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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80화 (80/220)

80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4)

‘신성력이 없는 내 체질을 알아차렸다며 협박한다면 내 태도도 확실히 할 수 있을 텐데.’

그래, 단언컨대 그래서였다.

‘말로는 내게 위해를 가할 생각 없는 척하지만….’

그가 자꾸만 내게 다가올 때마다, 그가 아멜리에게 홀린 걸 알면서도 그게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 무척 곤란했다.

‘암조 애들이 난리를 부리는 게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냐. 나도 자꾸 마음이 쓰이는 게,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켜본 탓에 정이 안 떨어지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가 내 생각 이상의 계략가여서, 나를 방심시키기 위해 그리 말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경계를 풀면 안 되는 일이야….’

그리 생각하며,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손거울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진의를 한시라도 빨리 파악할 수 있을까 싶어 얼마 전부터 늘 손거울을 들고 다니던 차였다.

‘하도 신신당부하기도 했고, 한 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눠봐야 속내도 파악하기 용이할 테니까.’

그래, 그런 마음에서였다.

나는 왠지 쑥스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손거울을 쥔 손에 힘을 꾹 쥐었다.

‘게다가 오늘은 레오폴트랑 아멜리랑 즐겁게 데이트하는 날인데. 오늘 같은 날 무슨 음모라도 꾸미면 곤란하지.’

자꾸만 그에게 생각이 닿는 게, 혹시라도 그가 나타나서 훼방 놓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괜히 마음이 간다거나 할 리는 없으니까.

암, 그렇고말고.

‘…그나저나 레오폴트는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나는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레오폴트가 아멜리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알아 갔으니, 먹거리 장터가 열린 곳에 있지 않을까?

마침 내가 기사들과 향하고 있는…?

나는 혹시 분홍색 머리칼이 살랑이지 않는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은근한 말소리로 물었다.

“경, 오늘 로즈버리 영애…, 축제 구경 나온다고 했지?”

“아우렌바흐 소공작께서 말씀하시던가요? 새벽부터 꾸민 듯 안 꾸민 옷차림으로 나가야 한다고 어찌나 부산을 떠시던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케인이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기색으로 대꾸했다.

“말도 마. 레오는 제 연인 입맛도 몰라서 나한테 다 물어보러 왔다니까. 저잣거리 나오면 뭐 먹어야 하냐고.”

“아가씨께서 그걸 다 아세요?”

“저번에 보니까 나랑 취향이 좀 맞는 것 같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전생의 나랑 취향이 맞는 거였지만.

“그분도 참,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아가씨께 다 여쭈러 오고.”

“그러게 말이야.”

걔가 아직 철이 제대로 안 들어서 그래. 케인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면서 레오폴트가 철도 드는 거였는데, 사건들을 너무 싹 다 치웠나? 조금 흑화한 레오폴트가 멋있는 느낌이었거늘.’

그 시작이 열흘 남짓 뒤에 치러지는 이번 태양절 연회 때인데, 레오폴트는 내가 깔아준 꽃길 덕에 여전히 그 해맑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루시페우스가 뺨 맞는 에피소드가 이번 태양절 연회 때인 거지. 그때 루시페우스가 비아냥대는 거 듣고서 레오폴트가 화내는 게 장관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의 레오폴트를 보자면 이번 생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일 터였다.

게다가 루시페우스랑 아멜리의 관계가 느슨해졌으니, 루시페우스가 그 정도로 집착하진 않을 수도….

내가 접점을 많이 없앴는데도 아멜리에게 관심을 갖는 걸 보면, 일어날 사건은 일어날 것도 같지만 말이다.

‘그런다 해도 레오폴트가 멋있게 그를 퇴치하진 못할 텐데, 어쩌지.’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 보닛 리본을 꼭 쥐었다. 이제는 변장 마법을 건 모자 컬렉션이 꽤 다양해졌지만, 서민풍의 옷차림에 어울리는 건 역시 보닛이었다.

