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83화 (83/220)

83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7)

짝이 맞는다고?

나는 눈을 댕그랗게 뜨고서 아멜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낯은 언제나처럼 심지 굳은 다정함으로 빛났다.

그러니까, 농담이 아닌 거지…?

‘루시페우스, 기분 엄청 나쁘겠는데…. 나랑 자꾸 엮이는 걸로 모자라, 아멜리가 오해하기까지….’

레오폴트와 악수를 마친 뒤 팔짱을 낀 루시페우스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실 그가 어떤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기야 했지만….

‘괜히 나한테 불똥이 튀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가 내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하기야 했지만, 내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리 말한 걸 수도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저야, 레이디께서 괜찮으시다면.”

루시페우스의 말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울렸다.

‘괜찮다고?’

내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자, 특유의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는 그는 입 한번 연 적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래, 애초에 그가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아멜리만 있다면야.’

뭐어, 마음이 그렇게 간단히 접어지는 건 아닐 테니까….

‘잠깐. 아멜리를 두고 내가 비호하는 레이디라고 했던 걸 보면, 나랑 다니면 아멜리를 보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꽤 기분 나쁜데. 그 이유를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이용당한 거나 마찬가지라서겠지.’

내가 생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댈 때였다.

“그러니까, 레이디 작은 별께서 말입니다.”

“아가씨께서는, 곤란하신가요?”

루시페우스가 왠지 다급한 듯 덧붙이는 말에, 아멜리가 내 안색을 살피며 다정히 말을 걸었다.

“…나?”

두 사람은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여기서 가장 신분이 높으니까…?’

아멜리의 제안 자체는 기꺼웠다.

게다가 혼자 기분 나쁘답시고 선을 그어버리면, 분위기를 망치는 게 되지 않을까….

‘이 김에 아멜리랑 친해지면 좋고.’

그리고, 내내 단둘의 시간을 방해받을까 경계하고 있는 레오폴트를 놀릴 수도 있고.

나는 레오폴트의 날카로운 시선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능청스럽게 답했다.

“좋아. 마침 내가 약속 시간에 너무 일찍 나와버렸던 참인데.”

“잘되었어요!”

내 수락에 아멜리가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께서 루시페우스 경과 가까우신 사이인 줄 몰랐는데, 이렇게 함께 뵈니 정말 반가워요.”

그리 말하며 아멜리가 동의를 구하듯, 레오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단둘의 시간을 방해받게 되어 처량한 낯을 짓고 있던 레오폴트는, 아멜리의 시선에 금세 열의를 띠었다.

“그러게요, 저도 몰랐는데.”

‘몰랐는데’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제게 근황을 공유하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던 레오폴트였으니까.

“레오, 그게.”

“혹시 종소리….”

“레오폴트 경.”

“넵.”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네.

어렸을 때 하도 종소리로 세뇌했더니, 종소리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삶의 신비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야 지금 내가 루시페우스랑 나타난 게 오해할 만하긴 하지만.’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기 위해 눈에 힘을 빡 주면서 말했다.

“나랑 루시페우스 경은 정말로 우연히 만난 것뿐이야.”

나는 ‘우연히’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말했다. 루시페우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지, 관자놀이가 뜨거웠다.

“내가 지갑이 없어서 곤란하던 차에 도움을 받았다고.”

“지갑이 없으시다고요?”

“기사들 같이 나오긴 했는데, 잠깐 심부름을 시켰었거든. 아, 케인도 나와 있어.”

“어머.”

케인의 이름에 아멜리가 반가운 듯한 낯을 지었다.

맞다. 나는 갑자기 생각에 닿는 것이 있어, 손을 흔들어 케인을 불렀다.

“케인, 일하는 중이구나?”

“네에, 연중 가장 혼잡한 날에 비밀 경호 중이었죠.”

아멜리가 반가이 낸 목소리에,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케인이 음울하게 답했다.

그가 돌발 행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것이 생각나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이분들하고 잠깐 돌아다닐게. 약속 시간 조금 남았으니까.”

“예.”

