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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84화 (84/220)

84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8)

“내가?”

나도 모르는 내 버릇인가? 그런데 어떻게 내 버릇을 알지? 얘랑은 대체로 위장하고서 만났는데…?

‘내 얼굴이 원래 얼굴로 보이나? 마법으로 간파하니까…. 그래, 그러면 그럴 수 있지. 세실리아 얼굴이면 누구나 눈길이 가니까….’

그와 시선이 맞닿은 내내, 내 머릿속엔 수많은 합리화가 스쳐 지나갔다.

그때, 어슴푸레한 호선을 띠고 있던 루시페우스의 입이 열렸다.

“레이디를 눈으로 좇다 보니 알게 된 일입니다. 제게는 보여주시지 않는 모습이니 더 깊이 각인되었나 보지요.”

그리 말을 맺고도, 안경 너머 그의 다갈색 눈동자는 내 낯에서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근원 모를 긴장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줄도 모르고 한참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이동하시는군요.”

그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여 레오폴트와 아멜리를 좇았다.

‘아차.’

순간적으로 여기가 어딘지, 누구와 같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따라가야지. 나는 화끈거리는 낯을 급히 그에게서 떨어뜨리고서, 와플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레오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 왜.

내가 눈빛으로 물었을 때, 레오폴트의 입 모양이 빚어낸 건 분명….

‘종소리.’

어휴, 얘가!

나는 와플이나 똑바로 주문하라고 눈을 부릅뜨고서 거칠게 턱짓했다.

생크림과 캐러멜 드리즐, 초콜릿 시럽, 딸기 절임 등으로 다양하게 토핑된 와플은 기대대로 아멜리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보기만 해도 달다며 혀를 내두르던 레오폴트도 아멜리가 맛있게 먹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자니, 루시페우스가 나직이 물었다.

“이것도 내드릴까요.”

“…괜찮아. 빚 더 지기 싫어.”

사실 세실리아의 혀에는 너무 달기도 했고 말이다.

‘전생에는 엄청 좋아하던 건데.’

쩝,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실 때였다.

“저어, 전하.”

아멜리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소곤거렸다.

“응?”

“감사해요.”

“내가 감사받아야 할 일이 있어?”

“오늘 레오폴트 경이 소개해준 음식들, 다 전하께서 알려주신 거잖아요.”

“하, 하하.”

티가 났나.

레오폴트가 애써 잘난 척해놨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눈치 빠른 아멜리.

“짐작하고는 있었는데, 전하께서 오시고 나니까 확신하게 됐지 뭐예요.”

“뭐어, 나야 레오폴트 경이 물으니까 아는 걸 말해준 것뿐이지. 영애랑 외출한다고 들떠서는.”

나는 부러 과장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하하, 아멜리가 청아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많이 도와주지는 마세요. 살면서 어려운 것 하나쯤은 있어 봐야죠.”

레오폴트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뚝뚝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 장난스러운 말소리에도 아멜리의 속 깊고 올곧은 성미가 녹아 있어서… 나는 그녀의 낯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동글동글한 선한 인상의 얼굴 가운데서 푸른 눈동자가 시원한 여름 바다처럼 빛났다.

사랑받고 자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어본 적이 없는, 아멜리의 맑은 낯.

눈치 빠르고 현실적인 판단을 앞세우지만, 기본적으로 낙천적인 그녀의 성정.

‘성격마저 미인이니 두 남자가 반하기에 충분하지.’

그리 생각하는데 마음이 욱신거리는 건 왜일까?

그때, 루시페우스에게 여전히 뭐라도 살갑게 말을 걸어보려다 실패한 레오폴트가 끼어들었다.

“두 분, 무슨 말을 그리 재밌게 하세요?”

“네 험담.”

“밀리, 다 거짓말이에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오폴트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내가 뭐라고 한 줄 알고?”

“제가 어렸을 때…. 침 흘렸다…?”

…그게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이구나.

이윽고 제가 제 입으로 저의 약점을 까발린 걸 깨달은 레오폴트의 낯이 새빨개졌다.

