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3)
“정확히 무슨 물품인지는 안 밝히고, 성내 유통을 도와준다면 수익의 일부도 아니고 금화 100개를 보장해 준다고 했답니다.”
금화 100개면, 전생으로 치면 1억 원쯤 되는 돈이었다. 판매 수익과 무관하게 보장하기에는 금액이 컸다.
“그래서, 답변은?”
“일단 마르탱이 관심 있는 것처럼 보여 놨다는데, 조건이 좀 좋아야죠. 동업하자는 곳 많다고, 얼른 결정하라고 재촉한답니다.”
“오히려 조건이 너무 좋으니까 아무나 덥석 물진 않을 수도 있어. 수상하잖아.”
“황성에서 장사하면서 그 정도로 분별없는 자가 있을 리는 없을 테니, 그쪽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 같긴 합니다. 어떡할까요, 수락해 보라고 할까요?”
“…독점하면 좋은데, 그건 불가능하겠지?”
“글쎄요, 그것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응. 일단 거래 수락할 것처럼 하면서 최대한 정보 빼내보라고 해.”
“마르탱 녀석에게 정말 안 어울리는 임무네요.”
“오히려 마르탱이 뻣뻣해서 의심 못 할 수도 있어.”
알렉스가 고지식한 부대장 마르탱을 떠올렸는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뭘까요, 그들이 유통하려는 게?”
“뭔가 황실에 타격 입힐 만한 거겠지.”
나는 ‘공제눈’에서의 에피소드 하나를 떠올리며 얼버무렸다.
알비누스에서 다른 상단들을 통해 유통하려는 것은 마기에 잠식된 약초, 베라초였다.
베라초는 본디 배탈에 효과가 있는 약초로, 말린 잎을 달여서 마시는 거라 평민들 사이에서 흔하게 쓰였다.
지금처럼 여름이 다가와서 식중독을 경계해야 하는 때면 물 대신에 베라초차를 마시기도 했다.
‘마치 보리차, 가시오갈피차처럼 말이지.’
귀족파는 그 베라초를 인위적으로 마기에 잠식시켜서 성내에 풀려는 거였다.
일종의 생화학 테러였다.
베라초는 본디 돌아올 수 없는 바다에서 한참 떨어진 노르타 산맥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 마기에 잠식될 일이 없다. 그걸 돌아올 수 없는 바다 근방에서 몰래 재배해서 인위적으로 마기에 노출한 거였다.
‘마법을 쓰면 기후도 적당히 맞출 수 있으니까. 기후 마법이 꽤 고급 마법이라지만….’
나는 알비누스 후작가를 위해 일하는 전대미문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를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거래는 무슨 거래야? 애초에 내가 원하는 걸 그가 들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멜리에게서 관심을 끊으라거나, 귀족파의 악행을 그만두라는 것들 말이다.
내가 그와 아멜리의 접점을 최대한 없애가고 있는데도, 원작의 억지 때문인지 착실히 아멜리에게 끌리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그가 내게 요구하는 건 이상하리만치 사소한 것들.’
원작에서 아멜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던 ‘매너 손 집착남’이 누구냐는 양, 그는 자꾸만 내게 물리적인 접촉을 요구했으니까.
그것이 손끝을 잡아본다는 정도여서 와중에도 이상했지만, 그게 어딘가 신성력으로 낯선 물건을 탐지하는 레베카의 진지한 모습과 닮아 있어서….
‘잠깐. 혹시 그가 알아본다는 게… 내 체질에 대한 건가?’
갑작스레 생각이 닿은 내용에, 나는 목덜미가 쭈뼛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신성력 감지만으로도 은신한 그림자 기사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인물이었으니….
“전하, 괜찮으세요? 안색이….”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내 낯이 하얗게 질렸는지, 소대장들이 내 낯을 살피며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아냐. 갑자기 다른 생각이 났어.”
내 수하들의 걱정 어린 낯에, 나는 재빨리 손사래 쳤다.
그러니까, 루시페우스는 내게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걸 빌미로 나를 겁박하려는 건지도 몰랐다.
‘연락한다는 것도, 남몰래 그런 내용을 이야기하려고….’
거기에 생각이 닿은 순간, 내가 그간 얼마나 순진하게 그를 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와, 매번 느끼는 거지만 태양제 때는 정말 사람이 많네요. 귀족파가 무슨 일을 벌이려면 이런 곳에서 벌여도 괜찮을 정도로요.”
