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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87화 (87/220)

87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3)

‘저잣거리에서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즐겁게 만나고 있는 것도 확인하고, 렌틸 자작과 스칼렛도 상봉하게 하고.’

아, 오늘 정말 일 많이 했다!

나는 뿌듯해져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내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시녀들이 잠자리를 봐주고 나간 뒤의 내 침소. 나 혼자만의 시간이니 누가 볼까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슬슬 게이블스 후계 싸움이랑 돌아올 수 없는 바다 일 쪽에 집중해야겠어. 두 사람은 순조롭게 사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물론 아멜리가 마음 놓고 레오폴트와 연애할 수 있도록, 둘 사이에 닥칠 자잘한 고난들도 주시해야겠지만.

어쨌든 슬슬 일의 중요도를 조절해도 될 듯했다.

‘로즈버리령의 폐광을 폭파하기 위해 인부들을 보낸다고 했지….’

그러니까, 알비누스가 관여한 인력 사무소에서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오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를 가뿐히 안아 든 그의 단단한 팔, 나도 모르게 껴안는 바람에 가까워지고 말았던 얼굴….

‘꺅!’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내게 달려들던 말들, 원작 생각에 붙박여서 꼴사납게 도망치지도 못하던 나, 그리고 얼어붙은 시공간.

나와 루시페우스 단 두 사람만 움직이던 영원과도 같던 찰나, 아찔한 상공, 내가 그의 목을 끌어안자 훅 끼치던….

‘으아아아, 안 돼, 생각 금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난 거다. 생각하면 안 돼.

나는 전생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음 근육에 단단히 힘을 주기로 했다.

깊이 심호흡을 하며, 사악한 두근거림으로부터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두근, 두근, 두근.

그 모든 게 무용하게도 간질거려 오는 심장 끝. 그건 사실 그에게 안겨 있을 때부터 내내 그랬다.

이 감정이 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정말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맡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이라니….

‘…하아.’

나는 무릎을 끌어당겨,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냐. 절대 아니야.’

그래, 그건 찰나의 착각일 거였다.

착각이어야만 했다.

‘고소 공포랑 헷갈린 거야. 죽을 뻔한 위기에서 심장이 막 뛰니까, 그걸 헷갈린 거고.’

나는 마치 어린 시절 레오폴트에게 종소리 세뇌를 했듯이, 내가 느꼈던 두근거림을 다른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애써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바쁘게 굴리면서.

‘왜 거기서 나를 구했을까? 아멜리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썩 다른 생각은 되지 못했지만.

‘내가 더 가까이 있어서? 아냐. 마법을 쓰면 멀고 가깝고는 상관없는데…. 아무리 세실이 예쁘고 아무리 세실이랑 더 오래 알았다고 해도 그렇지.’

저잣거리에서 함께 다니는 내내 그가 취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그러고 보면 기묘했다.

어른이 된 뒤로 늘 그랬듯, 내게 먼저 다가오는 듯한 행동들….

‘아멜리 좋아한다고 해놓고서. 레오폴트더러 연적이라면서.’

그러니까 아멜리도 있는데, 왜 나를.

‘왜 나를 구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어….’

「신경 쓰이는 느낌이 있어서 시선을 옮기면, 늘 그 레이디가 있었다. 그렇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언제나 꿋꿋했고, 어느 상황에도 곧았고, 늘 밝았다.

‘도대체 왜, 무엇이 어느 상황에서도 당신을 부러지지 않게 만드는지….’

그렇게 그녀가 마음에 들어왔다.」

‘…그렇게 좋아하게 됐다고 했지.’

유순해 보이지만 강직하고, 해맑아 보이지만 사리 분별을 잘하는 이 세계의 여주인공.

아멜리를 좋아하면서 세실리아에게 관심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멜리가 오후의 햇빛 같다면 세실리아는 새벽의 달빛이고, 아멜리가 해바라기라면 세실리아는 은방울꽃이랄까?

‘그렇게나 다른데.’

나는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레오폴트가 구할 거라 믿어서 나를 구했나 싶다가도, 잘 보일 기회를 연적에게 양보하는 것도 이상하고….

‘루시페우스가 아직 아멜리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면 내가 황녀여서?’

그래, 그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이가 나였고, 내가 피해를 입으면 안 되니까….

‘내가 다쳤다면 암조 기사들도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 테고 말이야.’

