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81화 (81/220)

81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5)

“그으….”

루시페우스는 차마 말을 빚어내지 못하여 말꼬리만 늘였다.

당황한 거야? 그 루시페우스가? 예상외의 반응에 나는 작게 놀랐다.

“그러려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걸 작동하지 않으시는 이상 제가 그쪽을 감지할 수도 없으니 안심하시고요.”

다급하게 읊는 그의 낯이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찰나. 루시페우스가 마치 말을 돌리듯 화제를 바꿨다.

“레이디께서도 축제를 즐기러 나오신 건가요?”

“볼일이 있어 나온 김에 잠깐 들렀어. 저잣거리 음식이 유명하대서.”

“들고 계신 그런 것 말씀인가요.”

“으응, 뭐… 이거, 솜사탕도 그렇지.”

솜사탕을 먹으러 나온 건 아니었지만.

나는 솜사탕이 초면인 그를 위해 솜사탕 먹는 법을 시연해 주었다.

“솜 같지? 이렇게 뭉쳐서 먹어야 입가에 안 묻히고 먹을 수 있어.”

“재미있는 물질이군요.”

그리 말하는 그의 손이 솜사탕을 오물대는 내 입가, 아니, 어쩌면 끈적임이 남아 있는 손끝에 진득이 머물러 있었다.

‘얘한테는 축제 장터 자체가 낯설 수도 있겠다.’

저잣거리에서 실수로 빨간 눈을 보이고서 험한 꼴을 당했던 걸 테니, 이후로도 밖에 나오기 어려웠을 거였다.

‘마법을 깨치고서는 그런 것이 두려울 이유가 없었겠지만….’

소년 루시페우스가 용돈을 받아서 축제 거리를 구경하러 나와 군것질하는 장면이라. 퍽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전까지 그가 무서워서 심장이 두근대던 것도 잊고, 나는 그의 낯에 어린 시절 달빛 아래서 흐느끼던 소년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그때 불쑥 치민 마음은, 동정심이었을까?

“한입 먹어 볼래?”

“예?”

“여기.”

나는 그에게로 솜사탕을 내밀었다.

‘아차, 얘 장갑 끼고 있지.’

솜사탕을 떼어 대충 뭉친 뒤 그의 입가에 내밀었다.

그는 잠시간 머뭇거리더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솜사탕 뭉치를 천천히 물었다.

‘설탕 덩어리라 입맛에 안 맞을 수 있겠지만.’

그가 뭘 먹는 건 술밖에 못 보긴 했으니까.

‘그것도 드라이해 보이는 위스키 같은 거.’

나는 끈적끈적해진 손끝을 쪼옥 빨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어색한 낯으로 조금씩 우물대는 그의 시선은 내게 머물러 있었다. 아차, 이런 건 좀 기품 없는 모습인가?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에 물었던 손끝을 천천히 내렸다.

“역시 입맛에 좀….”

“다네요.”

“응?”

“달아요.”

그 설탕 덩어리가 뭐라도 되는 양, 고심 끝에 내린 듯한 그의 답은 어떤 선언처럼 울렸다.

그 기색이 너무나도 진지하여, 나는 어설픈 대답만 입에 올릴 수 있었다.

“…당연하지. 이름에 사탕이 들어갔으니까.”

이 부산한 시장통에서, 우리 사이에만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내가 어색한 마음에 솜사탕만 만지작거리던 때였다.

“혹 동행하는 영광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혼자는 아니시겠지만요. 그리 말하는 그의 시선이 케인과 데릭이 있는 쪽을 향했다.

“유학 마치고 처음 맞는 태양제라 궁금한데, 처음이라 익숙지 않군요. 레이디께선 퍽 익숙하신 듯하니 안내를 부탁드리고자.”

그가 내 손에 들린 솜사탕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익숙지 않다는 대목에서 나는 이미 마음이 물러지고 말았다.

달빛 아래서 흐느끼던 소년의 옹송그린 어깨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다가도 막상 그를 보면 마음이 풀어지고 마는 건, 역시 어린 시절의 그를 알아서일까?

‘불쌍해서 그래. 이런 즐거운 거 모르고 자랐을 어린 시절이 짠해서.’

그렇게 내 복잡한 마음을 눙치며, 나는 그를 가까이서 감시하는 거라고 합리화했다.

