부터 에스메르 상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한다.”

상단 사무실에 들어선 루시페우스는 다짜고짜, 상단주 대리의 이마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음산한 목소리가 일종의 주문처럼 울렸다.

“에스메르 상단은 메르제령 거점의 상단으로… 올해 처음 황성에 들어온지라 베라초 유통에 이용하기 좋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수임료로 100골드를 제안했더니 흥미를 보여… 내일 만나기로….”

내일이라.

상단주 대리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들은 루시페우스는 그의 기억에서 제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지운 뒤,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에스메르 상단과 만난 게 오늘. 그러면 오늘일까? 내일일까?’

며칠 뒤에는 에스메르 상단이 건 마르크 백작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날이니 그전에 움직이려 하겠지.

그녀의 무해하고도 앙증맞은 손끝에 후작의 수많은 음모가 망쳐지고 있었다.

‘지금 후작에게야 작은 실패들이겠지만.’

이어질 미래를 아는 그에게는, 그 실패들이 모여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을지 선연했다.

그것이 그의 계획과는 꽤 달라지고 있었지만….

‘후작이 몰락할 수만 있다면, 아무려면 좋을 일이야.’

그것이 그녀의 손에 의해서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였다.

‘기쁘게, 죽을 수 있겠지.’

루시페우스의 입가에 다시금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때마침 알비누스 상단 건물에서 치솟은 불길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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