좋게 생각하기로 하니,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그래. 고민해서 뭐 해? 아멜리한테 관심 덜 가지면 좋은 거지.’

애초에 그게 내 목표였으니까. 레오폴트랑 아멜리가 이미 사랑하고 있으니, 훼방만 안 놓으면 된다.

‘이제 해피 엔딩까지 얼마 안 남았다고….’

그리 생각하며 나는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그래, 두 사람이 이뤄지는 거에만 집중하는 거야. 그 정도면 족해.’

관객의 자세, 관객의 자세…. 오래전부터 되뇌었던 그 마음가짐을 읊조리자니, 조금….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전생에서도 내 마음은 늘, 어디에도 가닿지 못했었는데. 부모님에게도, 애인들에게도….’

달빛이 어룽거리는 내 침대의 캐노피가, 전생의 마지막에 보았던 한강의 밤물결처럼 보였다. 쐐액, 쐑. 자동차 스치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세실리아가 되고서 처음 설렌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을….’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어차피 내 마음은 보답받지 못하는 건데, 새삼스럽게.

‘황실 가족의 사랑만으로도 과분한데.’

나는 저 멀리 뻗어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저미던 심장이 손끝에서 두근거렸다.

‘그런 건, 곧 다 사라질 것들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쉽게 변하는 거니까.

그때였다.

화악, 협탁 위에 올려둔 손거울에서 빛이 났다.

전처럼 서랍 안에 넣어놓은 게 아니라, 그 위에 꺼내 놓은 손거울에서.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연락을.

‘망했어.’

순간적으로 인 반가운 마음이 너무도 거셌다. 나는 씁쓸한 한숨을 삼키며 침대를 한 바퀴 굴러,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며칠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느라 익숙해진 감촉이 손에 들어왔다.

달칵, 손거울을 열자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그의 손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아까는 많이 놀라셨지요.」

그의 말소리처럼 불친절하리만치 군더더기 없는 메시지.

짤막한 말을 내뱉은 뒤 내 낯을 빤히 쳐다보는,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하고도 무기질적인 낯이 떠오르는 듯했다.

“이렇게 열면 작동한다는 거지?”

「네. 계신 곳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만 전달되게 해두었으니 그 또한 안심하시고요.」

여느 때보다 빡빡한 글자들의 나열에… 나는 그가 지금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까도 말 엄청 빨랐지.’

손거울로 위치를 추적한 것처럼 말하기에 음습하다고 했더니, 재빠르게 변명하던 그의 말소리.

그것이 조금 귀여웠던 것도 같아, 나는 쿡쿡 웃었다.

그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껏 숨죽여서.

내 마음을 숨기듯이.

“내 기사들이 경에게 빚졌대. 그거 다 돈으로 받으면 경, 부자 되겠어.”

「언젠가 꼭 돌려받을 날이 오면 좋겠군요.」

…언젠가? 의도가 있는 말일까?

‘나와 적대해야 하는 그가 하는 말이니, 예전 같았으면 섬뜩하게 느꼈을 텐데.’

귀족파의 음모를 책임지는 흑막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지 간담이 서늘해야 하는 일인데.

그가 말하는 ‘언젠가’라는 것이 속절없이 기다려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차피 보답받지 못할 마음인데.

혼자 좋아하다 말아야 하는데.

‘진짜 정신 단단히 차려야겠어.’

나는 작게 고개를 털어내고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내 빚은, 언제쯤 다 갚을 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유무형으로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고 있어서요.」

“하긴, 솜사탕에 파인애플주스에…. 현금은 먼저 갚을게.”

「제가 동화 몇 개가 아쉽겠습니까.」

“그럼 나는, 동화 몇 개가 없어서 그걸 빚진 게 되는 건데.”

나는 툴툴거리듯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화 몇 개짜리 군것질거리값을 갚는 것도, 우리 사이에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 핫.

‘우, 우리 사이라니?’

그러니까, 일국의 황녀와 부유한 귀족가 자제 사이. 뭐 그런 의미지.

나는 누구에게랄지 모를 변명을 하다가, 화제도 전환할 겸 내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아까는 고마웠어.”

루시페우스가 나를 그 아수라장에서 구출해낸 이후부터 입에서 우물대고 있던 말이었다.

