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6)
“내가? 레오랑 만나기로 했냐고?”
그렇게 묻는 그의 낯이 다분히 날카로워서…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딘가 위협적이기도 했고.
아니면… 두 사람이 만나는 걸 알고 있었냐고 묻는 걸까?
“아니, 나는 이후에 일정이 따로 있다니까?”
나는 마음이 찔리는 것을 무시하며 시치미를 뗐다.
레오폴트가 여기에 올 줄 알고 온 거였고, 일부러 그를 찾기 쉽도록 여기에 자리 잡긴 했지만….
“어머어, 그러고 보니 그 옆에 로브 입은 사람이 로즈버리 영애인가? 머리칼이 분홍색 같은데.”
나는 모르는 척 그리 말하면서도,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는 않았는지 그를 흘끔대었다.
그의 낯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이, 그린 듯한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는 같이 잘 다니나만 확인하려던 거였는데, 루시페우스랑 같이 목격한 건 예상외의 수확이네.’
아무리 접점을 없애도 아멜리에게 끌리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으려나?
내가 그의 낯에 어떤 기미가 피어오를까 싶어 살필 때.
“혹시 만나러 가시겠습니까?”
“응?”
“친우분을 이런 데서 우연히 만나는 것도 즐거운 재미 아니신가 싶어서요.”
진심인가? 나는 그의 낯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낯이었지만….
‘역시 아멜리를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건가?’
두 사람이 다정한 걸 가까이서 보고서 그가 단념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만약, 그렇게라도 제가 연모하는 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마음이 저릿한 것이….
‘낭패감이야, 이건.’
나는 입술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며 간신히 둘러댈 말을 찾았다. 그 낭패감 때문인지, 그의 말대로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레오가 불쾌해할 텐데.”
“레오라고는….”
“응?”
“…오래간 친우로 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소공작과는요.”
“응? 어, 그렇지. 일곱 살 때부터 레오가 내 말벗으로 프리지어궁에 드나들었으니까.”
와, 벌써 15년이네. 나는 새삼스러운 계산에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소공작의 사랑을 응원해 주시고요.”
“친구가 행복한 건 좋잖아…?”
나는 그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해 느릿하게 말을 자아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 마주 보며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입꼬리가 어쩐지 비대칭으로 흘렀다.
“친구…요.”
친구라. 마치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그는 ‘친구’라는 단어를 얼마간 입에서 우물대었다.
‘그러고 보니 루시페우스에게 친구란 존재는 있을까…? 그때 겔프 영식 정도?’
나는 여전히 그가 들고 있는 파인애플주스를 쪼로록 빨아들이며 덧붙였다.
“레오가 오늘 어떤 거 먹으며 다닐지 물어봐서 내가 조언해 주기까지 했는걸. 경에겐 미안하게 됐지만 말이야.”
“그토록 오랜 우정이면 그러실 수도 있지요.”
그리 읊조린 그는 어딘가 개운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소공작께서 불쾌해하시는 것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는 제 연적인데요.”
그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나는 어딘가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나와 루시페우스의 기묘한 동행은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레오폴트랑 아멜리가 얼마나 다정한지 확인하고 슬슬 마음 접어주면 좋겠다. 귀족파 일은 그것대로 해결해야겠지만 말이야.’
정작 레오폴트를 두고 연적이라 선언한 그는 태연한 낯이었지만.
그들의 뒤를 조용히 밟자니, 두 사람은 추로스를 맛보려고 줄 서 있는 모양이었다.
‘듣기만 해도 다네, 건강에 안 좋을 게 뻔하네, 구시렁대 놓고는.’
속으로는 착실히 다 기억한 모양이었다.
쉿, 나는 루시페우스를 향해 검지를 입술에 붙여 보인 뒤, 인파를 헤치고 살금살금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와, 이 과일 사탕도 정말 맛있어요! 레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감이 좋아요? 골라주는 것마다 입에 착착 붙네요. 당신도 와본 적 없었다면서.”
“밀리,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직감이 발달한 모양입니다.”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
그 밑도 끝도 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이 다정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도 좋았지만, 그것이 내 형제나 마찬가지인 레오폴트의 입에서 나와서….
‘직감은 개뿔.’
레오폴트의 잰 체가 고까워진 나는 그들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갓 나온 추로스에다가 아이스크림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엄마야!”
내가 부러 음산하게 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나와 눈높이가 맞는 아멜리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삐그덕 고개를 돌려, 초면의 내 낯을 보고서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었다.
“누, 누구세요…?”
“두 사람 데이트, 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
“…전하?”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레오폴트가 이편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에 아멜리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전하라니요?”
“쉿, 여기서 그 호칭은 좀.”
“저, 정말, 저, 저, 전하….”
그제야 아멜리도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숫제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서, 재빨리 보닛의 리본을 풀어 보닛을 머리에서 살짝 떼 보였다. 훤칠한 레오폴트와 루시페우스의 등짝이 가려줄 테니까.
“이렇게 된 거야.”
“어머. 마도구구나….”
순간적으로 나타난 내 원래 얼굴을 확인한 아멜리가 신기해하는 낯이 되었다.
“그 보닛 오랜만이네요.”
“응, 어렸을 때 쓰던 거랑 똑같이 새로 만들었어.”
그리 대답하며 나는 보닛에 달린 리본을 다시금 단단히 묶었다.
아멜리가 내게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입술만 달싹이던 그때.
반가운 기색도 잠시, 당황한 듯 어색한 듯한 복합적인 기색을 비치던 레오폴트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태양제 때 나와본 적 없으시다면서요.”
