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78화 (78/220)

78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2)

‘‘신성력의 끌림’이라던가. 비슷한 재질의 신성력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끌리게 된다는.’

혈연이 짙을수록 적은 양의 신성력으로도 서로 감응하였고, 반대로 신성력 보유량이 매우 크다면 혈연이 옅어도 본능적인 끌림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과하게 끌린다면, 잃어버린 가족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속설도 있다고 했다.

“사실 제 머리 색도 눈 색도 아버지와 하나도 닮은 게 없어서, 어려서부터 의아하긴 했거든요….”

“밀리의 아버지께서는 짙푸른색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갖고 있으시다고 해요.”

레오폴트가 재빨리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멜리는 분홍색 머리칼에 연파랑 눈동자. 어떻게 조합해도 나오기 힘들긴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빠짐없이 사랑해 주셔서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제게 친부가 따로 있으셨던 거지요.”

“그걸 그 팔찌 덕분에 알게 되었고?”

“네, 저는 그저 수도에 있으시다는 어머니의 옛 지인분을 찾아간 거였는데 말이에요.”

옛 지인이 아니라 옛 연인이었던 거지.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더없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아멜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 최애 여주의 목소리로 내가 잘 해낸 일에 대해 듣는데, 흥미롭지 않을 리가.

“쑥스럽지만, 타인의 호감을 이끄는 미신이 있다길래 어머니의 지인분께 잘 보이고 싶어서 하고 갔던 거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팔찌에서 소리가 나면서 빛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랐겠다.”

“그리고 저와 후작님을 향해 빛이 쏘아지는데….”

“어머, 어머.”

인연 팔찌의 효과는 나로서도 완전히 처음 듣는 것이어서, 나는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 대꾸했다.

“후작이라면, 영애의 친부가.”

“에이든 힐베르크, 현 힐베르크 후작가의 가주 되십니다.”

“힐베르크 후작이라. 그는 분명 교단에….”

“네, 귀의하시기 전에… 저희 어머님과 꽤 친밀하신 관계셨던 모양이에요.”

그리 말하는 아멜리의 낯이 수줍음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친밀하다는 것은 굉장히 에두른 표현이었으니까.

“축하할 일이지, 영애?”

나는 아멜리의 낯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오지랖 부려서 감정선 엉킨 거 아니지?’

몇 달은 뒤에 일어났을 일이 내 개입으로 훨씬 빨리 성사된 것이라 혹시나 싶은 것이었다.

“그럼요!”

다행히도 아멜리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직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후작님께서 아주 다정하신 분인 것 같아서 좋아요. 제 아버지… 로즈버리 남작님이야 제게 최고의 아버지고요. 좋은 아버지가 둘이나 되니, 저는 정말 행운아예요.”

아멜리의 낯이 다시금 홍조로 발갛게 물들었다.

거기에 비친 기색이 정말로 행복 그 자체여서, 보는 나도 마음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레오폴트 또한, 아멜리의 해사한 낯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흑막도 홀린 여주의 감화력이겠지.’

한편으로는 이번 생에 만난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아멜리의 행운을 축하하기보다 부러워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 같단 생각도….

“정말 감사해요, 전하.”

아멜리가 꼭꼭 힘주어 말하는 것에, 나는 잠시간 잠겨 들었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팔찌 선물해주신 것도 그렇고, 말고도…. 전하께서 이렇게 저를 친근히 대해주시는 것부터가 제겐 큰 힘인걸요.”

나는 거기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미소만 지어 보였다.

내가 아멜리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고부터, 아멜리의 사교계 생활이 조금 편해졌을 테니까.

“저도 감사드려요, 전하.”

옆에서 흐뭇한 낯으로 지켜보고 있던 레오폴트도 장난스레 한마디를 덧붙였다.

‘얘 좋아하는 거 봐.’

그것이 조금 놀려주고 싶어져서, 나는 새초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별말씀을, 레오폴트 경. 경을 위해서 한 일은 아니니 내가 선을 넘을까 봐 걱정할 거 없어.”

“거, 걱정이라뇨, 전하!”

애칭 같은 거 함부로 안 부를 테니까 말이야. 내 능청스러운 말소리에, 레오폴트가 아멜리의 눈치를 살피며 펄쩍 뛰었다.

