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2)
렌틸 자작과 스칼렛.
나의 스승, 그리고 내가 몰래 키우고 있는 장기 말.
두 사람의 숙원을 이뤄, 내 언니의 치세에서 활동할 귀족파의 우두머리를 보다 합당한 사람으로 바꾸는 일.
그 판을 드디어 원작의 무대에 맞춰 올리게 되었다.
귀족파가 꾸밀 음모들을 처리함으로써 나의 가족에게 보답하려는 정교한 장기판에, 새로운 싸움이 추가되는 거였다.
‘윌로우 놈이 밑바닥 보일 사건이 많을 예정이었으니, 여러모로 올해가 적기였어.’
예측하지 못한 이유로 그가 진즉에 무대에서 밀려나고 말았지만….
“내 스승께서 엉덩이가 무거우셔서 여기까지 오시는 데 너무도 오래 걸렸지.”
“늙은이의 노파심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그리 말하기엔 다소 젊은 40대 후반의 렌틸 자작이 싱긋 웃었다. 그녀와 마주 웃고서, 나는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눈짓했다.
“저자는.”
오늘의 회동은 극비라 외부인에게 노출되면 안 되는 일인데.
내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알아차린 스칼렛의 입매에 미소가 깃들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제 호위 기사입니다.”
“아하.”
나는 눈썹을 작게 들어 올렸다.
스칼렛을 밖에서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어서, 그녀의 호위 기사를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키가 훤칠한 짧은 갈색 머리의 미남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스칼렛의 눈빛이 자못 따뜻하여, 그들의 관계가 단순한 주종 관계 이상임을 알 수 있었다.
‘레오폴트를 보는 눈빛하곤 달라도 한참 다르네.’
이게 진짜라는 거겠지.
나는 스칼렛에게 게이블스 안에서 마음 붙일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가족 안에서 자란다면 집에서조차 외로울 수밖에 없으니까….
‘사교계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따른대도 집에서 외로우면 다 허사고 말이야.’
엘런의 보고에 의하면 사용인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깊이가 다를 거였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서 외로웠던 걸 스칼렛에게 겹쳐 보나 봐.’
그때, 렌틸 자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고생은요….”
“나는 버티다 못해 게이블스에서 도망치고 말았잖니?”
“저야 갈 데가 없으니까요…. 고모님처럼 뛰어난 구석도 없고.”
스칼렛의 한껏 양순하고도 겸손한 태도에 나는 자못 놀랐다.
‘이게 스칼렛의 진짜 모습인가 보지?’
사교계의 권력자다운 것도 고위 귀족가의 영애다운 것도 아닌, 조금도 억지로 꾸미지 않은 스칼렛의 본모습.
‘내게 보여주는 모습도 나름 진실된 모습이겠지만….’
제 아비가 심성이 약하다고 폄하한 탓에 겹겹이 보호막을 둘렀어야 할 스칼렛의 다정한 마음.
내게 마음을 많이 열었으면서도 드러내지 못한 그녀의 가장 여린 마음.
스칼렛에 대한 친근감이 한결 깊어진 것 같았다.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내 아무리 학자의 탑에 있다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내게서 들은 것을 말하는 거지요?”
“제게도 나름의 정보통이 있답니다? 전하께서 귀띔해주시는 것도 유용하긴 하지만요.”
나와 렌틸 자작이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스칼렛의 표정이 묘했다.
제가 같은 처지의 고모를 그리워한 세월 동안, 나와 렌틸 자작이 사제의 정을 쌓았음을 부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봐야 두 사람은 혈육이고, 또 한편으로 두 사람은….
‘진짜 닮았다.’
채도만 다른 주황빛 머리칼에 호박색 눈동자. 따로 놓고 볼 땐 몰랐는데, 나란히 놓고 보니 인상도 꽤 닮았고….
‘그래서 게이블스 후작이 스칼렛을 더 싫어했는지도.’
스칼렛의 낯이 조금 가라앉은 걸 눈치챘는지, 렌틸 자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바보같이 후계자 공부만 꾸역꾸역했는데, 너는 나보다 훨씬 영리하게 처신하고 있잖니.”
“영리하다뇨, 제가 무슨.”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이치고 스칼렛 게이블스를 경외하지 않는 이가 없더구나.”
“그야….”
렌틸 자작의 말을 듣는 스칼렛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 스칼렛이 수줍어도 한다니, 누가 알겠어?’