케인이 절도 있게 대답해 보였지만, 나는 그 끄트머리에 한숨이 배어 있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레오폴트에게 한 번, 루시페우스에게 한 번 닿는 것이, 어쨌건 그들이 있으니 안심이라는 눈치였다.

루시페우스를 믿는 건 조금 이상했지만.

“그리고 그거, 한 봉지만 줘.”

케인은 안고 있던 커스터드 크림빵 봉투 중 하나를 내게 안기고는,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갔다.

종이봉투를 열자.

‘아, 이 냄새지…!’

달큼한 향이 우리 주변에 한껏 풍겼다.

아멜리의 시선이 절로 이쪽을 향했다. 역시,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깐.

“영애, 이거 한번 먹어 봐.”

나는 봉투를 아멜리 쪽으로 내밀어 권했다.

내가 봉투를 열 때부터 눈이 반짝이던 아멜리는 굉장히 황송한 낯으로 커스터드 크림빵을 하나 조심스레 꺼내서는 베어 물었다.

“어머, 엄청 자극적인 맛인데, 와중에 중독성이 있네요…. 크림이 진하고 단데 조금밖에 없어서, 자꾸 먹게 돼요.”

토끼 눈을 뜨고 감탄한 아멜리는 아껴서 먹으려는 듯 그 작은 빵을 야금야금했다.

덩달아 한입 먹어본 레오폴트는,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단건 영양학적으로 안 좋다고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는 표정이었다.

‘레오 반응이야 뭐, 내게 뭐 중요하겠어.’

나는 아멜리가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흡족한 마음이었다.

일종의 조공이 성공해서 좋고, 아멜리의 경계심을 풀어놓으면 암조 작전 수행하기에도 좋고.

‘로즈버리령의 문제와 귀족파가 긴밀하게 얽혀 있으니, 아멜리 행보를 좇으면 귀족파 음모 파헤치기도 좋을 테니까.’

내가 속으로 나의 불순한 의도를 곱씹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더 먹어도 돼. 맘껏 먹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아멜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종이봉투 안에 손을 넣으려다가… 그녀의 시선이 내 뒤편으로 향했다.

‘아, 루시페우스.’

동행을 선뜻 수락한 것치고 그는 내내 방관자처럼 동떨어져 있었다.

“저, 이거….”

아멜리가 눈동자를 굴려 나와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멜리의 예의 바른 성정이라면 하나쯤 권할 법도 한데 내 것이라 선뜻 못 그러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그랑 친밀하지 않아서 말 붙이기도 어색한 것이 선연했다.

‘아멜리는 루시페우스와 낯을 가리는구나. 좋아. 좋은 징조야.’

살갑게 대하지조차 않는다면 더욱 마음 정리하기가 쉽겠지.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봉투 안에서 커스터드 크림빵 하나를 꺼냈다.

기분 좋으니까, 옛다, 상이다.

그런 심정으로 내가 빵을 그에게로 내밀었을 때였다.

“경도 한입 먹어봐.”

내내 군것질과는 담쌓은 사람처럼 구는 그가 집기 쉽도록 팔짱을 낀 손 근처에 빵을 내밀었을 때.

그는 팔짱을 풀지 않고, 허리를 숙이더니… 내 손에 든 것을 제 입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손으로 받은 게 아니라….

나는 휘둥그레진 눈을 감출 생각조차 못 했다.

이 시장통에서 우리 주변에만 침묵이 흘렀다.

“어머.”

그게 나만의 놀라움은 아니었던지, 아멜리의 입에서도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상체를 들어 올리고, 진기한 영약이라도 맛보는 듯 느릿하게 우물대고… 그 모든 장면이 슬로 모션처럼 내 망막을 스쳐 지나갔을 때.

“이것도 꽤 달군요.”

정작 모두를 경악시킨 루시페우스 본인은 태연하게도 맛을 품평하는 것이었다.

그러고서 나를 쳐다보는 그의 낯은 무슨 문제라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과 잇새가 닿을 듯 닿지 않았던 손끝이 화끈거렸다.

그가 이따금 쥐어보곤 하던 그 손끝이었다.