힐베르크 후작가의 일이 널리 알려졌으니, 나는 곧바로 암조의 간부들을 불러들여 그간의 사항들을 보고받기로 했다.

“힐베르크 후작 쪽 움직임은 어때?”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은 로즈버리 영애를 후작저로 들이려는지 저택 내부 공사를 진행한다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내 질문에 엘런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리나가 아멜리를 비밀리에 호위한 김에, 리나가 속한 엘런의 2소대에 힐베르크 후작가의 동태를 살피라 맡긴 참이었다.

“아까 레오랑 그 영애가 다녀갔는데, 아직 신전 명부에 등록하지 못하니 우선은 손님으로 후작저에 들어가기로 했다더라고.”

“역시 그렇군요. 케인, 섭섭하겠네.”

엘런이 테이블 너머의 케인을 바라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좋은 일인데, 뭐. 나도 이제 집 넓게 쓰고, 잘됐지.”

제가 모시던 아가씨에 대한 일을 암조 회의를 통해 논하게 되었지만, 처음과 달리 케인은 그다지 꺼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실제로 귀족파의 일에 로즈버리 남작가가 번번이 얽히니 케인도 심상찮음을 느낀 지 오래인 것이었다.

“이사는 언제래?”

“이번 주 안에 옮기실 것 같아요.”

“빠르네. 이사 마치고 나면 후작도 사교계에 얼굴 비추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원작에서는 아멜리의 이사도 꽤 순탄치 못했다.

신성력이 감응하다 보니 자꾸 마음이 쓰여서, 후작이 아멜리에게 제 저택에 머물러도 된다고 호의를 베풀었지만… 아멜리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과 달리 첫 만남에 후작이 친부인 걸 몰랐으니까.’

무엇보다 3구역 음침한 동네에 사는 니콜슨과 케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후작의 제안을 거절했더랬다.

‘역시 마음씨 고운 내 여주님.’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과 더 빨리 돈독해진다면, 힐베르크 후작도 한시라도 더 빨리 세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리라.

‘그리고 적당한 타이밍에, 성상 가져가서 힐베르크의 반지를 돌려받으면 아멜리도 남부러울 것 없는 소후작이 되는 거지.’

나는 내 침실 장식장 위에 올려 둔 대천사의 성상을 떠올리며 속으로 쿡쿡 웃었다.

루시페우스에게 핑계 댄 대로, 에스메르 상단주에 빙의하여 성의 있게 보관해둔 것이었다.

“후작저는 계속해서 지켜볼까요?”

“그래야지. 지금은 누가 맡고 있어?”

“로니랑 페터가 돌아가면서 살피고 있습니다. 후작저가 규모에 비해 살림이 단출해서, 사용인 수도 꽤 적다고 해요.”

엘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첫사랑, 그러니까 아멜리의 어머니만을 사랑한 후작은 환속한 뒤에도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후계자도 없어, 후작가의 살림을 보전할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로판 등장인물답게 일편단심이시고. 부모 형제, 친척 다 잃었으니 그럴 의지도 없었겠고.’

이제 그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 생겼으니, 열심히 세력을 일궈줘야만 했다.

“힐베르크 후작이 조만간 황실파로 돌아설 거야. 아니, 돌아서게 해야 해.”

“네?”

“요즘 리나가 하는 일, 다들 대충 알고 있지?”

“네, 전하께 보고드리는 정도는 제게도, 뭐….”

엘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케인에게는 애초에 리나를 아멜리에게 붙이면서 양해를 구한 바가 있었고, 알렉스는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3소대장으로서 대강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로즈버리 영애가 가는 곳마다 귀족파가 말썽이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조사를 해봤어.”

“네, 가는 곳마다 그… 알비누스의 차남이 나타난다고, 이상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 말하는 엘런의 눈동자가 알렉스 쪽을 향했다. 두 사람 다 대놓고 어떤 표정을 짓진 않았지만, 서로 눈빛으로 말을 주고받는 게 빤했다.

‘얘네, 진짜.’

안 그래도 얘들이 나랑 못 엮어서 난리인데, 지난번 경매장에서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암조 기강 이대로 괜찮은가.

