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11)
“거래요.”
이르겐트에서 마주쳤을 때, 내 상단과 거래할 거리가 있을지 고민해 보겠다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리나는 그걸 두고 나와 어떻게든 연락하기 위한 수작이라는 듯이 말했지만, 귀족파에서 행할 일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꺼림칙할 뿐이었다.
‘당장 태양제 때만 해도 마기에 오염된 베라초를 저잣거리에 풀어서 황실에 타격을 입힐 예정인데….’
그는 상단의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것처럼 말하기야 했지만.
나는 미심쩍다는 눈초리로 그의 낯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옷차림은 이르겐트에서 마주쳤을 때와 달리 신경 써서 입은 차림새였다.
고급 경매장에 맞춰 격식을 차린 걸까. 아니면….
‘아멜리와 연관된 일을 처리한답시고 경건하게 차려입은 건 아닐까? 아멜리와 힐베르크 후작의 관계에 대해서 아직 알진 못하겠지만….’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내 마음에 깃든 것은 약간의 심술이었다.
‘그렇게 접점을 없앴는데도 착실히 아멜리에게 끌리는 걸 보면 역시… 원작의 억지력인가.’
거기서 깃들고 마는 무력감.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이 세계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다는 허탈함….
그래서 이런 심술이 나는 것 아닐까.
그 불쾌감에 내가 미간을 슬며시 찌푸릴 때였다.
“이런 건 어떠실까요.”
그리 말한 루시페우스는 무언가를 계산하듯이 시선을 내 뒤편 어딘가로 떨어뜨렸다.
“아까 저희가 입찰 경쟁을 벌인 물건이 하나 있는데. 혹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대천사의 성상 이야기구나.
‘수정 관련된 것은 얘기할 상황이 아닐 테고.’
그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해 머리를 바쁘게 굴리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셨나요? 어떤 거였을까…. 경매장 구경이 너무 재밌어서, 오늘 낙찰받은 게 한두 개가 아닌 거 있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능청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아차, 조금도 놀라지 않은 게 미심쩍게 느껴지려나.
“뭔진 몰라도, 정말 대단한 우연이네요!”
내 급조된 연기를 살피던 루시페우스의 입가가 조금… 씰룩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만 웃는데. 왜 웃지 않는 신사님이라고 했지, 아멜리는?’
‘공제눈’ 작가, 알고 보면 루시페우스가 영 손이 안 가는 캐릭터기라도 했던 걸까…?
원작의 불확실한 서술 때문에 내가 여러모로 삽질하고 있는 걸 생각하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시금 찌푸려지는 미간.
“열여덟 번째 경매품으로 나왔던 대천사의 성상 말입니다.”
“아아, 그거요. 대리석으로 된 성상을 하나 장만하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나온 걸 보고 운명이다 싶어서 입찰해 버렸네요?”
제가 3세기 양식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나는 천연덕스럽게 급조해낸 핑계를 읊었다.
내 말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루시페우스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서 내 낯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안경 너머 다갈색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언젠가 보았던 붉은빛으로 빛나는 듯한 착시가 일었을 때.
“그러셨군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나직한 말투가 어쩐지 나긋나긋했다면 착각이겠지…?
그가 내 말을 믿었는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무릎에 올려둔 양손을 꼭 쥔 채 그의 낯을 흘끗대었다.
“그 성상, 제 아버지께서 오래간 찾으시던 것이어서 오늘 심부름을 온 참이었거든요.”
“어머, 그러셨군요? 그런데 마지막 입찰액을 보면…. 경의 아버님께서 예산을 넉넉하게 주지는 않으셨나 본데요.”
나는 혼신을 다해 호들갑을 떨어 보였다.
그런 나를 올려다보는 루시페우스의 입꼬리가 조금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았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퍽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성사했어야 하는 일이었던지라.”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가 고개를 떨구어 바닥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입술을 꾹 깨문 듯도 했다.
분노를 삭이기라도 하는 건가…?
‘원작에서는 입찰 경쟁이 안 붙어서 훨씬 낮은 금액에 낙찰받았던 모양이지.’
나는 작은 승리감에 속으로 후후 웃었다.