오늘만 몇 번짼지, 그녀의 여태 몰랐던 면모를 자꾸만 발견하게 되어 흥미진진했다.
“잘한 일이야. 로버트 그놈이 얼마나 체면을 중요시하는데. 게다가 네가 제 뜻대로 움직인다고 착각도 했을 것이고.”
렌틸 자작의 판단에 틀림이 없는지, 스칼렛은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자작이 게이블스 영애 시절에 했던 것과 딱 정반대였나 보죠?”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고, 정말 원하는 게 있으면 넘어가 주는 척이라도 해야 했는데 말이에요. 저는 너무 뻣뻣했지요.”
“선대 후작도 꽤 보는 눈이 없었나 봐.”
“…로버트 녀석이 뭐, 누구만큼 멍청하진 않았으니까요.”
“풋.”
렌틸 자작의 말에 스칼렛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작이 언급한 ‘누구’가 제 오라비임이 자명해서이리라.
‘스칼렛이 소리 내어 웃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고 말이야.’
오래간 만나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고모와 함께여서인지, 꽤 마음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게이블스 남자들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졌다.
“로버트는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곧잘 괜찮은 성적도 받곤 했었는데, 그 아들내미는.”
다시금 윌로우를 언급하는 말소리에 나는 웃음을 머금었다.
“매해 수석을 차지해서 후계자의 열등감을 자극한 누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자작?”
“저라서 할 수 있는 말이죠. 스칼렛, 너는 그 와중에도 수석을 차지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며?”
“아뇨, 그건 그냥 다 제가….”
“보넨 자작이 그 정도 눈치는 있단다.”
그리 말하며 렌틸 자작이 눈을 찡긋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작게 놀랐다.
‘이건 나도 몰랐는데.’
스칼렛의 아카데미 성적이야 엘런의 조사로 알고 있던 거였지만, 아카데미 학장을 지낸 보넨 자작의 개인적인 생각이야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말했다.
“영애가 그럼 일부러 수석을 놓친 거야?”
“늘 80점짜리 답안만 내더래요. 제 기량만큼 점수를 내지 못하니까, 시험 공포증이 있나 싶었다고도 하고.”
“…학장님께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스칼렛의 낯에 다시금 수줍음이 깃들었다.
나는 눈매를 둥글게 휘며 말했다.
“어머어, 영애의 그 연기가 아카데미에서 다져진 연기인 줄은 몰랐어?”
“…전하!”
‘연기’라는 말을 강조하며 놀리는 말에 스칼렛이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문가에 서 있는 기사 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도 같았다.
스칼렛은 몇 년 동안 레오폴트 연모하는 콘셉트를 알차게 써먹었으면서도, 그걸 언급하면 이렇게 수치스러워하는 것이었다.
‘레오폴트가 어지간히도 취향이 아니었나 보지. 하긴, 저 기사를 보면….’
남성미 풀풀 풍기는 다부진 인상.
나는 문가에 서 있는 스칼렛의 호위 기사를 보며 미소를 삼켰다.
‘늘 바보처럼 웃고 다니는 레오랑은 완전 반대지…. 스칼렛처럼 꿈이 큰 여자에게는 저렇게 과묵하고 순종적인 남자가 딱이야.’
나는 내 소꿉친구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내리며 스칼렛의 안목을 칭찬했다.
‘과묵하고 순종적인, 그러니까…. 핫.’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나는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 저잣거리에서 갑작스레 날뛰던 말들로부터 나를 구해준 그 남자….
“빚이 자꾸 늘어나고 있군요, 레이디 작은 별.”
아악, 위험, 위험!
그때의 일을 돌이키니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했다. 왜 이래, 안 돼….
“전하의 큰 뜻이 마음이 들었지 뭐니.”
내가 생각에 빠져 잠깐 놓치고 만 렌틸 자작의 말과 함께, 두 쌍의 호박색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그, 그래. 여기의 일에 집중해야지.
나는 수런거리는 마음을 얼렁뚱땅 정리하고는 두 여성과 한 번씩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큰 뜻이라면, 어떤….”
스칼렛이 퍽 진지한 눈초리가 되었다.
“너처럼 능력 있는 젊은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거나.”
그 말을 들은 스칼렛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아, 나는 자백하듯 말했다.
“…영애의 오라비에 대한 사적 복수심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런 동기가 나쁠 것도 없답니다. 큰 뜻이 모두 순수한 마음에서만 나오려고요?”