그리 말하는 레오폴트의 말소리에는 타박이 섞여 있었다.
눈치 없게 왜 끼냐 이거였다.
‘…얘 좀 봐. 아멜리와 단둘이 행복했는데, 내가 불청객이다, 이거지.’
내가 떨떠름한 마음을 숨기며 적당한 답을 대려던 찰나, 레오폴트의 시선이 내 뒤편을 향했다. 아멜리의 시선 또한….
“어머, 신사님.”
“알비누스 영식.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군. 반갑네.”
우리의 해맑은 꽃밭 레오폴트는 천진하게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상대가 저를 연적으로 분류한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루시페우스는 레오폴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애매한 간격을 두고서 슬쩍 맞잡았다.
“…윽.”
미세하게 레오폴트의 낯이 굳는 것이, 무언가 수를 쓴 모양이었다….
‘마법이라도 썼나? 속 좁게.’
나는 루시페우스 몰래 그에게 눈을 흘겼다.
“좋은 오후입니다, 소공작님. 레이디 아멜리. 이런 데서 뵙다니 우연이군요.”
내가 그의 속내를 몰랐다면 짐작도 못 했을 정도로, 루시페우스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들을 대했다. 그 목소리는 일견 사무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 두 남자의 기류를 살폈다.
질투 때문인지 냉랭한 기색의 루시페우스와,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하는 해맑은 레오폴트.
‘태양절 연회 때, 흑화 레오폴트는 절대로 못 보겠구먼.’
원작대로라면 지금쯤 레오폴트는 아멜리와 제 사이를 폄하하고 아멜리를 적대하는 수많은 사교계 인사 때문에 혼란스러워해야 했다.
제게는 다정하던 세계를 아멜리의 관점으로 새로이 지각하는 대전환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멜리를 해코지하던 윌로우 놈도 해치우고, 아멜리에 대해 비우호적인 시선도 많이 거두었고.
‘레오폴트가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지….’
나는 어렸을 때 내가 뭘 하건 선망의 눈길로 바라봐 주던 다정한 레오폴트 어린이를 떠올리며, 그가 비뚤어지지 않았음에 새삼 뿌듯해졌다.
그때, 아멜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 분이 같이….”
다시금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눈동자가 나와 루시페우스 사이를 왕복하였다.
그들의 낯에 들어차는 물음표….
아, 나랑 루시페우스가 저들처럼 데이트를 나온 줄로 착각하는 건가?
‘나야 일축하면 그만이지만, 루시페우스가 좀 상처겠네.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오해한다면 말이야.’
그리 생각하며 나는 내 뒤편에 선 루시페우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는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낯이었다.
‘…아멜리랑 이어지지 않는대도 나랑 엮이는 게 싫을 수도 있겠고.’
아까 솜사탕 장수를 노려보던 것도 그렇고 말이다.
‘누구는 기분 좋은 줄 아나….’
그리 생각하니 처지는 기분…. 나는 부정적인 기분을 떨치려,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성내에 볼일이 있어서 나온 김에 잠깐 들렀는데, 우연히 마주쳤어.”
그리 말하며 나는 원래 내 일행인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두 기사는 골목의 양쪽에 나누어 서 있었다.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아멜리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영애. 과연 듣던 대로 재미있어?”
“네, 네! 전, 아니, 아가씨, 평생 못 잊을 추억이 될 것 같아요!”
그리 말하며 천진하게 미소 짓는 아멜리의 낯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루시페우스가 그녀의 미소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마주 방긋 웃어주었다.
‘아, 뿌듯해.’
아멜리가 루시페우스를 바라보는 시선의 경우에는 특별한 친근감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레오폴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제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어서 꽤 의지했을 텐데.’
그런 여지가 있으니 원작의 루시페우스가 그녀에게 집착해도 된다고 착각한 것 아니었을까?
아멜리는 그저 원체 상냥하고 예의 바른 천성대로 굴었을 뿐인데.
‘아멜리는 친구로도 생각 안 하는데, 루시페우스 혼자 계속 끌리는 건가 보네.’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에 대한 자그마한 안타까움이 든 것도 잠시.
나는 보란 듯이 고급 정보를 하나 건넸다.
“전야제 때 강변에서 불꽃놀이 한다니까, 그때 둘이 꼭 가 봐. 맘에 쏙 들 거야.”
원작에서 태양절 전야제의 불꽃놀이는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처럼 데이트할 사이는 아니었던 두 사람이 거기서 우연히 마주쳐, 그 낭만적인 분위기 덕에 마음이 깊어졌으니까.
내 말을 들은 아멜리는 조금 즐거운 낯을 하며 살갑게 말했다.
“아가씨껜 번번이 도움만 받네요.”
“으응, 레오폴트 경이랑 잘 지내는 것만도 고마워서 말이지.”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옆쪽에서 루시페우스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왜, 뭐, 왜, 내가 내 친구 챙겨주는 건데. 이럴 줄 모르고 찾아오자고 한 거야?’
그때, 아멜리가 손바닥을 딱 마주치면서 말했다.
“이렇게 뵌 것도 반가운데,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동행하시겠어요?”
동행?
나는 눈동자를 굴려 레오폴트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멜리만의 생각인지 뜨악한 표정이었다.
‘내가 아멜리랑 처음 어울렸을 땐 황송해하더니, 이제는 익숙해서 귀찮다 이거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윽고 아멜리의 시선은 내 뒤편을 향했다.
“아가씨와 루시페우스 경께서 함께 오셨으니, 짝이 딱 맞잖아요,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