“아버지께 크게 혼날 상황이 돼서, 제가 곤란해지고 말았습니다.”
“죄송하게 됐네요. 제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혹시 제게 그걸 넘기라고 하신다거나, 그럴 작정이신 건 아니지요?”
무언가를 계산하듯 살포시 내리깔렸던 그의 눈동자가 와락, 내게로 향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으시겠죠?”
“유감스럽게도요.”
“제게 지신 빚을 그것으로 갈음하실 생각도 없으시겠고요.”
“제가 경께 빚을 졌나요? 혹여 그렇더라도 오늘 막 큰돈에 낙찰받아서 신나던 차인데, 그럴 리가요.”
금화 1500개는 내게도 만만한 돈이 아니었다. 오늘 낙찰액을 수표로 지불한 뒤에 그레이스의 지원금, 내 내탕금, 암조 예산 등 여러 곳에서 야금야금 끌어와야 할 만큼.
‘다른 것까지 합치면 거의 금화 4000개. 평소에 돈 안 쓰던 내가 이렇게 큰돈을 쓰면 수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나는 여유로운 얼굴로 루시페우스를 바라보았다.
“몇 배를 드린대도 말이죠.”
재차 묻는 그의 목소리는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것처럼 울렸다.
“열 배, 아니 스무 배를 제안하신다 해도요.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성상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서요.”
“역시 그러시군요.”
그의 체념한 듯한 낯에, 나는 퍽 기분이 좋아졌다.
“더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전하께서는.”
내가 대화를 끝내려는 기색을 보이자, 내 에스메르 상단주 행세에 장단을 맞춰주던 그가 다소 긴박하게 나를 불렀다.
잘 빚어 놓은 도자기 같은 그의 낯에서, 다급한 기색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아까도 그렇고…. 번번이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나, 딱히 할 말은 없었는지 그의 입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
내가 시치미를 떼자 그가 그제야 나를 ‘전하’라 불렀단 사실을 깨달은 듯,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에스메르 양과 4황녀 전하께서 닮은 구석이 있으셔서요. 저를 곤란하게 하시는 게.”
“그런가요? 몰랐군요.”
“제가 개인적으로 그분과 교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역시 몰랐던 일이고요.”
“…그러시겠지만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말소리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그와 대화를 이어갈수록 아리송한 감정에 휘말리는 것 같았다.
“경께서 이리도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무의미한 말장난은 그만두시고.”
“성상이 마음에 드신다면 대신.”
다시금 내가 대화를 마치려 하자, 루시페우스는 이번에도 재빨리 말을 붙였다.
“오늘 획득하신 다른 물품을 넘기시는 건 어떠실까요.”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의 낯을 쳐다보았다.
내가 귀족파에서 수정을 노리는 걸 알고서 경매에 참여했음을 짐작한 걸까? 아니면 우연일까?
‘어쩌면 내 의중을 알기 위해 떠보는 건지도….’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뭘 낙찰받았는지 아시고…?”
“얼마 전 물으신 것에 대한 답과 동일한 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이라…. 그때, 뇌리에 스치는 문구가 있었다.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족의 후예일 텐데 너무나도 손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아, 그러니까 내가 온 걸 진즉에 눈치채고 지켜봤단 소리였다.
아까 쌍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친 것도, 착각이 아닌 거였고.
‘그럼, 그때도 내가 거기 있는 걸 알아본 거였나…?’
아멜리가 꽃뱀 사기꾼의 함정에 빠진 날, 루시페우스가 등장할 자리에 레오폴트를 투입한 바로 그날에도 쌍안경 너머로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느꼈었으니까.
내 마법 보닛을 간파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림자 기사들을 알아챘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와, 정말 상상 이상….’
그가 이 세계관 최강자 수준의 실력자임에, 나는 새삼… 손끝이 떨리는 것 같았다.
주눅 들었음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나는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수정에 관한 귀족파의 음모를 모르는 척하면서.
“경께서 오늘 노린 것은 성상이라 하시지 않으셨나요? 다른 것들은 그냥 장식품에 불과한데요.”
“뭐라도 가져가야 제가 아버지께 면이 서겠지요. 적어도 성상을 가로채신 분과 협상하려 노력했다는 증거랄까요.”