루시페우스와의 동행은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수다를 떨 만큼 친밀한 것도 아니었고, 마음을 열 만큼 그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최소한 덜 닿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몸놀림을 보자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는 나오면 안 될 것 같은데.’

그에게는 사실 결벽증 설정이 있었던 걸까?

‘결벽증이면 나한테는 왜.’

나는 손거울이 든 주머니에 넣은 손을 괜스레 꼼지락댔다. 일전에 그가 잡았던 손끝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는 아멜리에게 손끝 하나 안 댔으면서 왜…. 아!’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에, 나는 속으로 반색했다.

‘이 근처 어디에 아멜리가 레오폴트랑 나와 있을 테니, 둘이 다정한 걸 루시페우스가 목격하면 체념하지 않을까?’

원작에서는 며칠 뒤 태양절 연회 때 두 사람이 퍽 가까운 걸 보고서, 뺏겼다는 생각에 선을 넘고 마는 그였다.

반면 지금은 아멜리랑 그때보다 친하지 않으니, 레오폴트랑 훨씬 가까운 거 확인하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왕 그렇게 된 거, 차라리 우연인 척 같이 그들을 찾아버리자.’

나는 내 계획이 흡족하여 속으로 음흉스러운 미소를 삼켰다.

‘어디 보자아, 걔네를 찾기 쉬우려면….’

두리번대던 내 눈에, 거리 한가운데의 광장을 둘러싼 계단이 보였다. 군것질거리를 사서는 거기 모여 앉아 먹는 모양이었다.

‘저 위에서 있으면 아래가 잘 내려다보일 테니까.’

나는 루시페우스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경. 혹시 저기서 잠깐 발 좀 쉬었다 갈래?”

그리 말하며 나는 계단 위쪽을 가리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내 웃는 낯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사람 웃는 거 처음 봐?’

…그러고 보니, 그는 내가 늘 제게 인상을 찌푸린다고 했던가.

‘무슨 속셈인가 싶겠구나.’

나는 그가 의심하지 못하기를 바라며 한층 더 해맑게 방글방글 웃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루시페우스의 낯에는 왠지 당황스러움… 같은 것이 스쳤다.

‘쳇.’

변장 마법 없었으면, 어? 세실리아 얼굴이었으면, 어? 안 넘어가는 사람이 없는데, 어?

내가 아무리 저를 무서워해도 허락받을 군번도 아니고.

나는 마음 상한 기색을 풀풀 풍기며 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새침하게 말했다.

“목도 말라서. 저 주스 마시고 가자고.”

“파인애플에 담긴 것 말씀이신가요.”

“응. 근데, 돈이.”

“기꺼이 달아 두겠습니다. 에스메르 양께 좋은 거래를 청할 수 있겠군요.”

그리 말하는 그의 말소리가 그답잖게도 장난스럽게 울렸다.

루시페우스는 근처 생과일 음료 수레 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나는 가로수 그늘진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확인했다.

커스터드 크림빵 봉지를 한 아름 안은 케인과 데릭이 나란히 서서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낯에 어린 것은, 어딘가 의뭉스러운 미소.

아니라시더니, 지금 뭔가요?

히히, 암조 녀석들한테 얘기해주면 좋아하겠네.

망상 그만 펼치고 주변이나 잘 살펴, 응?

곧 10년 차 수하들과 눈빛으로 투덕대던 그때. 루시페우스가 파인애플의 속을 파서 만든 주스 두 개를 손에 들고 이편으로 올라왔다.

조금 전까지 기사들과 눈으로 싸웠던 기색은 싹 지우고서, 나는 그가 건네는 파인애플주스를 받아 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맨손으로 쥐시기에 아플 듯합니다.”

그리 말하며 그는 내 입가에 사탕수수 빨대가 오도록 주스를 대주었다.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빨대를 입에 물었다. 내가 마시는 양을 보고 배우기라도 하려는 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도 제 몫의 주스를 마셨다.

쪼로록 하는 소리가 양쪽에서 울리다가 다시금 침묵.

딱히 취향이 아닌 건가?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지.

‘망고랑 섞인 거네. 전생에선 좋아했을 맛인데, 지금은 좀 달다.’

어색함을 잊기 위해 내가 주스의 맛을 머릿속으로 품평하던 때,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게 궁금하신 것 없으신가요.”