그때, 전생에 지하철 승강장에서부터 나던 달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아, 저기 있다. 케인.”

“네에, 네. 세 봉지라고 하셨죠?”

“부탁해.”

여전히 심기 불편한 낯의 케인을 향해, 나는 방긋 웃어주었다.

케인이 커스터드 크림빵의 노점에서 셈을 치르는 사이,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데릭과 그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그래? 로즈…. 어디?”

“로즈버리. 저기 동북쪽 노르타 산맥 산자락 어디에 있는 영지라는데.”

갑작스레 귀에 스며드는 말소리에 나는 자못 놀랐다.

잘못 들었나?

‘로즈버리는 황성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서 존재감도 완전 미미한데.’

여기서 로즈버리 얘기를 들을 줄이야…. 나는 그대로 데릭을 쳐다보았다.

그 또한 그 대화를 들은 눈치였다.

“아, 거기, 어렸을 때 탄광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아.”

“응, 그 탄광에 갈 사람을 뽑는대서.”

그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살피니, 노점 옆 건물의 인력 사무소 앞에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데릭.”

“네.”

인파를 주시한 데릭은 내게 움직여도 된다고 허락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인력 사무소 앞에 솜사탕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면 데릭이 지켜보기에도 좋을 거였다.

나는 인파를 헤치고 사뿐사뿐 걸어가, 솜사탕 만드는 걸 처음 본 사람처럼 구경하며 일꾼들의 대화에 귀를 열었다.

“숙식 제공이라고?”

“응, 게다가 영지가 낙후돼서 물가도 엄청 싸대.”

“너무 오래 비우면 여기 일자리 잃을 것 같은데.”

“이 여름에 공사 벌일 양반들이나 있겠어? 올해 신전 공사도 없는데 말이야.”

“대리석값이 올라서 우리만 일이 없지. 옌장, 나는 가겠어.”

“나, 나도 갈까? 근데 난 평생 말이나 몰아 봤지, 폭파 일은.”

“누군 해봤나? 갱도 들어가서 마력탄 설치만 하면 된다니까.”

“그거 잘못 터지면 다 죽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올해 공사가 없어서 일이 없다는 걸 보니 공사판 막일꾼들인 모양이었다.

‘로즈버리의 탄광에 폭탄을 설치한다면, 탄광을 철거한다는 소린데…. 그러니까 수정 광산을 노리고.’

역시 로즈버리령이 어려워진 것은 폐광 내부를 개발하기 위해서였나.

‘로즈버리 선대 남작 시절이면 족히 30년은 전인데, 귀족파가 수정에 목맨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네?’

아니면 혹시, 수정 이외의 무언가가 있는 걸까?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예측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러니까 수정이 지금처럼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선대 남작 시절 이후이니 말이었다.

‘원작에서 로즈버리령 탄광이 무너져서 남작이 다쳤다고 아멜리가 급히 영지에 다녀오는 일도 있었지.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구나.’

아멜리가 한창 영지 사정을 피워 보겠다고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귀족파의 농간이 한발 빠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어떻게 해결했더라…? 레오폴트가 로즈버리령에 깜짝 방문해서 알콩달콩하다가 끝이었는데.’

내가 일꾼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가씨, 하나 드릴까?”

너무 열정적으로 솜사탕에 시선을 붙박아 두었나? 노점상 주인이 내게 말을 붙이는 통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 그게.”

자연스럽게 솜사탕을 사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려나…? 절대로, 오랜만에 저 화학적인 설탕 맛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말이다.

‘아차. 지갑이 케인한테 있네.’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상인에게 손사랫짓해 보였다.

“신기해 보여서요.”

“얼마지?”

그때,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나에 동화 다섯 개요.”

“하나 주게.”

그리 말하며 내 귓가에서 쑥 내밀어진 손.

상인에게 동화를 건네는 그 손에는 검은 장갑이 끼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목소리도 익숙한 것이….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나를 등 뒤에서 가두듯 손을 뻗어 값을 치르고 있는 남자에게선 어째선가 열기가 났다.