“자작이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네요. 듣기 좋은 소리를 다 해주고.”
“제가 전하께 듣기 싫은 소리 한 적이 있나요? 제가 탑에서 제자들 대하는 거 보시면 충격받으시겠어요.”
“내가 은사를 졌는데 자작이 어찌 그러겠어요?”
나와 자작의 대화를 듣던 스칼렛이 쿡쿡 웃었다. 그것이 그녀가 늘상 짓는 그림 같은 미소와 달리 퍽 자연스러웠다.
제 고모 앞이라서 마음껏 비칠 수 있을 스칼렛의 천진한 미소.
렌틸 자작은 푸근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4황녀 전하께서 만드시려는 새 부대가 내게 참 흥미로워 보이더구나.”
“황제 폐하께서도 10년쯤 뒤면 황태자 전하께 선위하실 테니까요.”
스칼렛의 대꾸에 렌틸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유스티안 전하보다 헤르미아나 전하의 신성력이 더 강대하다고 하시니, 아수라마수라 역사 최초로 2대 연속 여성이 황위를 차지하는 시대가 올 게야.”
렌틸 자작이 마치 엄숙한 선언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그걸 듣는 스칼렛의 낯에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어쩌면 들뜬 듯도 했다.
“그 새로운 시대를 위해 4황녀 전하께서 흥미로운 일들을 벌이실 거라는 거죠?”
“그래. 번거롭게도 게이블스의 후계 싸움에 손을 대시면서까지 말이지.”
“그렇게 됐으니까, 영애. 나중에 가주 되고서 월권이라고 문제 삼지만 말아줘?”
렌틸 자작의 말에, 나는 능청스레 덧붙였다. 작게 웃는 스칼렛의 입매가 비대칭적인 호선을 이뤘다. ‘가주’라는 말 때문인지 귀 끝에 은은한 홍조가 깃들기도 했다.
“빨간 눈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계시고.”
“어머.”
“혼외자 출신의 인재들을 중용하시는 것도 실은 그런 맥락이란다.”
“그렇죠. 레이디 헨리에테나….”
렌틸 자작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스칼렛이, 갑작스레 음흉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혼외자라면.”
“응?”
“…알비누스 후작가에도 혼외자가 한 분 계신데.”
스칼렛의 느물거리는 말소리에, 나는 황당하다는 낯을 지었다.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튀어?”
시치미 뗀 낯과 별개로 속절없이 떠오르고 만 얼굴이 있었고.
‘나, 나대지 마, 심장아….’
간신히 다독여 두었던 심장이 다시금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기 시작했다.
오늘도 달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알비누스 후작저의 끝방 발코니.
낮에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루시페우스는 제 양팔을 천천히 들어보았다.
그녀의 조붓한 등이 담겼던 오른팔, 그녀의 오금을 받쳐 들었던 왼팔.
그 간격만큼 제 작은 빛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꺅! 노, 높아….”
반사적으로 제 목을 감던 그 미력하기 그지없는 가느다란 팔까지.
루시페우스는 한 사람의 감촉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타인의 감촉이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저를 잠시간 맡았던 어머니의 옛 동료들도, 어린 그를 돌보던 사용인들도, 하물며 저를 못 괴롭혀 안달이던 알비누스들까지.
그와 접촉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거대한 신성력과,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처에서 잉태된 탓에 그에게 깃든 거대한 마력.
그의 체내에는 상보적인 두 자질이 뒤엉켜 늘 끓어 넘치기 직전처럼 부글대었다.
그 혼자서야 추스를 수 있으니 괜찮았지만,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타인의 것과 닿으면 서로에게 고통을 안겼다.
‘아까 아우렌바흐 소공작도, 신성력이 크니 놀랐겠지.’
저와 악수를 했을 때 당황한 듯 굳어지던 그의 잘난 낯짝.
그런 체질 덕분에 알비누스 부자에게 물리적으로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평생 그 이상으로 외로웠다.
타인의 온기라는 건, 그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대상.
억지로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되는, 마음 놓고 가닿을 수 있는 이.
첫 번째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두 번째 삶을 떠안고야 만 그에게 주어진 여흥과도 같은 존재.
제 품에 안겼던 제 작은 빛, 레이디 작은 별, 세실리아.
그녀의 무게와 감촉과 눈빛, 그 모든 것을 생각하다가… 그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다시금 사로잡혔다.
어떻게든 가닿고 싶다는 감정.
그러니까,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