“응?”

“제게 이런저런 하문을 하시는 것이 즐겁던 차인데, 지난번엔 그 즐거움을 얻지 못하여서.”

경매장에서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날 그의 말에 잔뜩 휘둘렸던 걸 생각하니, 기분이 슬그머니 나빠졌다.

‘아차, 또.’

그의 시선이 내 미간에 닿은 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모양이었다.

내 미간을 문지르던 그의 홧홧한 손끝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낯을 풀었다.

내 표정 변화 때문인가? 그의 입꼬리가 일순간 미미한 호선을 그렸다.

“아까 그 근처에서 볼일이 있었던 거야?”

이렇게 된 김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아까 그 인력 사무소가 귀족파 소유가 맞는지,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빛나,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까 솜사탕 팔던 곳에서 가까웠나 해서. 내가 거기에 잠깐밖에 안 서 있었는데.”

“…그런 셈이었습니다.”

그리 대답한 그는 잠시간 생각에 빠진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 근처에…. 제 가문이 투자한 인력 사무소가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순순히? 곧이곧대로?

나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께서 가까운 가문들과 공동으로 투자하신 개발 건이 있어서, 거기 파견할 일꾼을 제대로 선발하는지 살피러 갔던 참입니다.”

“…알비누스에서는 참 다양한 일을 하네.”

나는 그 말소리에 아무 의도도 비치지 않길 바라며 말했다.

“네, 상단 일도 하고 말이죠.”

“그곳의 일은 경의 소관이 아니라며?”

“그렇지만 누군가와 거래를 하기에 부족함은 없지요.”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장난스레 울렸다.

그렇게 절박한 듯 당부해놓고 아무 연락 없었으면서, 놀리는 건가? 나는 샐쭉하게 내뱉었다.

“그거, 이제 흐지부지됐어.”

“예?”

“경이 상단 일을 안 해봐서 잘 모르나 봐. 연락이 늦으면 거래 의사가 없는 걸로 간주하거든.”

그리 말하며 나는 주스를 쪼로록 마셨다. 내가 빨대를 물자, 그가 다시금 내가 마시기 편하도록 각도를 조정해 주었다.

내 말을 곱씹은 걸까, 한동안 말이 없던 루시페우스가 중얼거렸다.

“…기다리셨군요.”

“크흡.”

“괜찮으십니까.”

내가 사레들린 소리를 내자, 그가 놀라서 나의 낯을 살필 때였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니?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기, 기다리기는 무슨?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일은 잘 마쳤고?”

내 얼굴이 그가 보기에도 빨갰나? 루시페우스는 내 낯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열없이 대꾸했다.

“…그랬겠지요.”

일하러 갔다더니, 웬 남 말하는 듯한 말투야…?

‘갑자기 뛰쳐나온 것도 아닐 거면서.’

그가 제 이야기를 지금처럼 길게 하는 적이 없었음에도, 어느 것 하나 구체적인 것이 없었다.

그것은 실상 내가 그를 대하는 방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번 빙글빙글, 에둘러서, 변죽만 울리고.’

그게 조금 답답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루시페우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인파 위로 금빛 고수머리가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레오다!’

그렇다면, 그의 곁에는 아멜리가…!

‘아, 아멜리를 이 멀리서도 알아본 거구나.’

눈도 밝으셔. 나는 심통이 이는 것도 모른 채, 옆에 앉은 이의 낯을 살펴보았다.

여느 때처럼 큰 움직임이 없는 눈썹,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 그리고 일자로 굳게 다문 입.

루시페우스의 시선은 그편에 붙박여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멜리랑 레오폴트랑 함께 있는 거, 봤어? 저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네가 끼어들 자리 없다 이거야.’

나는 득의양양한 마음으로 심란함을 가렸다.

그의 시선이 그편에 오래 머물러서, 곧 다시 가라앉고 말았지만.

‘아멜리에게 끌리는 마음은 만유인력 같은 걸까? 아무리 내가 둘의 접점을 없애도 전혀 바뀌지 않는.’

얼마 전부터 그에 대해 생각할 때면 드는 무력감을 곱씹을 때였다.

루시페우스가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가 저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던 걸 알아챘는지, 미미한 불쾌감이 어린 낯이었다.

“…소공작과 만나시기로 하신 거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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