‘내가 너무 자애롭나. 엄할 땐 엄하게 굴었어야 했나.’

지금 와서 소용없는 반성을 늘어놓다 보니, 하릴없이 경매장에서의 일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내 얼굴을 쓸어내리던 손짓….

마치 사람의 살갗이라곤 처음 만져보는 것처럼 굉장히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하필 알렉스 보는 앞에서 그래서.’

그 손거울 들고 다니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할 거면, 그거 통해서 이야기하든가.

‘연락도 않더만… 핫.’

아니, 이건 딱히 그의 메시지를 내가 기다려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인지 모를 변명을 하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래서, 로즈버리령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으응, 헨리에테 덕분에 찾았어.”

그때 헨리에테가 눈치 좋게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세 사람에게 건넸다. 내게는 이미 구두로 보고한 내용이었다.

“선황 폐하 시절에 로즈버리령의 탄광이 꽤 유명했던 모양이야.”

“그 시절에 이미 폐쇄되지 않았던가요?”

엘런의 지적에 로즈버리령 출신인 케인이 고개를 맞장구치듯 끄덕였다.

“탄광 내부가 문제야. 그 안에 수정 광산이 있을 거라는 진단이 있어서, 선황 폐하께서 로즈버령을 보호하려고 하셨던 모양이야.”

“수정 광산요? 탄광 규모가 꽤 크기는 했으니….”

케인이 고향을 추억하는 듯 읊조렸다.

“그만한 수정 광산이 새로 개발된다면 여러 가문에서 수작을 부릴 게 너무 자명했던 거지.”

“…로즈버리처럼 힘없는 영지는 버틸 수 없었겠고요.”

“그래서 선황 폐하께서 공표하지 않으셨는데, 정보가 새 나갔나 봐. 로즈버리 파산하게 하려고 야금야금 노력한 거 보면 말이야.”

선황의 비호에 내어놓고 공략하진 못했을 테고 말이다.

대신 여러 한미한 가문을 시켜 로즈버리의 재산을 유출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로즈버리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꽃뱀 사기꾼까지 파견한 거고.

‘그게 다는 아니겠지….’

한 영지의 경제에 영향을 끼칠 방법은 다양하니까.

다만 ‘공제눈’에 서술된 내용이 아니라 내가 몰랐고, 이를 상상조차 못 할 로즈버리 남작가가 파악하고 있을 리 또한 만무한 게 문제였다.

“로즈버리령의 재정 상황을 알아보고, 혹시 폐광 쪽에 불온한 움직임이 없는지 알아봐야 해.”

그리 일단락하고서 나는 눈동자를 굴려 세 소대장의 낯을 살폈다.

“케인 경, 1소대에서 맡아줘. 경이 로즈버리령 출신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 2소대에선 리나가 파견 다녀왔으니까. 알렉스도 마탑 다녀왔고.”

“알겠습니다.”

“경이 직접 다녀와도 괜찮고. 일단 태양제 기간은 지나고서.”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저로 들어가니, 당분간 케인이 자리를 비워도 문제없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상의하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좋아. 또 다른 내용 있을까?”

내내 잠자코 있던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저, 에스메르 상단 쪽으로 입질이 왔습니다.”

“…역시.”

에스메르 상단의 일은 알렉스의 3소대 담당이었다.

암조의 기사 모두가 메르제령에서 만든 가짜 신분을 갖고 상단에 소속돼 있지만, 유령 회사다 보니 행정 업무가 많아 3소대에서 관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의 부대장인 마르탱이 상단의 황성 지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반응이 왔다는 소식이었다.

“알비누스 상단에서 온 거지?”

“네. 돈세탁에 활용할 희생양을 찾으려는 것 같다는 게 마르탱의 감상입니다.”

알렉스의 답을 들으며 케인과 엘런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일전에 내가 알비누스가 다른 상단을 통해 일을 벌일 거라고 한 일을 떠올린 것이 분명했다.

‘또 저들끼리 나를 추켜세우려는 모양이지.’

내가 원작 내용을 알아서 맞힌 거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쑥스러움을 감춘 채, 나는 알렉스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쪽에서 뭐라고 하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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