“가로챘다뇨? 정당하게 낙찰받은 건데요. 비약이 심하시네요.”
“제 입장에서는 그리 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뭐어, 원작에서 그의 손에 떨어질 것을 내가 앗은 건 맞으니까.
나는 속으로 수긍했지만 언짢은 듯한 표정을 고수하였다.
“…그러면, 다른 거래를 청합니다.”
“저희가 어떤 거래를 할 수 있을지, 여전히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분께서 비호하시는 레이디가 한 분 계시지요.”
루시페우스가 내 말을 자르듯이 내뱉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아멜리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집착이 여기서도 발현되는 건가…?
나는 심각해지려는 낯을 감추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런가요?”
“어쩐지 그 레이디께서 번번이 저희 가문의 일에 얽혀 들어가시니, 4황녀 전하께 제 가문의 불민한 사정이 들어갈까 걱정돼서 말입니다.”
“불민한 사정이라.”
리나를 통해 귀족파의 일들이 새어나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걸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4황녀 전하께 직접, 이런저런 일들을 해명하고 싶은데….”
“직접… 해명요?”
“제 가문의 사정에 대해 오해하셔서 그 레이디를 보호하시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그러니까… 내가 귀족파와 로즈버리 간에 문제가 있는 걸 알아서, 아멜리를 통해 귀족파를 감시하려고 리나를 붙인 줄 아는 거구나?
‘리나의 임무는 단순히 아멜리 경호고, 귀족파 동태는 따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가 헛다리를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기분이 즐거워졌다.
한편으로는 그가 이렇게 해명하겠다고 나서니, 얼마 전 리나와 추측한 내용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루시페우스가 아멜리를 따라다녔다기보다, 로즈버리가 귀족파의 음모에 연루된 바람에 자꾸만 얽히는 게 맞나 보네.’
그가 아멜리를 좋아하는 것도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내가 잠시간 그 생각에 빠져 있는 바람에 침묵이 길어졌을 때.
“제가 오늘 단주님께서 얻으신 것을 봐드리는 대신 이를 청해주시면 어떠실까 싶습니다.”
봐준다라…. 그리 말하는 그의 눈빛에 위협적인 기색이 감도는 것도 같았다.
‘그가 진정 원한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강탈할 수 있는 일이니까….’
갑작스러운 긴장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마주하는 내내 어찌나 미간을 찌푸렸는지 이마가 아릴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그가 내게 손을 뻗은 것은.
절그럭, 당황한 알렉스가 검 틀어쥐는 소리가 났다.
어느새 장갑을 벗은 그의 엄지가 느릿하게 내 미간에 와닿아 있었다.
뭐지…?
“아무리 저를 경계하신다지만, 고운 이마를 자꾸만 찌푸리시니.”
“…….”
“조금 섭섭하려 합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손끝은 뜨거운 듯, 또는 반대로 너무나 차가운 듯 홧홧하게 느껴졌고….
“안타깝게도 전하께서 제 커다란 약점을 틀어쥐신 바람에 저는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는데.”
그가 엄지를 붙인 그대로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에 가렸던 내 얼굴이 그에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황한 낯빛을 가리지 못했는데.
“전하께서는 그걸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에스메르 양도 말이고요. 그리 말하는 루시페우스의 입매에 은은한 미소가 걸린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가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본 중, 가장 만곡한 호선.
그 말들이 얼마간 다정하게 울려서… 나는 아무런 가장도 하지 못하고 홀린 듯이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루시페우스는 가뿐히 말을 이었다.
“듣는 귀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군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의 손끝은 내 얼굴의 감촉을 새기고 싶은 것처럼, 미간을 떠나 관자놀이, 귀밑을 지나 턱 끝까지 꾹꾹 누르며 내려왔다.
이를 무엄하다 꾸짖을 수 없는 건, 평민인 에스메르 상단주 행세를 하고 있어서일까.
그의 낯이 한편으로는 감격에, 또 아련함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아서…일까.
“부디 늘, 지니고 다녀 주시기를.”
그 말에는 목적어가 빠져 있었지만, 나는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내 의뭉스럽게 굴던 내가 유일하게 시인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