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달밤, 발코니에 숨어든 손님 (1)
“너는 지금부터 여기서 들은 것은 잊는다.”
루시페우스의 손이 남성의 이마에서 조금 떨어진 채 빛을 발했다.
우웅, 작은 공명음이 공간을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무엇엔가 홀린 듯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갔다.
후우, 루시페우스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법을 멀거니 바라보던 율리안 겔프가 구시렁거렸다.
“또 허탕이네. 소문을 너무 많이 냈나?”
“덕분에 요령 좋은 기술자들은 많이 구했으니, 뭐.”
로즈버리령 폐광 폭파 작전에 적합한 인부를 선별하고, 비밀 유지 서약 마법을 건다.
자질이 적합하지 않다면 이 작업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잊게 한다. 면접을 보러 온 것은커녕 그런 소문을 들었다는 사실까지.
정신계 마법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마법이었다. 제아무리 숨 쉬듯 마법을 쓰는 루시페우스여도 정신계 마법은 조심스러웠다.
마탑에서 수백 년간 연구한 정밀한 마법진 대신, 그가 제멋대로 개발한 투박한 술식에 마력을 다량으로 투입하는 만큼 더 조심해야만 했다.
자칫하면 사람을 백치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후작은 그런 인간들쯤 어떠냐고 말하겠지만….’
피로한 듯, 루시페우스가 목과 손목을 까닥일 때였다.
‘이건…?’
뇌리에 스치는 감각이 있었다. 그 손거울에 걸어둔 마력이 멀리서 공명했다.
‘이런 데 오셨다고?’
그가 세실리아에게 건넨 손거울에 부여한 마법은 두 가지.
일정 거리 이내로 가까워지면 저와 공명하여 위치를 알게 하는 것. 그리고 손거울이 열리면 제가 그편의 소리를 인식하고 글자로 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는 그저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
제가 유일하게 가닿을 수 있는 이, 제 저주스러운 눈동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이.
그리고, ‘그때’엔 없었던 이.
그의 유일한 변수.
작은 빛, 세실리아.
루시페우스는 손을 꼭 말아쥐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네.”
루시페우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출구로 향했다.
“지금?”
“갑자기 생각난 일이 있어서.”
“아니, 지금 기다리는 자들 있는데?”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저기, 자네? 어이!”
율리안의 황당해하는 외침을 뒤로 한 채, 루시페우스는 어느새 계단참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아침에 입고 나온 재킷을 놓고 나왔다는 것은, 야외의 햇살을 받으면서야 깨달았다.
초여름의 적당한 신록, 저잣거리를 메운 인파, 들뜬 사람들의 흥성거림, 한낮의 햇살.
그리고 모든 것을 배경으로… 그녀가 있었다.
그와 마주칠 때면 늘 그렇듯, 능청스럽게도 허울뿐인 변장을 한 채로.
그 모습이 반갑다는 생각도 잠시.
“그럼 이거 설마.”
“지갑이 없으신 듯하여.”
바란 적 없는 도움을 건네는 스스로의 모습에 루시페우스는 낯섦마저 느꼈다.
그것이 퍽 어색한 일이라는 것은, 의아해하는 그녀의 시선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고로 맛있는 거 사주는 남자가 진국이라우.”
상인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웃어 보이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천진난만하게 울렸다.
‘한낱 상인인데, 어째서 저자에게는 웃어주시고.’
제 마음에 밴 저릿함이 서운함이라는 사실도 몰라, 그는 그렇게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정말로 그녀 곁에서뿐이었으니까.
“레이디에게 선물로 주는 것치곤 음습한 취미 아냐?”
“아, 그게….”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것 또한, 그녀뿐이었다.
그는 애초에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기대도 감정도 갖지 않았으므로….
“한입 먹어 볼래?”
“예?”
“여기.”
그녀가 손에 들었던 것을 나눠줄 때 느낀 감정은, 그래서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아함? 의심스러움? 당혹감?