그러는 내내 루시페우스는 우리들 사이에 녹아들지 못한 채, 의미심장한 낯으로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로 서너 군데의 노점을 더 들렀다. 내 원래 목표였던 크레이프와 문어볼 가게도 함께.

문어가 들어간 빵 위에 짭조름한 소스를 뿌린 문어볼은 다행히 두 신사의 입맛에도 맞았다.

“앗, 뜨뜨뜨…!”

“레오, 천천히 먹어요!”

내내 맛있는 척하느라 지쳤던 듯, 레오폴트는 시위하듯 여러 개를 연달아 먹다가 혀를 데어 고생했다.

야, 너 공작가 후계자야….

내가 차게 식은 눈으로 혀를 내밀고 부채질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아가씨.”

멀찍이서 경호하던 케인이 다가왔다.

그의 시선을 따라 저 멀리 큰 건물에 달린 시계를 보니, 렌틸 자작과 스칼렛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나는 슬슬 가 봐야겠네.”

“마차 어디에 대두셨어요? 아, 혹시 그 상단 거리에.”

“응, 그때 거기.”

레오폴트가 아멜리를 구하러 갈 때 에스메르 상단의 건물에서 마차를 갈아탔던 것을 떠올린 듯 말했다.

“자, 그럼.”

“함께 가시죠.”

내가 인사를 나누려 할 때, 내내 묵묵히 있던 루시페우스가 재빨리 말했다. 그를 돌아보니 그의 낯이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늘 그랬듯 무표정이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난 기색.

“저도 아버지의 상단에 일이 있어서요.”

“아.”

에스메르 상단의 황성지부 건물은 황성 내에서 활동하는 상단의 사무실이 몰려 있는 상단 거리에 있었다.

알비누스 상단의 사무실 역시 마찬가지.

‘상단에서 맡은 일이 없다더니, 심부름 정도는 하는 건가?’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을 재빠르게 굴렸다.

‘나야 아멜리 곁에서 떨어뜨리면 마음 편하지만, 또 단둘이 가면 어색할 것 같은데.’

그때, 아멜리가 슬그머니 물었다.

“멀리 가셔야 해요?”

“이 골목 반대편 끝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돼.”

“저희가 바래다 드릴까요?”

“레오!”

두 분이 단둘이 가시게, 좀! 레오폴트의 해맑은 말에 깜짝 놀란 아멜리가 재빨리 그를 만류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응, 그래줄래?”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데서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도 막고, 어색함도 막고.

간만에 레오폴트의 눈치 없음이 쓸모 있었다.

태양제의 먹거리 장터가 열린 저잣거리를 통과하여 반대편 끝에 다다르자 상단 거리가 나왔다.

그 경계는 성내에서 가장 많은 말이 모이는 곳이었다. 공용 마차 대기소와 저잣거리에 도착한 마차들이 주인을 내려주는 너른 공터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기소 바로 옆인 상단 거리의 초입에 알비누스 상단의 건물이 있으니, 이 어색한 동행도 곧 끝날 터.

공용 마차 대기소를 지날 때쯤, 나는 레오폴트와 아멜리에게 말했다.

“여기서 헤어지자. 돌아가 봐.”

“네, 아가씨. 오늘 밖에서 뵈어서 반가웠어요!”

“응응, 재밌게 놀고. 다음에는 레오폴트 경 없이 따로 놀러 와.”

“네, 아가씨!”

아멜리가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일들도 있었지만, 이들의 데이트를 구경하겠답시고 오늘 축제 거리에 나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멜리랑 친해졌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히히히힝!”

“꺄악!”

“아악, 조심해!”

“이, 이놈들 무슨 일이야?”

바로 옆의 공용 마차 대기소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깜짝 놀라 그편을 보니, 공용 마차에 묶여 있던 말들이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대기소에 있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 번에 뛰쳐나오는 바람에 그 입구부터 우리가 있는 구역이 온통 혼잡해졌다.

“맙소사.”

우리 일행은 그 혼잡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바싹 모여들었다. 내 등 뒤로 루시페우스의 가슴팍이 닿았다.

“전하!”