아연실색한 내 귓가에 레오폴트의 맹한 말소리가 울려 왔다.

“종소리, 지금은 안 울리셨어요…?”

아멜리와 레오폴트가 시도해 보려고 기다리고 있던 추로스가 역시나 아멜리의 입맛을 저격한 뒤.

나와 루시페우스의 기묘한 동행은 네 사람의 어색한 동행으로 진화하였다.

레오폴트는 여전히 뭔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아멜리가 좋아하니 내색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곧 갈 테니까, 표정 풀어, 응?

나는 인상을 팍 쓴 채로 레오폴트에게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레오폴트의 낯에서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시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지난번 아멜리가 내게만 손수건을 선물해줬을 때처럼 입술이 빼죽 튀어나와 있었다.

‘한껏 멋있는 척하고 있었는데, 내가 선수 쳤다 이거지.’

나는 내 16년지기의 낯에 깃든 생각을 대번에 눈치채 주었다.

‘나한테 예쁜 말 건네주던 아이가 계속 해맑을 수 있도록, 본인도 모르는 시련을 거둬준 내가 죄인이지.’

다른 때였으면 기분 풀라고 한마디라도 했겠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내가 레오폴트와 대화하는 사이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에게 말을 걸까 봐서.

내가 그리도 경계하는 것이 무색하게도, 루시페우스는 내 뒤에 붙은 채 묵묵히 따라오고 있을 뿐이었지만.

‘무슨 생각으로 동행을 수락한 거지?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건가…?’

뒤에 있으니 그가 무슨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와 나눌 말도 없고.

그때, 와플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생크림과 캐러멜 드리즐을 담뿍 올려 파는 것이, 먹여 보지 않아도 역시 아멜리의 취향이었다.

나는 레오폴트의 어깨를 톡톡 쳐서, 나지막하게 일렀다. 아멜리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저기, 저게 내가 말한 그 와플이야.”

내가 턱짓하는 방향을 살펴본 레오폴트의 눈에 다시금 미세한 고통이 깃들었다.

다디단 걸 또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미뢰가 아리는 모양이었다.

‘레오로서는 모르는 음식들 찾느라 고생하던 차였을 테니, 내게 고맙기야 하겠지만 말이야.’

나는 레오폴트의 어깨를 다시 톡톡 두드려, 얼른 아멜리 데리고 정보력 좋은 연인 행세를 하라고 단호하게 턱짓했다.

“밀리, 저기 와플 위에 생크림과 캐러멜 시럽을 올려 파는데. 그대가 생크림을 좋아하지 않던가요?”

“어머, 레오. 그런 관찰력도 생기고.”

그 말을 듣던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볼 테니까.

‘아무리 사랑해도 면박을 줄 땐 주는 거지. 이게 바로 여주인공 매력이라고.’

그리 생각하며 내가 숨죽여 쿡쿡 웃을 때였다. 내 뒤에서 루시페우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즐거우신가 봅니다.”

“으, 응?”

몰래 웃는다고 웃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의 쪽을 돌아보자, 인파가 혼잡해서인지 내게 바싹 붙어 선 채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퍽 가까이서 났다.

여전히 무표정인 그의 낯은… 내가 레오폴트에게 아멜리에게 멋있게 보일 기회를 준 데 대한 원망을 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그래서?”

마법적 재능이 대단하다거나, 빨간 눈을 지녀서?

워낙에 시끄러워서 들리진 않을 테지만, 귀족 사회엔 비밀인 일이니 나는 눈치껏 우물대 주었다.

“네?”

그가 되묻는 말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나는 놀림당했다는 불쾌함 반, 답답함 반으로 귀를 갖다 대라 손짓했다.

그가 내게로 상체를 기울이자, 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경의 특성 말이야…. 아니면 마법으로 봤다거나.”

“…제게 투시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 건 안 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시페우스가 낮게 웃었다.

그럼 어떻게 알았지.

내 낯을 쳐다보던 루시페우스가 주저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말을 자아냈다.

“보닛이 조금 까딱거렸거든요. 웃으실 때 늘 머리를 조금 흔드시기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