“무슨 일이 나길 바라는 것처럼 말한다, 너?”
“그러지 않을 걸 아니까 하는 말이지, 대장님. 전하 앞에서 유난 좀 떨지 마.”
“네가 마차를 탄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악담을 하는 줄 알고 말이다.”
“그만들 해. 오늘은 정말 별일 없을 거라니까.”
나는 내 맞은편에서 으르렁대는 두 기사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어제부터 시작된 태양제 기간의 성내는 마차 안에서 보기에도 한껏 혼란스러웠다.
제국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태양절.
아수라마수라의 선조가 마계의 군대를 물리친 기념일인 만큼, 일종의 건국절로 기려졌다.
태양절 전후 보름씩, 무려 한 달간 이어지는 태양제는 대륙 최대의 축제 기간이었다.
태양절 이전 보름은 민간에서의 축제 기간, 이후 보름은 귀족들의 축제 기간. 그리고 황성 저잣거리는 그와 무관하게 태양제 한 달 내내 북적였다.
태양제의 여흥이 모두 황성에 몰려 있기에 상경한 이들이 수많기 때문이었다.
그 복잡한 날에 나온 탓에 한껏 예민해진 케인 앞에서, 그의 부소대장인 데릭이 제멋대로 떠들고 있는 거였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한껏 냉랭해졌다.
“앞으로는 태양제 때 나올 일 없을 거니까, 오늘 한 번만 경들이 애써 줘.”
“전하께서 못 가실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데릭, 이 녀석 말본새가 말입니다.”
“예에, 대장님. 제가 말로 재앙을 부르는 능력이 없길 바라겠습니다.”
“그만 좀 해, 경들.”
나는 형제 같은 두 기사가 내 앞에서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며 핀잔주었다.
‘신경이 곤두설 법도 하지…. 황성이 가장 붐비는 때에 황실의 과보호를 받는 유리 세공품을 달고 나왔으니까.’
이 복잡한 날에 저잣거리에 나온 것은… 단연코 레오폴트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저잣거리에서 좋아하시던 게 뭐가 있었죠? 그 밀전병에 초콜릿 넣은 것도 좋아하시죠?”
아멜리와 함께 온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며칠 뒤, 레오폴트는 따로 한 번 더 나를 찾아왔다.
‘태양제 저잣거리 즐기는 법은 사용인들에게 물어보면 되지만, 제 연인 입맛 저격하는 법은 알 수 없으니 그런 게지.’
아멜리가 티타임 때마다 내가 준비한 디저트들을 좋아하는 걸 보며, 저잣거리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내게 조언을 구하려고 온 것이었다.
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나야 뿌듯한 일이니까.
나는 기꺼이 아멜리의 입맛에 맞을 법한, 대도시의 자극적인 군것질거리들을 뽑아주었다.
“네가 말한 건 크레이프라는 건데, 저번에 보니까 로즈버리 영애는 무슨 음식에든 생크림 올린 걸 좋아하더라고. 딸기 절임과 생크림 함께 들어간 게 어떨까?”
“좀 달지 않을까요?”
“로즈버리 영애가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그때 봤잖아?”
레오폴트는 납득이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멜리가 좋아하는 거 뻔히 봤으면서?’
역시 전개가 고구마가 아니라 남주의 성향이 고구마였던 걸까…?
“그거 말고도 밀가루 반죽을 길게 튀긴 게 있어. 거기 설탕 뿌려서 뜨겁게 녹인 초콜릿에 찍어 먹는 건데, 추로스라고. 그것도 좋아할 거고…. 또 와플 알지? 거기에 캐러멜 시럽 뿌린 것도 좋을 거야.”
레오폴트는 필기만 안 했다뿐이지 내가 말하는 것을 모두 외울 기세로 집중했다.
“하나같이 단거…네요? 이러면 몸에 안 좋을 텐데.”
“저번에 로즈버리 영애가, 디저트는 안 달면 범죄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 안 단 건 쳐다도 안 보는 거 봤잖아?”
“그냥 뭘 드시는 게 보기만 해도 배불러서….”
뭘 드시는지까지는 잘…. 레오폴트는 거기서 제 연인을 상상했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레오, 관찰은 연애의 기본이야. 네가 좋아하는 걸 소개해주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만, 상대가 좋아하는 게 무언지 평소에 잘 살펴서 기억해두면 더 좋잖아.”
