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와 그녀의 만유인력 (1)
대천사의 성상을 손에 넣고 며칠 뒤. 동시에, 루시페우스와의 묘한 조우가 있고서 며칠 뒤.
“전하, 힐베르크 후작가 아시죠?”
젊은 시녀들이 내 단장을 돕는 걸 지켜보던 패티샤가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구나.
“으응, 그… 저번 대(代) 성녀가 환속한 가문이지?”
“네, 대신 신관이 됐던 둘째 아들이 지금 후작위를 이었잖아요?”
“응, 그랬댔지. 신관 출신이어서 그런지 정계 활동도 안 하고, 후사도 없어서 곧 영지도 회수하게 생겼다고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가문.”
나는 패티샤가 이야기를 꺼내기 쉽게끔, 일부러 화두를 그쪽으로 꺼내주었다.
“네에, 그런데 그 후계자가 나타나 버렸지 뭐예요?”
“후계자? 지금 후작의 형인 선대 후작도 후사 없이 죽었다던데….”
“지금 후작이 귀의하기 전에 본 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진짜?”
나는 온 얼굴로 깜짝 놀랐음을 표현해 주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네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 딸이, 무려 전하께서도 아시는 분이에요.”
“…내가 아는 영애가 한둘인가?”
“그런데 집무실에까지 불러서 개인적으로 만난 영애는 없으시잖아요?”
“개인적으로 만난 영애…? 스칼렛일 리는 없으니….”
“네에, 아우렌바흐 소공작님 연인이신 그 레이디요.”
“어머, 맙소사.”
잔뜩 놀란 표정을 짓는 내 모습이, 거울로 보아도 그럴싸해 보였다.
‘계획대로 잘돼가고 있네.’
아멜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없이 힐베르크 후작가에 방문할 수 있도록 다과회를 연 게 열흘쯤 전의 일이었는데.
‘암조 보고로는 신전에서 혈연관계를 확인받은 게 지난주라고 했지. 내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면, 황성 사교계엔 지금쯤 소문이 아주 파다하게 퍼져 있다는 거고.’
힐베르크 후작이 아직 인장 반지를 되찾기 전이라 정식으로 입적시키지는 못했겠지만, 신전에서 인정받은 이야기가 빠르게 퍼진 모양이었다.
“이제 힐베르크 후작님도 슬슬 사교계에 얼굴 비추기 시작하시겠어요.”
“그러셔야겠지. 후계자 생겼으니 가문도 다시 돌보셔야 할 테고.”
“젊었을 때 그리 인기가 좋으셨다던데.”
“교단에 귀의하실 수밖에 없어서, 다들 멀리서 바라만 보던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바깥에서 손을 보시고….”
젊은 시녀들이 음흉한 눈빛을 하려 하자, 패티샤가 시녀들을 단속하듯 중얼거렸다.
“그 아가씨가 스물셋이랬으니,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네.”
힐베르크 후작가는 귀족 사회에서 굉장히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무려 여주의 친부 가문인데 평범하면 안 되지.’
간단히 말해 아멜리의 할머니는 성녀였다.
신탁의 아이로서 교단에 의탁하여 자랐는데, 힐베르크 후작의 아버지인 선선대 후작과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여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환속하는 대신, 자식을 교단에 바치겠다는 맹세를 했다.
그 증명으로 건 것이 황실에서 영지를 하사할 때 함께 준, 귀족 신분을 증명하는 힐베르크령의 반지.
성녀는 그 반지에 자신의 신성력을 일정량 봉인하여 대신전에 보관하였고, 약속의 증거로 대신전에서 준 것이 내가 이번에 입수한 대천사의 성상이었다.
성녀의 자식이면 그에 준하는 신성력을 타고났으리란 계산이었는데, 아쉽게도 두 아들 모두 특출난 신성력을 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신성력이 많은 둘째, 아멜리의 친부가 교단에 귀의했지만, 하급 신관에 그쳐 반지를 돌려받지 못했다.
‘성녀의 아들이니 대신관급은 될 줄 알고 고위 신관만 접근할 수 있는 보물고에 두었다나 뭐라나.’
어디까지나 반지는 일종의 신분증에 불과한 데다, 성상이 있으니 언제든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이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갑작스레 힐베르크에 악재가 둘이나 겹친 것이 문제였다.