조금 떨어져서 나를 앞뒤로 경호하던 케인과 데릭이 깜짝 놀라 내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인파를 헤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지척에서 날뛰는 말의 기세에 놀라 꼼짝하지 못한 채 붙박여 있었다.

말들이 펄쩍대기 시작하자 거기에 매여 있던 마차들도 덩달아 이곳저곳 휘둘리며 치이고 부서지고 망가졌다.

히히힝! 마차가 부서져 몸이 가벼워진 말들이 이내 거리로 달려들었다.

“꺄악!”

“끄억, 조심해!”

말발굽에 차이는 사람도, 부서진 마차에 치여 날아가는 사람도….

“영식, 레이디 아멜리를 부탁해!”

그때, 레오폴트가 루시페우스를 향해 외치고는 재빨리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검을 빼 드는 대신 바닥에 나뒹구는 각목을 아무거나 주워 들고서 말들에게 겨누었다.

말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거겠지…. 역시 정의롭고 올바른 햇살형 남주다웠다.

그런 생각을, 나는 그 와중에 태평하게도 했다.

“다들 얼른 대피하게!”

“으, 으어어…!”

“감사, 가, 감사합니다, 나, 나, 나리….”

레오폴트가 신성력으로 방패 크기의 결계를 만들고서 말들 앞에 서자, 말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던 사람들이 풀린 다리를 재촉하여 대피했다.

‘이런 일은 원작에 나온 적 없는 건데….’

그리고 나는, 그 상황에서 원작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면 원작이 아멜리 시점이었으니, 아멜리와 연관되지 않은 일은 모를 수밖에 없는데. 오늘 두 사람의 저잣거리 데이트만 해도 원작에 없는 일이고 말이다.

나는 뭘 그리 호언장담한 걸까.

내가 얼떨떨한 시선으로 아멜리의 손을 부여잡고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내 쪽에 인파가 몰려 있어 다가오지 못한 케인과 데릭이 레오폴트에게 가세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히히힝!”

방향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던 말들은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사들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밀리! 전하!”

말 하나가 레오폴트와 데릭 사이를 돌파하더니, 길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그 기세 좋은 말의 발길질에 내 앞의 사람들이 차례로 날아갔고….

“조심하쇼!”

“피해요!”

“꺄악!”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내 쪽을 향해 다급히 소리치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놀라서 얼어붙은 듯 거기 서 있었다.

‘왜 말 눈이 뒤집혀 있지? 약이라도 먹었나? 저 발에 맞으면 레베카 신성력을 발동할 새도 없이 골로 갈 텐데….’

현실감이 없어서일까, 나는 꼼짝할 생각도 못 한 채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전하! 제길…!”

“이 망아지 새끼, 이쪽으로 와!”

케인과 데릭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귓속에서 웅웅대었고.

히히히힝! 덩치 큰 말이 상체를 쳐들어 내 바로 앞에서 앞발을 휘저어댈 때.

‘와, 키가 나보다 큰 것 같다.’

머릿속까지 얼어붙었는지, 바보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던 때였다.

말이 쳐들었던 발을 내 쪽으로 내리찍으려던 순간.

갑작스레 머리 위로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타났다.

순식간에 모든 풍경이 멈췄다.

날뛰던 말도, 놀라서 허둥대던 사람들도, 내게 뭐라 뭐라 말하던 자들도.

그러니까, 이건 마법…?

“…경?”

그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려 보았더니, 내 뒤편에서 뻗어 나온 팔이 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앞에서 이편을 향해 소리치던 레오폴트도, 그 곁의 내 기사들도, 그들에게 등을 맡기고 도망치는 인파도, 내 곁의 아멜리조차.

모두가 루시페우스의 마법에 걸려 멈춘 채였다.

그러니까, 아멜리조차.

왜 아멜리가 아니라 나를…?

내가 얼떨떨해하는 사이, 순식간에 루시페우스는 허리를 숙이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그의 단단한 팔에 안기자마자 나는 그 거리에서 가까운 건물 위로 이동해 있었다.

“꺅!”

갑작스레 시야가 너무나도 높아진 바람에, 나는 저도 모르게 루시페우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배었다.

“빚이 자꾸 늘어나고 있군요, 레이디 작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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