‘그래.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서 연락을 기다린 거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서 빠져나간 뒤. 그림자로 수행 중이던 기사들 중 최면을 걸 수 있는 이들이 은신을 풀고서 말들을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뒤늦게 나타난 경비대가 합류하여 현장을 정리할 때.

그제야 나는 루시페우스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뭐… 꺄악!”

그의 목에 감았던 팔을 얼결에 풀자 순간적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그의 단단한 품이 그리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직 위험합니다.”

그는 나를 보호하듯이 안아 든 채 아래쪽의 사정을 살폈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지키겠다는 듯 꾹 힘을 준 그의 양손, 어딘가 완고한 그의 낯, 그리고 내 심장과 엇박자로 울리는 그의 심장 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나는 부담스러워, 기사들이 얼른 주변을 정리하길 기다리며 아래만 내려다보다가….

“다 정리됐나 봐! 나 이만 가봐야 해, 약속에 늦어서 말이야.”

그리 말하고는 후다닥, 그가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그대로 케인에게로 달려간 것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새빨개진 낯을 들킬 것만 같아서.

터질 것처럼 두근대는 심장 소리를 들킬 것 같아서.

그래서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했다가, 이제야 간신히 전하는 것이었다.

‘내가 고맙다고 할 줄 몰랐던 걸까?’

손거울에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마워서 고맙다고 한 건데, 뭐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너무 늦게 말했나. 아까 도망쳐버린 게 뻔뻔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역시, 부담스럽나….

내가 그의 의중을 짐작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였다.

「오늘의 빚은 이렇게 갚으면 어떠실까요.」

“어떻게?”

그간 그가 내게 빚을 갚으라며 요구했던 것은 손잡아 보기, 뭐 그런 정도였는데.

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한참 뒤에 손거울에 떠오른 메시지는….

「제게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부디, 무엇이라도 하문을.」

얘는 왜 이렇게 질문받는 데 집착해?

나는 작게 헛웃음 지으며 물었다.

“확인한다던 건, 끝난 거고?”

「그건 나름으로 진행 중입니다. 그게 궁금하신가요?」

“아니, 그냥….”

도대체 뭘 확인한다는 건진 모르지만.

거기에 생각이 닿자, 내 손을 잡아 오던 그의 조심스러운 손짓이, 또 내 손에 들린 것들을 베어 물던 그의 낯이 떠올랐다.

‘악. 얼굴 또 빨개졌겠어.’

그가 손거울을 통해 이쪽을 볼 수는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수줍은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른 화젯거리를 떠올렸다.

“음음, 그렇다면.”

내가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질문이 뭐가 있을까. 나는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경은 내가 변장한 걸 늘 알아보잖아. 경에게는 내가 어떻게 보여?”

오. 급조한 것치고 꽤 좋은 질문이었다.

변장한 모습으로 보이는지, 본모습으로 보이는지. 그에겐 세실리아의 얼굴이 먹히는지, 안 먹히는지.

혹시 내가 신성력이 없는 걸 알아볼 수 있는지, 없는지.

많은 것을 담은 질문이었다.

「늘 그 초커를 하고 다니시더군요.」

“초커?”

떠오른 메시지를 본 나는 덥석, 잘 때도 끼고 자는 레베카의 초커를 꼭 쥐었다.

‘역시, 내가 신성력이 없는 걸 알고는 있는 건가…!’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시는 것 같았다.

그가 내 손끝을 감지할 때마다 느껴지던 그 찌릿한 기운이, 내 체질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러니까, 내 정보를 캐내는 중이었던 거야?’

몇 가지 호의를 입었다고 설레고 말았다니…. 나는 작게 자책하면서 변명하듯 덧붙였다.

“으응, 레베카 언니가 만들어준 토템 같은 거야.”

급조한 이야기였지만, 적당히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물론 내가 신성력이 없다는 걸 그가 안대도….

“전하께서 제 커다란 약점을 틀어쥐신 바람에 저는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는데.”

그게 진심이라면,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핫, 안 돼! 긍정적으로 짜 맞추기 금지!’

그는 번번이 나를 구했고, 번번이 내게 호의를 베풀지만, 기본적으로 경계해야 할 인물이니까.

그때,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먼저 하문하신 데 답을 하자면.」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제게도 변장하신 모습으로 보이지만, 원래 얼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얼굴로 알아본 게 아니라….”

「그 초커에 깃든 것이 3황녀 전하의 사랑일까요. 그게 제게는 작은 빛처럼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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