마치 뛰어온 것처럼….

“…경.”

“이렇게 또 뵙는군요.”

오늘은 뭐라 칭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그가 특유의 고저 없는 말투로 너스레인 양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등 뒤에, 루시페우스가 와 있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에도 숨찬 기색이 희미하게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낯은 언제나처럼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지만.

완연한 여름 날씨인데도 목 끝까지, 소매 끝까지 여민 셔츠 차림.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 무서운 거지. 내 체질 갖고 협박할지도 모르는 앤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나는 얼빠진 낯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간신히 말을 빚어냈다.

“…솜사탕 좋아해?”

“이름이 그렇게 되는군요.”

역시, 솜사탕을 뜯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그 꼬마라면 모르겠지만…. 그 시절의 그가 이런 축제를 즐길 일이 있었을까.

아니 근데, 이름도 모르고 샀다면.

“그럼 이거 설마.”

“지갑이 없으신 듯하여.”

“…또 빚을 졌네.”

“기꺼이 달아 드리지요.”

그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린 것 같았다.

그것이 제가 약점을 쥔 이를 보는 강자의 포만감일지, 혹여 즐거움 같은 것은 아닐지…. 나는 얼마간 멍하니 그의 낯을 쳐다보았다.

그때, 상인이 완성된 솜사탕을 내게 건넸다.

“자, 여기, 솜사탕입니다. 자고로 맛있는 거 사주는 남자가 진국이라우.”

거기에 덧붙는 넉살 좋은 말소리.

‘이 아저씨가 뭣도 모르고…!’

아, 모르는 어르신의 격의 없는 오지랖이 얼마 만인가.

나는 혹시 루시페우스가 불쾌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어 그의 낯을 슬쩍 살폈다.

‘다행히 별 신경 안 쓰나…?’

그의 낯이 여상하여, 안심한 나는 전생에서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솜사탕을 건네받았다.

내가 의미도 없이 헤헤 웃고는 돌아서니, 루시페우스가 상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역시 상인이 심기를 거스른 걸까? 괜히 나랑 엮어서…?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눈동자를 굴려 그의 낯을 살폈다. 그가 입가에서 작은 한숨이 배어났다.

“뭐, 아닙니다.”

“…조금 섭섭하네. 나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미혼 여성인데.”

“네?”

루시페우스는 예상 못 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 아냐.”

괜한 농담을 했나. 나는 그의 주의를 상인에게서 돌리기 위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쨌든 고마워. 경도 축제 장터 구경을 나왔어?”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아. 조금 전까지 내가 엿듣고 있던 이야기가 분명 귀족파의 음모와 연관된 것일 테니…. 어쩌면 저들이 들어간 인력 사무소에 있다 나왔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베라초 유통을 돕기 위해 상단을 돌고 있었을 수도….’

그의 등장에 머리를 핑핑 돌리다 보니 역시, 그는 경계해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가라앉는 마음과 달리 부러 발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우연치고도 신기하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나를 봤어?”

“눈이 꽤 밝다고 해둘까요. 제 출생의 비밀도 한몫했고요.”

농담인 척해야 할 내용을 더없이 진지하게 읊는 것을 들으며, 나는 절로 그에게 미심쩍은 듯한 눈빛을 보냈다.

“…농담입니다.”

그리 말하며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을까.

“오늘은 들고나오셨더군요.”

“뭘? 아….”

손거울.

흐앙, 역시 감시당하고 있었나…!

한편으로는 원피스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그것을 떠올리니 괜스레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것만 같고.

‘올해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한 셈이니까….’

나는 화악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빨리 내뱉었다.

“레이디에게 선물로 주는 것치곤 음습한 취미 아냐?”

“아, 그게.”

내가 일부러 못되게 내뱉은 말에, 루시페우스는 어딘가 당황한 기색이었다.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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