그는 한동안 그녀가 제게 내민 것을 홀린 듯이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무언가를 나누었다는 것부터….
“다네요.”
“응?”
“달아요.”
그래, 그 감정을 굳이 분류하자면 달콤함에 가까웠다.
그가 달콤하다 분류할 감정을 겪을 일은 그의 삶에 없었으니 자신은 없지만….
‘누군가와 먹을 것을 나누는 일도, 처음인 것도 같고.’
그 생경한 감각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저도 모르게 동행을 청했을 거였다.
사람 많은 곳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의 얄궂은 체질 덕에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어, 옷가지로 몸을 꽁꽁 감싼 데다 또 조심하기까지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가까이 있을 수 있어, 초여름의 더위에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 숨통이 트이는 기분.
참 이상했다.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 연약한 존재인데, 그는 절대로 그녀를 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만 사람답게 굴 수 있어서.
그림자가 아닌, 사람.
사람다운 게 무엇인지 역시,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배울 기회는 없었지만….
“이 악마 놈아!”
알비누스 부자의 악담 속에 망가져가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비록 그런 체질이어도, 비록 빨간 눈을 갖고 있어도 다른 누구와 다를 바 없다는….
“거기에, 제 가문이 투자한 인력 사무소가 하나 있습니다.”
후작이 벌이는 음모에 대해 털어놓은 것은, 그런 그녀의 가녀린 손끝에 많은 걸 걸고 싶어져서였다.
후작에게 복수하는 것. 그것이 그가 정한 이번 생의 목표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니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은 어떤 의미로든 즐거울 수밖에.
“경 혹시, 저기서 잠깐 발 좀 쉬었다 갈래?”
제게 한 번도 보여주시지 않던 웃으시는 낯을, 얄밉게도 의뭉스러운 속내를 감추고서야 보여주시는 것도 즐거웠고.
“경이 상단 일을 안 해봐서 잘 모르나 봐. 원래 연락이 늦어지면, 상대방이 거래 의사가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
새초롬히 말씀하시면서도 어딘가 미련 뚝뚝 떨어뜨리는 그 모순됨조차 즐거웠고.
“…기다리셨군요.”
“아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만 연기하시다가도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심이 또 즐거웠다.
그러니까, 즐거웠다.
그녀와 얽혀서 겪는 모든 것들이, 즐거웠다.
‘…이렇게 즐거운 것들이 많아지면 안 되는데.’
자꾸만, 미련이 많아지면 안 되는데.
후작에게 복수하고, 괴로움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 그것이 그가 결정한 제 운명이었는데.
그 곤란함마저 즐겁다는 지경에 이른 그 순간.
문득 던진 시선의 끝에, 오랜 세월 거슬려온 인영이 들어왔다.
“…소공작과 만나시기로 하신 거였습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물음인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묻고야 말았다.
“내가? 레오랑 만나기로 했냐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그녀의 어린 시절을 함께하는 행운까지 얻은 그가, 그리 짤막하고도 친근한 호칭으로 불리는 호사까지 누리는 걸 곱씹을 때면… 그는 다시금, 태생부터 어긋난 제 존재에 절망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락과도 같은 절망이 빚어내는 열패감. 제가 어떤 행운을 누리는지도 모르는 저 천진한 자에 대해 드는 적개심.
그를 적대한 세월은 길고 길었지만, 그 감정이 이토록 구체적인 모양을 띤 것은… 이번에야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황실파의 수장인 아우렌바흐의 후계자.
이번에도 번번이 그의 계획에 끼어들고 마는 그 레이디의 연인.
후작에게 배신당할 줄도 모르고 충실히 명을 따르던 제 눈먼 길을 방해하던 자.
그런 그를 ‘밉다’라고 생각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런데 전하께서는, 소공작과 저 레이디의 관계를 응원해 주시는 것 같군요.”
그리 묻고야 만 것은 일종의 충동에서였다.
작은 빛께서 제게는 이토록 곤란한 감정의 범벅을 선사하실진대, 그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담백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지.