마차 사고로 성녀 부부, 그러니까 성녀와 당대 힐베르크 후작이 죽으면서 인장 반지를 잃어버렸고, 갑작스러운 가주의 죽음으로 혼란한 사이 저택에 도적이 침입해 대천사의 성상을 훔쳐 가고 만 것이다.
‘인장 반지를 다시 제작할 방법이 영영 사라진 거지. 코코 에스메르가 없었다면 말이야.’
나는 마음속으로 세실리아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는 상상을 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럼 원로원에도 다시 등청하시려나요?”
“아무래도 그러지 않으실까? 그, 저주… 때문에 대가 곧 끊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방계도 어쩌다가 다 일찍 죽어서.”
“어떻게 후계자가 구해졌네요….”
시녀들이 저마다 생각에 잠겼는지, 나를 치장하던 손길이 잠시 느릿해졌다.
‘저주는 무슨, 분명 무슨 음모가 있는 거지.’
성녀 부부가 죽고, 현 후작의 형이었던 선대 후작도 요절한 데다 방계도 대부분 죽거나 실종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성녀의 저주라고 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일련의 사건은 귀족파 어느 가문의 소행일 거였다.
‘힐베르크가 중립파긴 하지만, 교단과 황실이 밀접한 만큼 황실파 쪽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으니까. 10년이 다 돼가는 일이라 증거를 찾는 게 쉽지 않지만….’
이것만 확실해진다면 힐베르크 후작이 황실파에 편입되어, 훗날 황실파의 수장이 될 레오폴트에게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우선은 아멜리가 친자로 입적해야 하니까, 인장 반지 되찾도록 조만간 힐베르크에 선물 보내드려야겠네.’
적당한 타이밍을 잘 골라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우렌바흐 소공작 오실 때 그 영애도 오신다고 했죠?”
“직접 얘기 들어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 이야기를 전하께 직접 전하러 오는 걸까요? 전하께서 편의를 종종 봐주셨잖아요.”
“으응, 그러려나? 기대되네.”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내 시녀들의 기대감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저 팔불출, 또 시작이다.’
나는 저 멀리서 들어오고 있는 레오폴트와 아멜리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뻔히 기다리는 걸 알면서, 레오폴트는 내 온실이 초행인 아멜리에게 구경을 시켜 준답시고 느려 터진 발걸음으로 이곳저곳 구경하며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무엄한 일이었지만….’
나는 흐뭇한 마음 반, 저 형제 같은 친우가 밸도 없이 구는 게 한심한 마음 반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제국의 작은 별을 뵙습니다. 아름다운 온실에 초대해 주심에 감사드려요. 아무나 못 오는 곳이라니, 평생의 영광입니다.”
“잘 지내셨죠, 전하?”
“어서 와, 로즈버리 영애. 레오폴트 경도 오랜만이네.”
나의 뼈 있는 한마디에 레오폴트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던 레오폴트였는데, 오늘은 몇 주 전에 아멜리와 같이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짬 나면 아멜리 보러 달려가나 보지.’
그새 사이가 더 깊어진 건지,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 친밀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새 연인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지. 나한테 보고도 않고 말이야.’
나는 흐뭇한 마음을 새침한 미소 아래 감추며, 온실 안쪽에 차려진 다과상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내가 온실에서 사람들을 맞을 때면 늘 그러하듯 시녀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 아멜리에게도 마음 편한 자리일 거였다.
오늘도 다과상은 한 상 가득 다디단 디저트의 향연이었다.
“지난번에 영애가 마음에 들어 했던 것들 위주로 차려보았어. 마음껏 들어.”
“케인 통해서 보내주신 것들도 잘 먹었는데요. 황송합니다, 전하.”
오늘도 상에 차려진 디저트를 보는 아멜리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지난번과 달리 나란히 앉을 수 있어서인지 레오폴트는 넋 놓고 아멜리가 디저트를 즐기는 모습을 관찰했다.
‘내가 쟤들 연애하는 거 기다린 사람 아니었으면, 저거 무례하다고 화냈을 거야.’
나는 속으로 레오폴트에게 눈을 흘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셋의 티타임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아멜리가 일전에 리나를 마주친 일로 나를 경계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리나가 공무 수행 중이었다며 둘러댔다더니, 잘 먹힌 모양이었다.
“전하, 다음 주부터 성내에 태양제 장터 열리는 거 아시죠?”
