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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구원하려던건 아니였는데요-74화 (74/220)

74화. 묘하게 돌아가는 러브라인 (9)

‘누구지? 여기에 관심 갖는 건 귀족파일 텐데.’

나는 난간에 기대어 있는 알렉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쌍안경 마도구로 지금껏 우리와 입찰 경쟁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살펴보던 차였다.

히익, 알렉스가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왜?”

“아, 그… 방금 입찰한 사람요. 알비누스의 차남입니다.”

“알비누스의 차남? 루시페우스… 경?”

“네, 그 사람요.”

알렉스의 확언을 듣는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말로 직접 움직였구나.’

그래, 아멜리를 구속하려는 도구가 될 텐데,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일리가 있지.

“…못 볼 거라도 본 줄 알았네. 경이 너무 식겁해서.”

“그냥 놀라서요….”

알렉스가 얼떨떨한 듯이 중얼거렸다. 알렉스는 보통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성정이라, 덩달아 나도 놀랐다.

그래. 놀라서였을 거였다.

루시페우스가 정말로 여기 있는 것부터가 놀랄 일이라 심장이 죄는 것 같았을 거고….

게다가 얼굴에 핏기가 가신 듯한 게, 원작 흑막이 여주에게 집착하기 위해 벌써 계략을 짜고 있다니 기가 질린 것도 같았고.

그래, 그래서겠지….

한데, 이상했다.

‘아멜리가 힐베르크 후작의 친딸인 걸 벌써 알 수가 없는데….’

아직 들려온 소식은 없지만 내가 인연 팔찌를 선물해 줬으니, 두 사람이 혈연관계인 걸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이때쯤에 아멜리에게 출생의 비밀이 있으리란 암시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그럼 지금은 단순히 힐베르크령을 먹으려는 음모 때문에 온 건가? …아니, 그럴 확률이 높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마음이 놓이는 건… 루시페우스가 아멜리의 혈연관계에 대해 벌써 알고 있다는,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일 거였고.

‘오히려 잘된 거야. 루시페우스 쪽에서 먼저 움직여 주니까, 내가 저 성상에 투자할 명분이 생기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퍽 즐거워졌다.

그때였다. 내 낯을 살피던 알렉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전하, 왜 이렇게 희게 질리셨어요?”

“응? 내가?”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 아직 혈색이 안 돌아왔나?

내게 다가온 알렉스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모자 아래로 내 이마를 콕콕 찍어내 주었다.

내게 신성력이 없다는 것까지는 몰라도 내가 허약한 편이라는 것만은 암조 모두가 아는 상식이라, 알렉스처럼 소대장들은 응급 용품을 상비하며 내 컨디션에 민감하게 굴었다….

으음, 루시페우스의 집착에 놀란 걸 들키다니.

나는 쑥스러운 마음을 담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 웃어 보였다.

“나도 놀라서. 그런데 알비누스의 차남이 저기에 입찰한다면, 뭔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동의합니다.”

“그럼 뭔지 몰라도, 우리도 한번 끼어들어 볼까…?”

뭔지 모르기는, 너무 잘 알았다.

뜻대로 되어서 기쁜 마음에 다시금 미소 지으며, 나는 번호판을 손에 쥐었다. 마도구로 된 번호판에 원하는 금액을 기입하면 사회자에게 전달되는 구조였다.

“네, 17번에서 금화 200개 입찰하셨습니다. 앗, 81번에서 바로 400개 입찰하셨군요.”

뭐라고?

내가 입찰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루시페우스가 두 배 높은 금액으로 입찰했다.

수정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이건 정말 뺏길 수 없는데….

나는 바로 다시 금화 500개를 불렀다.

“17번 금화 500개, 네, 81번, 바로 700개 입찰하셨고요. 17번에서 다시 750개, 네, 81번에서 800개 입찰하셨습니다.”

경합이 이어졌다.

‘꽤 적극적이네. 원래도 루시페우스가 낙찰받았을 테니….’

나는 슬며시 그가 자리한 쪽에 시선을 던졌다. 장내가 어두운 편이어서 마도구 없이는 그쪽을 확인할 수 없었다.

“네, 29번에서 830개 입찰하셨습니다. 오, 42번에서 850개, 네, 126번이 860개 입찰하셨습니다. 81번, 900개요.”

우리가 경쟁 붙으니, 이게 뭔지도 모르면서 궁금해진 사람들이 덩달아 끼어들기 시작했다.

쭉쭉 입찰액이 올라가던 순간.

나는 더 이상 경매가 늘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번호판에 금액을 입력했다.

“네, 17번에서 다시 금화 1500개! 많이 올라갔군요. 더 없으신가요?”

그리 말하며 사회자는 장내를 한번 둘러보았다.

금화 1500개면 황성 시내에 평민 부호들이 사는 1구역에서 적당한 집 한 채를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야 십몇 년을 모은 내 쌈짓돈에서 푸는 거지만, 귀족들한테는 가문 전체에 부담될 수도 있는 금액이지. 게이블스 정도면 모르겠지만….’

호기심으로 찔러보던 사람들이 포기했는지 장내는 고요했다. 이윽고 사회자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81번, 루시페우스의 자리일 거였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눈치였다.

그에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려는지, 사회자가 그편에서 시선을 떼어 다른 자리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왜 더 입찰 안 하지?’

원작에서 이 성상을 낙찰받은 루시페우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산 초과인가? 그땐 이만큼 입찰액이 올라가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경, 나 쌍안경 좀.”

알렉스가 내 손에 올려 준 쌍안경을 눈에 가져간 나는… 다시금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안경 너머 보이는 깊디깊은 갈색 눈동자.