‘그에게는 그 레이디에게 끌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 지워지기라도 한 걸까.’
그때도, 지금도 아우렌바흐 소공작은 어떻게든 그 레이디와 연인이 되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감히.’
이토록 시선을 끌어들이는 이가 곁에 있는데.
아니, 어쩌면 그 또한 세실리아를 대할 때마다 감정의 해일에 속절없이 휩쓸리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의 운명이 있어 번번이 마음을 다잡을 뿐.
‘이 즐거움이 아무리 달아도, 내가 결국 정해진 운명대로 굴러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 그도 저처럼 그녀에게 무참히 끌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이 작은 빛은 하릴없이 저를 끌어당기고 마니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아우렌바흐 소공작은 제 연적인데요.”
거기에 저항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다.
상황은 조금 의아했다. 그녀가 있음에도 아우렌바흐 소공작은 여전히 그 레이디에게 푹 빠져 있었다.
정말로, 일말의 오해할 여지도 없이.
어째서? 그녀인데? 이토록 찬란하고 곤란한 작은 빛인데?
저보다 오랜 시간을 공유하고 저보다 더 가까우면서 어떻게?
‘헛바람 든 사람처럼 늘 웃고 다니는 게, 어딘가 이상한 이인 건 알았지만….’
그것이 의아한 와중에도 다행이다 싶었을 때. 그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 건 정작 다른 쪽이었다.
“나랑 루시페우스 경은 정말로 우연히 만난 것뿐이야.”
조금이라도 곁을 내주신다 싶다가도 선을 그으시는 것은… 그녀다웠다.
그녀다웠지만, 즐겁지 않았다.
그 레이디의 동행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고, 그녀가 주는 군것질거리를 입으로 물어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남몰래 웃는 것을 알아차린 티를 내고….
그 모든 것이 일종의 화풀이였다는 것을, 그는 제 낯을 걱정스레 살피는 그녀의 말간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의 곁을 얻은 일은 퍽 즐거웠다.
친우와 살갑게 대화하실 때의 표정과 말소리를 느낄 수 있었고, 친우를 위해 그 레이디에게도 한없이 다정하게 대하는 너그러운 마음씨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중 무엇 하나 내주지 않는 매정한 분이셨지만,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때 없었던 분께서 저 두 사람의 운명을 잘 아는 듯 구시는 연유도 궁금하지만….’
저부터가 무엇 하나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이상, 거짓말과 능청으로 똘똘 감싼 작은 빛께서도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말해주시는 법 없겠지.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곁에서 지켜보는 것뿐.
그녀가 목소리를 내어줄 때 언제건 화답하는 것뿐.
그리고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구하는 것뿐.
“빚이 자꾸 늘어나고 있군요, 레이디 작은 별.”
그걸 청산하실 일 없도록, 계속 빚을 지워드리리.
저를 찜찜하게나마 기억하실 수 있도록, 더 큰 빚을 지워드리리.
그것 때문에 저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이번 삶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고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스칼렛이에요.”
“그래, 드디어 보는구나. 전하께 이야기 많이 들었다.”
황성 2구역 어스름한 곳에 자리한 나의 안전가옥.
거기서 정말 몇 해를 기다린 감동적인 상봉의 순간이 펼쳐졌다.
제 미모를 채 가리지 못하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스칼렛은, 저와 똑같은 색깔의 눈동자를 지닌 렌틸 자작을 마주한 순간… 잔뜩 허물어진 낯을 하고 말았다.
내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방비한 표정.
“정말, 정말 뵙고 싶었어요, 고모님….”
렌틸 자작이 저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칼렛은 그녀에게로 달려가 손을 맞잡았다. 그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맺혀 있었다.
태생부터 귀족인 그녀가 제 고모의 품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것이리라.
‘게이블스의 영애께서는 살면서 한 번도 뛰어본 적 없겠지만.’
나는 상석에 앉은 채, 감격스러운 상봉의 순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드디어, 이쪽 일도 궤도에 오르게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