“그래도 아무래도 건강을 생각하면 걱정이….”
“레오.”
그렇구나. 남주의 성향이 고구마였던 거였구나.
나는 흐린 눈으로 레오폴트를 바라보았다.
“일단 외워. 네 의견 따윈 필요 없어.”
그렇게 레오폴트에게 아멜리의 입맛에 맞는 군것질거리들을 입력하고 났더니, 나 또한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진 것이었다.
마침 성내에 나올 일도 있겠다, 그게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데이트하는 것과 같은 날이겠다.
‘마주치면 좋겠다. 뭐, 아니라도 간식거리로 이것저것 사 가면… 렌틸 자작은 흥미로워할 테고, 스칼렛은… 표정 볼만하겠지.’
나는 내 오랜 스승의 학구적인 면모와 더불어, 언제나처럼 그 고운 미간을 찌푸릴 스칼렛을 떠올리며 속으로 짓궂게 웃었다.
내가 오늘 성내에 나온 진짜 이유는, 드디어 스칼렛과 렌틸 자작이 상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칼렛, 그 아이와 한번 만남을 주선해 주세요. 제가 학자의 탑 불문율을 깨고 제국 정치에 뛰어드는 계기가 어떤 아이인지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렌틸 자작은 이번 태양절 연회를 계기 삼아 정계에 뛰어들 예정으로, 결심을 굳히기 위해 스칼렛을 만나보겠다는 것이었다.
‘황궁에서 만나면 아무래도 누군가에게는 들킬 테니, 내가 섭외해둔 안전가옥에서 만나기로 했지. 두 사람은 내 히든카드니까.’
귀족파의 음모는 대부분 알비누스의 손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어쨌든 그들의 우두머리는 게이블스였다.
게이블스가 후계자 문제로 혼란에 빠지면 귀족파 또한 혼란에 빠질 테니, 그 또한 올해의 위기를 막을 방편이 될 수 있을 거였다.
‘게이블스의 미래가 달려 있는데, 황실에 대한 반항이며 음모가 다 무슨 소용이겠어?’
그러니까 지금, 여러모로 중요한 그녀들의 만남을 앞둔 거였다.
‘그런 중요한 날인데, 레오폴트와 아멜리가 행복하게 만나는 모습을 보면 더 자신감이 생길 것 같고 말이지!’
내 도움으로 훨씬 행복해진 두 사람을 보면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루시페우스 쪽은 내 마음대로 안 되지만, 게이블스 일이라도 내 계획대로 된다면 절반 이상의 수확일 거였다.
나는 군것질거리에 대한 탐욕을 그렇게 적당히 합리화하였다.
“저와 데릭이 곁에 있겠지만 어찌 될지 모르니, 말씀하신 대로 딱 크레이프랑 문어볼만 사서 가시는 겁니다?”
“커스터드 크림빵도.”
“네네, 아무튼 저나 데릭과 상의하시지 않은 행동은 삼가시고요.”
“경, 아무리 긴장했어도…. 내가 얼마 안 있으면 10년째 경의 주군인 것까지 까먹은 건 아니지?”
“너무 걱정돼서 그렇죠. 데릭 말마따나 무슨 일을 꾸리려면 정말 딱인 공간이니….”
“정말로 오늘은 별일 없을 거야. 걱정 마.”
태양제 기간 동안 성내에서 생길 일이라 봐야, 베라초 유통밖에 없으니까.
“전하의 판단을 못 믿는 건 아니라도 불안한 건 불안한 겁니다.”
“경들 말고 그림자들도 있잖아. 상황 말고, 경들의 실력을 믿어.”
“그게 말만큼 쉬운 일이라야 말이죠….”
케인은 내가 내비친 신뢰에 멋쩍은 듯하면서도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에스메르 상단 건물에 마차를 대어두고서 저잣거리에 나오니, 과연 온통 사람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전생에도 이런 인파는 벚꽃 철이나 불꽃놀이 때나 봤을 정도였다.
‘정말 복잡하네. 데릭 말마따나, 귀족파에서 무슨 일을 일으켜도 꼼짝없이 휘말릴 만큼.’
하지만 원작에서 이번 태양제 때 별다른 사건이 없었으니까.
‘…루시페우스도 잠잠하고 말이야.’
그렇게 손거울을 들고 다니라고 단단히 을러둔 것치고, 그에게서는 그 이후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뭐. 따, 딱히 기다린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