쌍안경 너머 루시페우스는, 마치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매가 그리고 있는 건 명백히 옅은 호선이었다.

루시페우스가 어딘가 신경 쓰이는 감각을 느낀 것은 경매장의 제 자리에 앉고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웰컴 드링크로 나온 스파클링와인을 입가에 갖다 대던 중에 손짓이 멎으니, 그와 동석한 율리안 겔프가 의아한 낯을 했다.

“왜 그래?”

“…아냐.”

한번 신경을 써버리고 만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루시페우스는 긴 다리를 천천히 꼬았다.

그편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제 작은 빛.

그녀가 이번 경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전에 이르겐트에서 알게 된 바였다.

‘직접 오셨군.’

혹여 마주치기라도 할까, 정성스레 면도를 하고 인연 없던 페이즐리 문양의 행커치프를 챙기게 되는 이 마음이… 그러니까, 왠지 모르게 옷매무새에 더 신경 쓰게 되는 마음이 무엇일지….

그걸 거사를 대비하는 경건한 마음이라 치부한 채, 그는 제가 그녀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혹여 직접 오시느냐 여쭐 수야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거나 아쉬워하는 마음 자체를 모르는 탓에, 그는 그런 걸 물어도 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제는 다 사라진 옛날, 저와 공명하는 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제 통제하에 두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이건 확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다른데, 무엇이 다른지 그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타인에 대해서든, 사물에 대해서든 그가 무언가를 제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지난 생을 통틀어도, 이번 생을 통틀어도.

무엇을 가져본 적 없는 그는, 제 낯선 마음의 근원을 알 수가 없었다.

“여기 18번째 경매품인 대천사의 성상이 오늘 목표인 거지?”

그의 상념을 깨며, 도록을 뒤적이던 율리안이 물었다.

“응.”

“이 성상을 교단에 가져가면 성녀와 맞바꿨다는 힐베르크령의 반지를 주는 거고, 그 반지로 원로원에 신청하면 인장 반지를 재발급할 수 있는 거고? 복잡도 하구먼.”

율리안의 투덜거림에 루시페우스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원래대로 성상을 확보하러 오기는 했으나…. 예정대로 굴러갈 미래를 생각하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번번이 큰 변수가 되고야 있지만.

“힐베르크 후작이 후사가 없어서 이걸 안 찾고 내버려둔 건가? 거의 10년 전에 도난당한 거라며?”

“후사가 없다라…. 그래, 없지.”

늘상 제가 혼자 떠들게 내버려 두는 그가 길게 대꾸하자, 율리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웬일이래, 답지 않게. 어차피 알쏭달쏭한 말인 건 매한가지지만.’

두 사람의 우정인 듯 아닌 듯한 기묘한 관계는 8년 전, 아카데미에서 윌로우 게이블스가 4황녀에게 위해를 끼친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귀족파 실세 가문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겔프 자작의 둘째인 율리안은, 그날도 제 아비처럼 게이블스에게 겁박을 당했다.

“어떻게든 아우렌바흐, 저 꼬맹이를 붙잡아두란 말이야. 하다못해 마멧돼지 우리를 부숴서라도.”

마멧돼지 우리라니….

정말 무서워 죽을 것 같았지만, 윌로우 게이블스의 눈 밖에 나서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이 더 무서웠기에, 율리안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마멧돼지 우리의 자물쇠를 망가뜨렸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윌로우 게이블스에게 저주를 걸어서는 짐짝처럼 데리고 나타난 그 알비누스의 사생아.

“이자가 네게 아우렌바흐를 따돌리라 시켰지.”

고저 없는 목소리. 허름한 차림새, 왜소한 체구의 아래 학년 학생이 뿜어내는 음산한 기운에,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앞으로 아카데미에 오지 못한다. 상벌위원회에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너도 똑같이 당할 줄 알아.”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의 그르렁대는 신음처럼 울렸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가 그렇게 길게도 말하던 때가 있었네.’

그것이 연이 되어 두 사람은 이따금 귀족파의 회동에 끌려가면 곁을 지키는 사이가 되었다.

율리안은 소년 루시페우스가 무엇에 그리 화났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했다.

그가 윌로우 게이블스에게 쓴 것이 마법이었다는 사실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야 알았을 뿐.

“근데 자네. 좀 기분이 좋아 보여, 오늘?”

율리안의 물색없는 한마디에 루시페우스의 눈동자가 미끄러지듯이 그에게로 향했다.

“안색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고. 연회도 아닌데 크라바트까지 잘 챙겨 입고.”

“…그럴 리가.”

8년째 묘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율리안의 눈에, 그의 귀 끝이 미세하게 빨개진 것이 그 어둑한 조명 아래서도 보였다.

무슨 일이래….

“오늘 932회 특별 경매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그 감상도 이윽고,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루시페우스는 여느 때처럼 다른 귀족파 가문들이 제대로 할 일을 해내는지 느긋하게 감시했다.

귀족파가 올해의 ‘거사’를 위해 독식 중인 수정을 남김없이 매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치 수순처럼….

“네, 17번에서 금화 730개에 낙찰받았습니다!”

“더 없으신가요? 더 없으시면, 17번에 금화 290개로 낙찰합니다!”

“그럼, 이번 수정구는… 이번에도 역시, 17번에 금화 1030개로 낙찰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또였다.

제 작은 빛께서는, 이번 생의 변수 그 자체인 그녀께서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을 번번이 망쳐 가고 계셨다.

루시페우스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을까.

“약속하고 다르잖아? 다들 광산 매입하느라 주머니가 비었나…. 괜찮겠어?”

“…곤란하게 되었네.”

그리 말하는 그의 말끝에서는, 일말의 곤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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