“응, 그러고 보니 태양제가 정말 곧이네.”
아수라마수라의 선조가 마계의 군대를 물리친 기념일, 태양절.
그 전후로 치러지는 태양제 기간 동안 귀족파의 다양한 음모가 펼쳐질 예정이라, 나도 암조도 긴장 상태였다.
내 가라앉은 눈빛의 의미도 모른 채 레오폴트가 해맑게 물었다.
“혹시 가보셨어요?”
“내가 어디 나가는 거 봤니? 그건 왜?”
“저는 이번에 밀리랑 축제 장터도 가고 밤에 퍼레이드도 보려고요.”
오호, 저잣거리 데이트 간다고 자랑이구나.
원작에서는 이때쯤에 둘이 마음만 있고 데면데면한 관계라, 태양제 기간 내내 단둘이 만나는 이벤트가 없었다.
그런데 내 도움으로 관계가 급진전되었으니 벌써 데이트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레오폴트도 어렸을 때 병약했으니 나랑 다닌 것 말고는 밖에 다닌 적이 없을 텐데…?
“경도 초행 아니야? 로즈버리 영애랑 같이 가는데 어설프게 굴면 어째.”
“…저택 사용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 처음 가본 티 안 나고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 말하며 레오폴트는 아멜리를 향해 수줍게 웃어 보였다. 아멜리는 그도 좋다고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저들끼리 좋다면야, 뭐.’
내가 과일차를 홀짝이며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흘끔댈 때였다.
“전하, 오늘 제가 레오폴트 경을 졸라 전하를 뵙길 청한 것은… 감사드릴 일이 있어서예요.”
그리 말하며 아멜리가 레오폴트에게 눈짓했다. 그러는 양에서도 두 사람이 더욱 친밀해졌음이 확연해 다시금 뿌듯해졌다.
레오폴트가 대신 내민 상자를 열자, 아기자기하게 수놓인 실크 손수건이 나타났다.
“어머, 이 손수건은 혹시.”
“미욱하나마 제가 가진 재주가 이것뿐이라….”
“정말로 영애가 수놓은 거야? 고마워!”
“전하께는 더 아름다운 것들이 더 많으시겠지만요….”
“무슨 소리야, 영애가 만들어준 건 나한테 이것밖에 없는걸. 정말 고마워, 영애.”
나는 행복 한가득한 마음으로 손수건을 쓸어 보았다.
‘계 탔다!’
레오폴트와 친구가 된 이래로 나는 계 탄 덕후가 되었지만, 오늘 티타임도 최애 커플과의 자리니 계 탄 것이었지만, 아무튼 아멜리에게서 선물을 받다니!
내가 너무도 환한 낯으로 그걸 받았을까? 어느새 레오폴트의 입술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밀리, 저도 손수건 필요합니다.”
“손수건 많으시잖아요.”
“밀리가 수놓아 준 손수건은 없습니다.”
“다른 때 선물해 드릴게요. 전하께는 제가 정말 큰 은혜를 입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전하를 상대로 질투해봐야 좋을 것 없어요, 레오.”
“큰 은혜?”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듣고 있던 내가 의미심장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았지만.
“전하께서 일전에 제게 선물해주신 팔찌 말이에요.”
“응응, 그 팔찌.”
“혹시 거기에 다른 기능이 있는 것… 아셨어요?”
“다른 기능? 기능이랄 게 있나? 그냥 미신 같은 거 아니야?”
나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무 잘 알았지만….
“그 팔찌에 혈연관계를 감지하는 기능이 있던 모양이에요.”
“어머, 그래?”
나는 짐작도 못 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생각해도 좀 가증스러웠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그 덕분에 제가 제 친부를 찾게 되었답니다.”
“친부? 영애는 분명 로즈버리의….”
“네, 로즈버리 남작의 딸이지요. 저도 제가 아버지의 친딸인 줄 알았는데… 제 친부께서도 제가 있는 줄 전혀 모르고 계셨고요.”
“맙소사. 그럼 둘 다 상상도 못 했겠어.”
“네, 그런데 어쩐지 처음 뵈었을 때부터 오랫동안 알았던 분처럼 꽤 친근하게 느껴지긴 했어요.”
아멜리의 눈빛이 꿈꾸는 듯이 아련해졌다.
하긴, 신성력에 그런 특성이 있다고 했지. 서로 알게 모르게 끌리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